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64화
“이것 참. 깜빡 속았습니다, 형님.”
단상을 내려온 레오노플의 앞에 칼 프란츠 대공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랜만이구나. 레온하르트.”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도 레오노플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물었다.
“한데 발타자르 공작을 돕지 않을 생각이더냐?”
레오노플의 물음에 칼 프란츠가 힐끗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붉은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 일격에 괴물로 변한 아르세우스를 반으로 갈라 버리는 광경이 그의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도와주겠다 끼어드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정도로 압도적인 무용이었다.
“보시다시피 가 봐야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보다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어찌하여 그동안 죽음을 위장하고 계셨는지 말입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 터인데?”
“중요합니다. 형님의 대답에 따라 제가 어찌 행동할지가 결정될 테니 말입니다.”
칼 프란츠의 말에 레오노플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제 와 그가 대세에 어떠한 변화도 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그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2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세력을 구축한 권력자니까.
“왜? 나도 발타자르 공작처럼 자리에 욕심이 없다고 하면 황위를 노려볼 생각이더냐?”
“못할 것도 없지요. 조카님께서 저리 실책을 범하여 제 밥그릇을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대의를 위한 희생양이 되었으니 한번 노려볼 만한 것 아닙니까?”
칼 프란츠가 순순히 제 야심을 드러내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만약 레오노플까지 자리에 미련이 없다면 칼 프란츠가 제국의 옥좌를 노려보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비록 계승권은 제 조카들인 레오노플의 자식들에 비해 밀릴지언정 지닌 세력만큼은 압도적이었으니까.
그것은 지방을 전전하며 제대로 된 세력을 꾸리지 못한 황자들이 감히 넘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제가 지켜봐 온 형님이나 발타자르 공작은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 자라면 어떤 이가 황제가 되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아닙니까. 물론 형님의 경우는 프락시온 황가의 인물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말입니다.”
칼 프란츠의 말에 레오노플이 피식 웃었다.
“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구나.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큰 이득을 취하는 것은 여전해.”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지는 않지요.”
레오노플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칼 프란츠가 자신의 뒤를 이어 다음 대 황제가 된다라…….
생각해 보니 썩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자신의 자식 중에 황위를 이을 만한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발타자르와 어느 정도 세력의 균형을 맞추며 제국을 이끌어 갈 만한 황족은 칼 프란츠뿐이었다.
‘발타자르 공작이 황위에 욕심이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생각을 한 레오노플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의 제안을 일언 지하에 거절한 그 발타자르가 그럴 리는 없었다.
따라서 모든 일이 끝난 이후를 생각한다면 차선책으로 칼 프란츠를 내세우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니 말씀해 주시지요. 어찌하여 그러셨습니까?”
칼 프란츠가 재차 묻자 레오노플이 얕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당시의 나는 그에게 걸림돌일 뿐이었다.”
대신들이 역모를 일으킴으로써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정국.
그 혼란을 잠재우고 다가올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발타자르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그 말고 밀어줄 만한 이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이 레오노플이 죽음을 위장하며 모습을 감출 이유는 되지 못했다.
레오노플이 모습을 감춘 이유. 그것은 그가 계속 자리를 지켰을 경우 그의 존재가 발타자르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다가올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발타자르가 제국을 한 손에 쥐어 잡고 흔들어야 하는데 레오노플이 용인하고 발타자르가 그에 걸맞은 결과물을 내놓는다고 하여도 다른 신료들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분명 발타자르를 견제해야 한다며 레오노플을 압박할 테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려는 이들도 나올 테고 말이다.
그것은 레오노플도, 발타자르도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아쉬울 판에 그런 정치적인 문제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하여 죽은 척을 하기로 했다. 그편이 발타자르가 활동하기 편할 테니까.”
레오노플과 발타자르의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였고 결국 레오노플의 죽음을 위장함으로써 발타자르가 전면에 나서 급속도로 세력을 불려 나갈 수 있었다.
“별다른 이변이 없었다면 짐은 북부에서 노후를 보냈을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발타자르가, 내부로는 아르세우스가 서로 힘을 합쳐 다가올 위협에 맞서 싸웠을 테지. 아르세우스의 악수로 물거품이 되어버린 계획이지만.”
말하며 레오노플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혀를 쭉 빼물고 반으로 갈라진 아르세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쯧- 하고 혀를 찬 레오노플이 다시 고개를 돌려 칼 프란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물으마. 넌 이 제국을 위하여.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느냐.”
레오노플의 질문을 황제가 되기 위하여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느냐는 물음으로 해석한 칼 프란츠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즉답했다.
“모든 것.”
황제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었다.
* * *
죽을 땐 죽더라도 최대한 많은 피해를 안겨주겠다는 샤펠의 결심과는 다르게 싸움은 발타자르 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최상위 서열의 마왕이 아니고서야 어지간한 마왕들은 발타자르의 일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판국에 그들이 감히 발타자르를 상대로 상처 하나 입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고 발타자르는 변절자들의 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습하도록 지시한 후 단상의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웠다.
“왜 그러십니까? 무언가 석연치 않아 하는 표정이십니다만.”
가웨인이 다가와 묻자 발타자르가 시체들을 턱짓하며 말했다.
“저들 말일세. 너무 쉽게 쓰러뜨렸네.”
회귀 전의 변절자들은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치밀한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상황이 조금 불리해졌다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모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석연찮을 수밖에.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려놓고선 마무리가 허술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만…….”
발타자르는 담배를 태우며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지금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
따라서 저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 말인즉.
‘어설픈 일 처리도 사실은 다 시간을 끌기 위해서라는 뜻이 되는 것인데…….’
저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던 순간 한 가지 가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 일로 제국은 하나로 단결할 수 있게 되었고 남부 원정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저들이 원하는 시간을 버는 것과는 반대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부 원정이 저들이 원하는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이 어설픈 일 처리가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내가 뭔가 놓치는 것이 있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저들이 남부 원정을 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남부의 아가레스는 마왕 중 유일하게 마신의 강림 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마왕이었다.
그런 그를 토벌된다면 사실상 마왕의 강림은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최종적으로 마왕들은 이 땅에서 축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저들은 남부 원정을 최대한 늦추도록 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만약 저들이 남부 원정을 원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였다.
‘사실은 남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마왕의 강림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군.’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고, 제국이 아무것도 모른 체 남부 원정을 시작했다면…….
‘위험했어.’
발타자르는 실로 오랜만에 위기감을 느꼈다.
아직까지는 가설일 뿐이지만 충분히 시간을 들여 조사해 볼 가치가 있었다.
끝이 다가온 지금.
순간의 선택이 대륙의 운명을 좌우할 테니까.
‘어디일까…….’
우선 서부는 아니었다.
서부 토벌전 당시 서부를 이 잡듯 뒤지며 마왕들을 토벌했었으니까.
그렇다고 동부도 아니었다.
이번 동부 내전으로 가장 많은 이목이 집중된 곳이 그곳이었으니까.
‘가장 유력한 곳은 북부인데…….’
문득 동토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던 언데드 군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가레스 또한 언데드를 수족으로 부리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당연히 아가레스가 남부 대수림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동토의 언데드는 당연히 가미긴의 소행일 것이라 판단했지만.
만약 아가레스가 대 수림이 아닌 동토에 있다면? 그렇다면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되었다.
“가웨인.”
“예. 장군.”
“지금 즉시 레티시아를 불러오게.”
직접 북부로 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 * *
제도 인근의 산자락.
높이 치솟은 거목의 가지 끝에서 제도를 지켜보는 사내가 있었다.
그런 사내의 옆에는 검은 구체가 두둥실 떠올라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구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으로 제국은 남부 원정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 분명하네.]
쇠를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사내는 이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듯이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이봐, 아가레스.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는 마. 발타자르가 언제 어떻게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까.”
사내의 말에 검은 구체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클클클…… 설령 발타자르가 알아차렸다 해도 소용없네. 그럴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고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으니까.]
아가레스는 오히려 발타자르가 알아차리길 바란다는 투로 말했다.
[현재 난공불락의 요새라 칭해지는 비프로스트 요새의 제1, 2관문을 수중에 넣은 데다 그것을 지키고 있는 이가 바로 파멸공 바알일세. 제아무리 발타자르라고 하여도 그가 지키는 관문을 뚫고 강림 의식을 방해하지는 못할 걸세.]
아가레스의 말에 사내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바알은 남부 대수림에서 미끼 역할을 하는 것 아니었어? 그렇게 말을 맞추었던 것 같은데?”
사내의 말에 아가레스가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쩌겠는가. 그가 약속을 깨고 제멋대로 북부로 온 것을.]
“그럼 남부는 어떻게 할 거야? 제국군이 남부 원정을 시작하면 바로 알아챌 텐데?”
[그때쯤이면 이미 의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일 테니 그들이 속은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이곳으로 온다고 해도 그때는 강림 의식이 끝난 후일 걸세. 그리고 너무 걱정은 말게. 바알을 대신하여 내 파벌에 속한 마왕들을 대수림으로 보냈으니 말일세.]
아가레스가 호언장담을 하자 사내가 혀를 한 번 차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대소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끌끌끌! 기대하게. 마의 종주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면 자네의 소원대로 자네를 본래 세상으로 돌려 보내주실 것이니 말이야. 끌끌끌.]
그렇게 아가레스의 웃음소리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