공작이 회귀함 167화
파멸공 바알.
회귀 전의 발타자르는 바알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바알이 칼 프란츠 대공과 밀약을 맺어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일견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명색이 마계 최강자인 그가 한낱 인간과의 약속을 순순히 따라준 것이.
하지만 당시의 정세를 조금만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행동이었다.
제국의 권력자들은 드리우는 전란의 조짐을 감지하고 숨죽여 때를 기다렸고 그러한 와중에 용사들이 이 땅을 찾아왔다.
처음, 그들을 배척하던 권력자들은 용사들의 격렬한 저항에 그들의 가치를 깨닫곤 태도를 바꾸어 용사들을 세력에 흡수하며 더욱더 힘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키워나간 힘은 어느 순간 제국이라는 그릇으로 담지 못하게 되었고 전란의 먹구름이 제국을 뒤덮게 되었다.
이 땅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사방에서 비탄에 가득 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마왕들이 강림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심연을 기어 올라온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했고, 환희했다.
그들은 제국의 권력자들이 자신들과 손을 잡을 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고 마신을 이 땅에 강림시켜야 한다는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한 채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왕들은.
제국의 권력자들은.
저마다의 파벌을 따라서.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서.
서로 손을 잡고, 공통된 욕망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마신의 강림도, 대륙의 미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제 동족들에게조차 서슴없이 칼날을 휘두르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욕망.
오로지 욕망뿐이었다.
혼돈의 바람이 대륙을 휩쓸고, 탐욕의 꽃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그러나 욕망에 두 눈이 먼 그들에게도 두려움은 존재했다.
바로 바알이었다.
그들에게 바알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하여 마왕들과 제국의 권력자들은 바알을 토벌하기 위하여 연합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바알이라고 해도 제국 전체를.
그리고 다수의 마왕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바알은 당시 제국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던 칼 프란츠와 맹약을 맺고 칩거에 들어갔다.
덕분에 제국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기 직전까지 치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이후 제국이 분열하고 마왕들과 제국의 권력자들이 저마다의 국가를 건국하며 전국 시대의 시작을 알렸지만 바알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바알은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닌 자신에게 대적할 만한 존재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발타자르가 직접 만나본 바알은 수의 폭력으로는 어찌할 존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 * *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군.”
수련에 들어간 지도 벌써 이틀째였다.
사흘 만에 벽을 넘겠다고 결심했지만, 조금의 진전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벽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대륙에는 마스터들로 득실거렸겠지.
비록 마스터의 끝자락에 도달했다고 해도 고작 사흘 만에 벽을 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벽을 넘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질 수밖에 없으니까. 발타자르가 대면한 바알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신검의 힘을 온전히 끌어낼 수만 있다면 길이 보일 것도 같은데…….’
어떻게 하면 신검의 힘을 끌어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그의 등 뒤로 가냘픈 미성이 들려왔다.
“이봐! 발타자르!”
이에 발타자르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군타낙스 기사단에 의해 철저히 통제받고 있을 연무장에 들어온 묘령의 소녀가 있었다.
무척 의아한 상황이지만 소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는다면 누구든 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녀는 바로…….
“바르바토스. 그대가 여긴 어떻게……?”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등장에 발타자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자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바알을 만나고 왔다며? 그래서 와 봤지. 어땠어?”
“강하더군.”
발타자르의 솔직한 감상에 바르바토스가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승산은?”
“3할.”
“……확실한 거야?”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바알은 발타자르와 바르바토스가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상대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한데 승산이 3할이라니. 믿기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발타자르가 과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쳇. 그 자식. 못 본 새에 더 강해졌나 보네.”
작게 혀를 차던 그녀는 발타자르가 검들에게 둘러싸인 채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닫곤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대체 너 뭐 하고 있는 거야?”
“수련을 하고 있었네.”
“수련? 이게?”
바르바토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련에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지만 이렇게 검에 둘러싸여 있는 수련 방법은 그녀의 기나긴 삶 동안 단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었다.
“야. 그러지 말고 나랑 대련이나 하자. 그 편이 더 낫지 않겠어?”
바르바토스의 제안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그의 뇌리로 한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마기를 뿜어내 줄 수 있겠나?”
“뭐? 마기? 그건 왜?”
갑작스러운 부탁에 바르바토스가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씨익 웃었다.
“아하! 역시 요런 방법으론 안 될 것 같으니까 나랑 대련하는 것으로 결정한 거구나? 그거 좋지!”
바르바토스가 거침없이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연무장 일대에 짙은 마기가 퍼져 나갔다.
그러자 마기에 반응하듯 신검들이 일제히 공명하며 강력한 신성이 뿜어내기 시작했다.
“……뭐야. 이것들 신검이었어?”
하나도 아니고 일곱 개나 되는 신검들이 방출하는 신성에 바르바토스는 그제야 발타자르가 왜 이런 기행을 벌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렇군. 왜 이런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싶었더니. 이제야 이해가 되네.”
바르바토스는 깨달았다.
발타자르가 신검이 보유한 신성을 흡수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벽을 넘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단기간에 벽을 넘기에는 적합한 방법이긴 하지.’
발타자르가 알고 벌인 일은 아니겠지만 일정 경지에 오른 강자가 체내에 신성 혹은 마기를 쌓음으로 종을 초월하는 방법은 고대의 인간들이 벽을 넘기 위해 종종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편법으로 오직 중간계의 종족만이 가능한 방법이었다.
‘기왕이면 마기를 쌓는 쪽을 추천하고 싶긴 하지만. 바알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신성이 더 낫겠지.’
이 정도의 신성이라면 충분히 반신半神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터.
그렇게만 된다면 바알과 한 번 싸워볼 만하리라.
“자. 발타자르. 특별 서비스다. 이 몸이 직접 도와주지.”
바르바토스가 한껏 기세를 끌어올리며 거만한 목소리로 말하자, 발타자르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곤 연무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뭐야? 야! 어디 가!”
이에 바르바토스가 당황하여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발타자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는 아닐세.”
그녀와 여기서 대련을 벌였다간 제도가 초토화될 것은 불 보듯 뻔했기에 한 행동이었다.
말을 마친 발타자르가 재차 걸음을 옮기자 바르바토스가 다급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
“야! 같이 가!”
* * *
조반니 메디치의 주도 아래 프리드리히 공작가와 칼 프란츠 대공가가 회담을 가졌다.
“다들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반니가 칼 프란츠와 요제프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자 요제프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가 딱히 한자리에 모일 만한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그는 가문의 원수인 칼 프란츠와 한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한 듯 차가운 시선으로 칼 프란츠를 응시하고 있었다.
칼 프란츠는 그런 요제프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에 두 발을 턱 하니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반니는 요제프가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기미를 발견하곤 재빨리 말을 꺼냈다.
“자자. 그렇게 날 세우지 마시고 진정하시지요. 두 분을 이 자리에 모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마왕을 토벌한 이후의 일을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조반니의 말에 반쯤 몸을 일으켰던 요제프가 홱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두 분 모두 아시다시피 현재 제국은 발타자르 공작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대로 발타자르 공작의 주도 아래 마왕들의 토벌이 순조롭게 끝이 난다면 그 이후 저희는 황제 폐하가 아닌 발타자르 공작에게 충성해야 할 겁니다. 프락시온 제국의 적법한 혈통도 아닌 자에게 충성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말만 들어보면 황실의 앞날을 걱정하는 충신이었으나 칼 프란츠는 메디치가 종전 이후의 권력 구도에서 밀려날 것을 걱정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 또한 발타자르에게 황위를 제안받지 않았으면 그랬을 테니까.
“또한, 제국의 역사를 찾아봐도 군주가 아닌 신하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나라가 크게 흔들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쪽에 권력이 치우친 이 상황……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발타자르 공작의 뒤통수를 치자는 뜻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발타자르 공작은 본가의 은인.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요제프의 말에 조반니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현재의 권력 구도를 개편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그 말이었다.
권력 구도를 개편한다 함은 필연적으로 발타자르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으니 그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조반니의 제안에 흥미가 동한 듯 자리에 앉으며 그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신 방안이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우선…….”
요제프가 동조하려는 기색을 내비치자 조반니가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칼 프란츠는 속으로 조소를 금치 못했다.
저들 딴에는 자신들의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저런 모의 작당은 오히려 지니고 있던 권력을 모두 잃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발타자르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은 제도의 권신들이 좋은 예시였다.
‘발타자르 공작의 성정으로 볼 때 가만히만 있으면 적어도 가진 권력은 보존하게 해줄 것이거늘…….’
늘 그놈의 욕심이 문제였다.
하긴.
자신이라고 저들과 다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조만간 사고를 칠 것 같으니 발타자르 공작에게 미리 언질을 주어야겠군.’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만 그에게 빚을 씌울 기회는 흔치 않으니 말이다.
덕분에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니 칼 프란츠는 저들에게 감사의 답례를 전해주기로 했다.
“더 들을 것도 없군. 난 중립을 지킬 테니 알아서들 하게.”
요제프와 조반니가 이해하지 못할 감사의 답례를 전한 칼 프란츠는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이에 조반니가 다급히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칼 프란츠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