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65화
“눈발이 거세군.”
실로 오랜만에 돌아온 북부의 풍경은 여전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너머로 강렬한 마기가 느껴졌다.
“그래. 관문이 함락당했다고?”
여전히 시선은 눈보라 너머를 향한 채 발타자르가 묻자 곁에선 비프로스트 요새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는 베디비어가 답했다.
“예. 바로 어제 자정을 기해 제1관문과 2관문이 일제히 함락당했습니다. 사실 무리를 했다면 막아낼 수는 있었겠지만, 일전에 각하께옵서 주신 언질대로 불순분자들이 언제 북부에서 난을 일으킬지 몰라 탈환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잘했네.”
발타자르가 베디비어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였다.
관문이 함락당한 것은 안타깝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느껴지는 마기로 짐작하건대 무리해서 관문을 지키려 했다면 관문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물론 큰 피해만 입었을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아가레스는 아닐 테고. 남은 마왕 중에 이만한 마기를 뿜어낼 만한 놈은 바알 혹은 바싸고 정도일 텐데…….’
발타자르는 눈보라 너머에 있을 마왕의 정체를 알아낼 필요성을 느꼈다.
상대가 바알이냐, 바싸고냐에 따라 지금 즉시 군을 이끌고 동토로 향할지 말지가 결정될 테니까.
“창을…….”
말하며, 발타자르가 손을 내뻗자 병사 하나가 제 손에 쥔 창을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었다. 그것을 움켜쥔 발타자르가 창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순식간에 붉은 오러가 눈보라 사이로 빛을 발하며 시위를 밝혔다.
꾸욱─
왼팔을 내뻗어 목표를 가늠하고 창을 쥔 오른쪽 어깨를 뒤로 크게 젖혔다.
동시에 허리가 반쯤 틀어지며 완벽하게 창을 내던질 자세를 갖추게 되자 발타자르는 지체 없이 창을 내던졌다.
파앙─!
순백으로 물든 세상에 붉은 선이 그려졌다.
창은 정확히 목표물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갔다.
찰나의 순간.
쏘아지는 창을 향해 검은 무언가가 뻗어져 나왔다.
그것이 창날에 닿는 순간.
쿠우웅─
폭음과 함께 거센 충격파가 휘몰아쳤다.
칼날처럼 휘몰아치는 눈보라 따위는 우습다는 듯이 일순간 눈발이 그치고 검은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눈발로 인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주변과 달리 이곳만 다른 세상인 양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 이질적인 광경은 사뭇 성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한 양지에 한 소년이 발을 디뎠다.
뒤통수에서부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돋아난 한 쌍의 뿔.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빛을 내뿜는 붉은 눈동자.
인외人外의 모습이지만 그림으로 그린 듯한 수려한 외모는 두렵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온화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 소년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발타자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럴 수밖에.
눈앞의 소년은 현 대륙에서 최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마계의 최강자.
파멸공破滅公 바알이었으니까.
* * *
바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아가레스가 북부에 있을 것이란 발타자르의 가설이 현실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북부행은 충분히 소득이 있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더해 행방이 묘연하던 바알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차라리 잘 되었어. 한 번에 쓸어버리면 되겠군.’
물론 이는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관문을 지키는 바알을 물리치고 이후 아가레스까지 상대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회귀 전의 연합을 아득히 상회 하는 전력을 구축했다고 해도 승산은 그리 높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바알과 아가레스가 따로 움직여 전력이 분산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나았다.
‘제도로 복귀하는 대로 곧장 북진 준비를 시작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돌연 바알이 입을 벌렸다.
톱날 같은 이빨 사이로 검은 기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발타자르가 황급히 소리쳤다.
“물러나라! 어서!”
발타자르가 외침과 동시에 검은 섬광이 대지를 가르며 빠르게 쏘아졌다.
위력적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피했다간 휘하의 병사들은 물론 가웨인과 베디비어까지 일격에 휩쓸려 버릴 것이 분명했기에 발타자르는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이 순식간에 붉은 오러로 뒤덮이고, 이내 허공에 붉은 선을 그리자 쏘아져 오는 섬광과 충돌했다.
꽈아아아앙─!!
충격파에 휩쓸린 이들은 여지없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날아갔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짙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발타자르. 맞지?”
저벅- 저벅-
먼지 사이로 바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뒷짐을 지고 발타자르를 올려다보았다.
“바알…….”
발타자르가 차가운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자 바알이 ‘이크!’ 하며 요상한 소리를 내뱉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보지마. 자꾸 그렇게 보면 기껏 억누른 충동이 올라오잖아.”
순간, 바알의 몸에서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저릿해질 정도로 강렬한 마기였다.
이에 발타자르가 마나를 끌어올리며 마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알이 탐색하는 눈빛으로 그를 한 번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뿜어내던 힘을 갈무리했다.
“뭐. 농담이야. 농담. 지금은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 긴장하지 마.”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전혀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사실 바알은 발타자르가 그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면 당장 손을 써 그 목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그의 기대에 충족하는 힘을 내비쳤고 하여 바알은 발타자르를 살려 두기로 결정했다.
‘지금 당장 먹어도 맛있겠지만 그래도 더 맛있게 먹으려면 참아야겠지.’
바알이 쩝- 하고 입을 다셨다.
기대에 충족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백 년전.
신계의 조율자를 집어삼켰던 바알은 당시 느꼈던 쾌락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의 쾌락을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한두 번 고비를 넘기면 꽤 농익을 것 같은데…….’
마침 좋은 건수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알이 배시시-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쯤 바싸고가 움직였을 거야.”
갑작스러운 그 말에 발타자르가 의아하단 기색을 내비쳤지만 바알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어갔다.
“목적은…… 너도 짐작하다시피 시간을 끌기 위해서지. 아! 그렇다고 무시하고 바로 이곳으로 올 생각은 하지 마. 녀석도 작정하고 움직이는 거라 아차 하면 순식간에 제국이 함락될 테니까. 제대로 준비해서 대응하는 게 좋을 거야.”
말하는 바알은 장난을 눈앞에 둔 개구쟁이의 모습과 흡사했다.
“이것을 왜 내게 알려주는 것이지?”
“왜 알려주냐고?”
바알의 새빨간 눈동자가 발타자르의 모습을 두 눈 가득 담아냈다.
그의 눈동자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원래. 용의 일족은 시련을 넘겨야 진정한 조율자로 거듭나는 법이거든. 그리고 조율자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진미이지.”
츄릅- 하고 입맛을 다시는 바알의 모습에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음식 취급하는 바알의 태도가 무척이나 불쾌했다.
“한 달. 딱 한 달 남았어. 한 달 후 강림 의식이 끝나고 마신이 이 땅에 강림할 거야. 그러니 서둘러 발타자르.”
바알의 등 뒤로 세 쌍의 날개가 펼쳐지며 날갯짓하기 시작했다.
“너무 늦으면 내가 직접 찾아갈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바알이 관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모습을 한동안 응시하던 발타자르는 이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 * *
바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듯 발타자르가 비프로스트 요새에 도착하자마자 제도에서 소식이 날아들었다.
남부 대수림에서 대규모 군단이 일제히 북상을 개시했다는 내용이었다.
추정 규모 150만.
칼 프란츠가 구축한 남부방어선으로 인해 잠시간 시간을 벌 수는 있겠지만 증원이 없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장군. 속히 제도로 복귀하시지요.”
생각에 잠겨 있는 발타자르에게 가웨인이 조심스럽게 복귀를 권유해 보았지만, 발타자르는 요지부동 답이 없었다.
‘한 달. 한 달이라…….’
과연 한 달 내로 바싸고는 물론 바알과 아가레스까지 물리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군의 편성과 이동하는 것에만 최소 보름 이상의 시간이 소모될 것이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싸울 수 있는 날이 보름에 못 미친다는 뜻이었다.
병사들이 그 강행군을 버텨낼 수 있을지는 둘째 치더라도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딱- 딱-
발타자르가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눈앞에 닥친 위협과 다가올 재앙.
둘 모두 중요하지만 촉박한 시간은 발타자르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발타자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알의 뜻대로 놀아날 수야 없지.’
발타자르는 결정했다.
남부를 포기하기로.
‘남부를 희생하여 최대한 바싸고의 발목을 붙잡아 시간을 번다. 그사이 바알과 아가레스를 물리치고 중앙에서 바싸고와 일전을 치르는 수밖에.’
위협은 견뎌낼 수 있지만, 재앙은 아니었다.
그러니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강림의식을 저지하는 것이 우선되어야만 하리라.
“제도로 갈 테니 준비하게.”
발타자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웨인이 레티시아를 부르기 위해 떠나갔다.
홀로 방안에 남은 발타자르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후우…….”
복잡한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매캐한 담배 연기가 그의 폐부를 들쑤셨다.
* * *
대륙 최북단.
동토의 끝자락.
아가레스의 주도하에 마신의 강림의식이 진행되는 이곳에 바알이 찾아왔다.
지면에 착지하며 날개를 휘둘러 마족 넷을 즉살시킨 바알은 날개 끝에 꽂힌 검은 심장을 혀로 핥으며 휘적휘적 아가레스를 향해 걸어갔다.
“이야. 열심히 하네? 아가레스.”
바알이 다가오자 한창 강림 의식을 준비하던 아가레스가 뒤를 돌아보더니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알. 귀중한 재물을 그렇게 멋대로 섭취하지 말게.”
“에이. 뭐 어때? 남는 게 재물인데. 그거 조금 먹었다고 의식에 지장이 가는 것도 아니잖아?”
마신의 강림에 사용될 재물들은 모두 위대한 마신의 것이었다.
그것을 제 것처럼 잡아먹은 바알의 행동은 무척이나 불경스러운 것이었고 당장 목을 쳐내도 할 말이 없을 만한 중죄였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몇 마디 타박하는 말을 내뱉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저 오만방자한 바알은 제 맘에 들지 않으면 유일하게 강림 의식을 진행할 수 있는 아가레스조차 아무 거리낌 없이 죽여 버릴 테니까.
“그래. 발타자르를 만나러 간다더니 이곳엔 어쩐 일인가?”
아가레스가 체념하며 묻자 바알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보고 오는 길이야.”
“……죽였는가?”
“아니.”
바알의 말에 아가레스의 텅 빈 동공에서 푸른 불길이 치솟았다.
“설마 그냥 보내준 것은 아니겠지?”
아가레스의 물음에 바알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 이야. 너 이제 예지까지 할 줄 아는 거야?”
바알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아가레스가 버럭 소리쳤다.
“바알! 놈은 이 땅의 유일한 대적자다! 그런 녀석을 그냥 보내주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가!”
아가레스의 고성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 그림자가 그의 머리맡에 드리웠다.
꽈앙-!
순식간에 아가레스의 머리통이 땅바닥에 처박은 바알은 아가레스의 머리 위에 올린 제 발을 떼어내곤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네가 언제부터 내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지?”
“미안…… 하네.”
아가레스가 빠르게 항복을 선언했다.
괜히 여기서 자존심을 내세워봐야 손해 보는 것은 그뿐이었으니 현명하다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자 바알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발타자르는 강림 의식을 막지 못해. 네가 준비한 것이니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지금 제국의 힘으로는 바싸고를 막는 것이 고작이라는 걸. 막지 않으면 멸망인데 저들이 안 막고 이곳으로 오기야 하겠어?”
바알의 말대로였다.
바싸고와 그가 이끄는 군세는 아가레스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이었다.
물론 바알이 이 사실을 발타자르에게 알려주었기에 미리 대비할 수는 있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제아무리 발타자르라도 바싸고를 무찌르고 제시간 안에 이곳까지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따라서 발타자르는 마신의 강림의식을 저지하지도 못한 채 바알의 쾌락을 위한 한 끼 식사 거리로 전락하리라.
“나는 농익은 진미를 맛보고 너는 네가 그토록 경배하는 마신을 영접한다. 서로 원하는 결말이니 좋게좋게 생각하자고. 응?”
바알의 말에 아가레스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내 떨쳐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아니 고서야 발타자르가 승리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