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66화
남부방어선.
칼 프란츠 대공이 대수림의 이변을 사전에 감지하고 그곳에서 튀어나올 몬스터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12개의 관문과 각 관문을 잇는 기나긴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관문마다 작게는 5천에서 최대 1만의 병력까지 상시 주둔하고 있는데 비상상황 발생 시 인근에서 주둔하고 있는 제1군단이 3시간 이내로 지원을 올 수 있는 독자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남부방어선을 함락하기 위해서는 최소 100만에 달하는 정병이 있어야 한다고 평하기도 하였는데, 일전에 수십만에 달하는 몬스터들의 대이동을 막아낸 전력前歷을 생각한다면 아주 틀린 평도 아니었다.
하여 남부인들은 이 남부방어선을 달리 철의 장벽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오늘 이 남부방어선이 다시 한번 침공을 받게 되었다.
“서둘러라! 궁수들은 제 위치를 지키고 지원병들은 어서 빨리 끓는 기름을 성벽 위로 올려라!”
성벽 여기저기서 장교들이 큰 소리를 내지르고, 그러한 장교들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다가올 전투에 대비했다.
“빌어먹을. 엄청나게도 밀려오네.”
성벽 위에서 활시위에 화살을 장전하던 병사 하나가 지평선 너머로 밀려드는 검은 물결을 발견하곤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마, 막을 수 있을까요?”
병사의 옆에서 신병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묻자 병사가 피식 웃으며 그런 신병의 등을 소리 나게 팡팡- 두드렸다.
“인마, 걱정하지 마. 수십만에 달하는 몬스터 대군도 막아낸 방어선이야. 이번에도 틀림없이 막아낼 테니 겁먹지 말고 발사 준비나 해.”
병사의 말에도 신병은 여전히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럴 만도 했다.
무수한 실전 경험을 쌓은 노련한 병사조차 밀려오는 마왕 군의 기세에 오금이 저릴 정도인데 하물며 이번이 첫 실전인 신병은 오죽하겠는가.
“걱정 마. 다 잘 될 테니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신병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병사가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동시에 저 멀리서 지휘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궁수대 발사 준비이이──!”
지휘관의 지시에 성벽 위에 도열 한 병사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잡아당기고 화살 끝을 마왕군을 향해 겨누었다.
빠른 속도로 밀려드는 마왕군이 사정권 내로 들어오는 순간.
“일제사격 개시이이──!”
지휘관의 신호를 시작으로 성벽 위에서 화살이 쏘아지며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그렇게 남부방어선의 선제 공격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발타자르가 제도에 복귀하자마자 레오노플 프락시온의 주관하에 제국 대공가와 3개 공작가의 주인들이 회동을 가졌다. 단연 화제는 북상을 개시한 마왕군이었다.
“그러니까. 남부방어선이 함락되었다?”
레오노플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전술지도를 바라보며 묻자 칼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현재 4개 관문이 함락되었고 남은 관문들 역시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허어…… 그렇다면 남부의 백성들에 대한 피난 계획은 어찌 진행되고 있는가?”
“현재 방어선 인근의 영지에는 피난령이 내려졌고 각 영지군의 주도 아래 착실히 피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숫자가 숫자인지라 방어선이 함락되기 전까지 모두 피난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칼 프란츠가 제도로 이끌고 온 병력이 남부에 주둔하고 있었다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었겠지만, 현재 남부군의 주력 대다수는 제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덕분에 개전 초기 방어선의 제4관문이 함락당했고 연쇄적으로 인근의 관문들까지 함락당하는 중이었다.
“자네 예상으론 얼마나 버텨줄 것 같은가?”
“길어야 사흘입니다.”
“병력을 지원한다면?”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겁니다. 증원이 도착할 시간이면 방어선은 이미 적들의 손에 함락되었을 테니까요.”
칼 프란츠의 대답에 레오노플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발타자르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공작의 생각은 어떠한가?”
레오노플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손을 뻗어 남부 일대에 놓아진 장기 말들을 쓰러뜨렸다. 이에 레오노플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남부를 포기하시지요.”
이 충격적인 발언에 시선들이 일제히 발타자르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발타자르는 개의치 않고 장기 말을 하나하나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와 방어선을 탈환한다거나, 지켜내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방어선 인근에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옳겠지만 지금 저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남부가 아닌 북부임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국의 영토가 적들에게 유린당할 것이 뻔한데도 말인가?”
발타자르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칼 프란츠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발타자르의 대답에 칼 프란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전술 지도를 빤히 응시하던 그는 발타자르가 옮긴 장기 말이 남부가 아닌 제도 인근에 길게 늘어선 것을 깨달았다.
순간 자신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이유였다면 전선을 제도 인근이 아닌 남부와 중앙의 접경지로 선정했을 것이었다.
또한, 발타자르의 지금까지 행보를 볼 때 그는 제국의 안위에 위협이 될 만한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정쟁을 벌일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남부를 포기하고 전선을 제국의 심장부로 옮길 만한 이유는 하나였다.
“마왕들의 본거지가 남부가 아닌 북부에 있는 모양이로군.”
발타자르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일을 거론하며 묻자 발타자르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북부에서 마신의 강림 의식을 진행 중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당장 눈앞의 위협을 막자고 대륙의 멸망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발타자르의 말에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조반니 메디치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남부 백성들을 희생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백성이란 영주들의 지지기반이었다.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것은 남부의 영주들에게 있어선 정치적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남부 영주들의 입장에선 이것이 제국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격한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원한다면 남부의 영주들에 한해서 독자적으로 영지민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 이동을 실시해도 좋네.”
“그걸 지금 대안책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발타자르에게 약점이 잡혀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지지기반을 모두 잃는 것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따라서 조반니는 발타자르의 의견에 격하게 반대했다.
“이대로 남부를 포기할 경우 희생될 백성이 얼마나 많을지 아십니까? 최소 수백만입니다! 그 많은 백성의 죽음을 방관한다면 제국의 백성 그 누가 우리 위정자들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그렇다면 달리 방도라도 있는 것인가?”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보다 나은 해결책이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위정자들이 할 일이 아닙니까.”
조반니가 열변을 토해내었다.
메디치가의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수한 백성들의 피를 흘린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주장만큼은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
제국민들의 미래와 남부 백성들의 목숨.
둘 중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하나같이 저울질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선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대공 전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발타자르의 물음에 칼 프란츠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뇌리로 회의 시작 전.
발타자르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황위에 오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회의에서 발타자르를 지지해 달라는 뜻이 분명했다.
지지기반을 잃는 것과 발타자르의 지지를 얻는 것.
칼 프란츠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지지기반은 다시 쌓으면 될 문제이지만, 발타자르의 지지는 천금을 주고도 얻기 힘든 것이다.’
칼 프란츠가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린다면 발타자르로부터 좀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 되려 일이 틀어질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괜히 욕심을 부리다 일을 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확실히.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뼈아픈 손실이지만 대국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현재 상황에서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을 듯하군. 공작의 생각은 남부를 미끼로 시간을 벌고 그 틈에 북부의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겠지?”
“그러합니다.”
“난 동의하네. 대신 이렇게 하지. 백성들 대신 본 대공가와 메디치가가 마왕군의 발목을 붙잡도록 하지.”
칼 프란츠의 제안에 발타자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불가합니다. 남부군만으로는 무리입니다.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지 않고서는 마왕군과 대치하는 족족 대패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런 무의미한 희생이 반복된다면 시간은 조금 벌 수 있을지언정 마왕군이 제도에 당도했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네가 판단하는 마왕군의 전력이 그 정도로 강한 것인가?”
칼 프란츠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 프란츠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끄는 것 정도라면 남부군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남부 백성들을 살리려고 했지만, 발타자르의 판단이 그러하다면 남부의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듯했다.
“프리드리히 공작가의 뜻은 어떠한가?”
칼 프란츠가 더 이상 이견이 없는 듯하자 레오노플이 프리드리히 공작가를 대표하여 참석한 요제프 프리드리히에게 말을 건넸다.
이에 회의 내내 한마디도 없던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본 공작가는…….”
발타자르의 도움으로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프리드리히 공작가는 그에게 큰 빚이 있었다.
또한, 남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프리드리히 공작가의 내전 동안 동부의 영토 일부를 집어삼킨 칼 프란츠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복수를 하는 일이었기에 요제프는 흔쾌히 발타자르의 손을 들어주었다.
“발타자르 공작 각하의 의견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결정되었군. 남부와 중남부를 포기하고 제도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으로 하겠네.”
그렇게 제국 수뇌부들의 회의가 끝이 났다.
* * *
회의가 끝난 직후 저택으로 돌아온 발타자르는 가라틴을 제외한 7대 신검의 보유자들에게 협조 공문을 보내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잡음이 나오기는 하였지만 레오노플과 칼 프란츠의 도움으로 7대 신검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
내리치는 벼락 산달폰 Sandalphon.
몰아치는 폭풍 스톰브링거 Stormbringer.
침식하는 어둠 에레보스 Erebus.
찬란한 태양 가라틴 Garatain.
해역의 경계 트라이던트 Trident.
태초의 불꽃 레바테인 Laevatein.
선지자의 빛 메타트론 Metatron.
기사라면 누구나 동경하며,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신검들이 한자리에 모인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한데, 한 가지 우스운 것은 그 귀한 신검들을 연무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꽂아두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연무장의 중심.
신검들에 둘러싸인 채로 발타자르는 바닥에 주저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붉은 마나가 마치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었는데 그 기운이 어찌나 강렬한지 근처에서 호위를 서던 가웨인의 손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지금 상태로는 바알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바르바토스와의 협공을 감안 하더라도 말이다.
이번 싸움에 대륙의 운명이 결정지기에 발타자르는 최대한 승리할 확률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그것을 바알 또한 눈치채고 있을 터.’
바알은 발타자르를 음식에 비유하며 이리 말했다.
조율자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진미라고.
그 말인즉 아직 발타자르의 힘이 바알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용의 일족은 시련을 넘겨야 진정한 조율자로 거듭나는 법이라는 말 또한 덧붙인 것으로 보아 발전의 가능성이 남아 있음은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기사들이 벽을 넘는 법은 다양했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위기상황을 넘기며 성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의 경우 현재 발타자르에게 해당되는 위기상황은 아가레스를 직접 상대하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고 발타자르는 발레포르에게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를 무찌를 당시.
성군의 구와 가라틴이 충돌하며 일으킨 거대한 신성의 폭발은 발타자르에게 신성이라는 힘을 부여해 주었다.
그리고 강력한 신성을 품은 대표적인 신물이 바로 7대 신검이었다.
하여 발타자르는 7대 신검을 한자리에 모았고, 이것들로 하여금 벽을 넘을 생각이었다.
‘사흘. 사흘이다.’
군이 북부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사흘.
그 시간 안에 벽을 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