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63화
“폐하!”
그것은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었다.
절절함이 묻어나는 아르세우스의 목소리에 일순간 레오노플이 뒤를 돌아보았다.
치켜떠지는 두 눈.
그러나 이내 제 크기를 되찾으며 동토의 한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폐하! 살아계셨습니까!”
한달음에 다가온 아르세우스가 레오노플의 발 치 앞에 바짝 엎드리며 감격스러워하는 얼굴로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그런 아르세우스를 지그시 바라보던 레오노플이 몸을 굽혀 그를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공작에게 이를 들이밀었다기에 머릿속이 텅 비었다고 생각했건만 그건 또 아닌 모양이로구나. 이렇게 딱 하나뿐인 살길을 찾아낸 것을 보면 말이다.”
귓가에 속삭이는 레오노플의 서늘한 음성에 아르세우스가 몸을 흠칫 떨었다.
“폐하. 그것이…….”
아르세우스가 황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레오노플은 이미 몸을 일으킨 후였다.
“공작.”
레오노플이 발타자르를 부르자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다가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어찌하겠나?”
레오노플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르세우스가 계속 황궁에서 농성을 벌였다면 앞서 언급했듯 마왕의 술수에 현혹되었다는 것을 명분으로 큰 힘 들이지 않고 제거할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아비의 생환에 감격하는 효자의 모습을 보이니 선뜻 손을 쓰기가 힘들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아르세우스를 내버려 둘 이유는 되지 못했다.
“황태자 전하. 이만 일어나시지요. 황제 폐하의 뒤를 이어 제국을 통치하실 분이 이렇게 만인 앞에서 무릎을 꿇어서야 되겠습니까.”
“고, 공작…….”
발타자르가 아르세우스를 향해 손을 내밀자 그것이 화해의 손길이라 생각한 아르세우스가 부쩍 밝아진 얼굴로 손을 맞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물론 그때까지 전하께옵서 무탈하셔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만.”
이어진 발타자르의 중얼거림에 아르세우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공작. 내 다 설명하겠네. 그러니…….”
“이런. 황태자 전하. 저희를 배신하시는 겁니까?”
아르세우스의 몸이 검은 연기에 휩싸이더니 이내 단상 아래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 아르세우스의 주변으로는 형형색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일단의 무리가 포위하듯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 * *
“네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아르세우스가 버럭 소리치자 그의 곁에 서 있던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그의 어깨에 턱 하니 팔을 걸치더니 말했다.
“이봐. 황태자 전하. 상황이 나빠졌다고 이렇게 바로 배신하는 건 아니지.”
“이, 이놈이! 얼른 이 손 치우지 못할까!”
“허어…… 자꾸 서운하게 이러기야? 일을 꾸밀 때는 만고의 충신이니 어쩌니 하면서 달콤한 말만 속삭이더니만.”
“내가 대체 언제……!”
간신히 붙잡은 동아줄이 끊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아르세우스가 다급히 이들과의 관계를 부정하려 들었지만, 그의 목을 향해 겨누어지는 날카로운 비수로 인해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꾸 이런 식이면 여린 내 마음이 상해서 무슨 짓을 벌일 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겠어?”
검은 로브인의 말에 아르세우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다 자신의 신세가 이리되었는지 한탄하며 아르세우스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참아내고 있자 그런 아르세우스의 뺨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검은 로브인이 말했다.
“우리가 제도를 빠져나갈 때까지만 인질이 되어달라고. 동지끼리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안 그래?”
순간 아르세우스는 이 상황이 그에게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효심이 지극한 황태자가 제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문의 집단에게 납치를 당했다.
이는 동정을 사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더하여 발타자르가를 습격한 것이 마왕의 술수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 변명한다면…… 자신의 실책을 무마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좋네. 인질이 되어주지.”
머릿속으로 손익계산을 끝마친 아르세우스가 순순히 인질이 될 것을 자처하자 검은 로브인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에 쥔 비수로 아르세우스의 목을 그었다.
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르세우스는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목에서 피를 꾸역꾸역 흘려내더니 이내 혼절했다.
검은 로브인은 아르세우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의 신병을 동료에게 넘겨주며 중얼거렸다.
“자…… 그럼 인질극을 시작해 볼까?”
그렇게 온 제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악의 인질극이 시작되었다.
* * *
단상 위에서 아르세우스와 검은 로브인의 행태를 지켜보던 발타자르는 돌연 검은 로브인이 황태자의 목을 베어버리는 행동에 눈을 치켜떴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검은 로브인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황태자를 살리고 싶다면 병사들을 물려라!”
검은 로브인의 외침에 그들을 향해 검을 겨누던 병사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제도의 성문을 통과한 순간 황태자를 풀어주겠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를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말하며 검은 로브인이 까딱 고갯짓하자 아르세우스를 어깨에 들쳐 맨 이가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황태자가 어떻게 될지는 그대들이 더 잘 알겠지. 자! 그러면 이제 길을 열어라!”
검은 로브인이 윽박지르듯 소리치자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발타자르가 돌연 손을 내뻗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법사들이 일제히 통신구의 연결을 끊으며 제도를 휘감은 빛이 사라졌다.
동시에 병사들 사이로 군타낙스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로브인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황태자를 이대로 죽일 셈이냐!”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검은 로브인이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소리치자 발타자르는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시답잖은 인질극이었다.
아르세우스가 발타자르를 배신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에 와서 아르세우스의 목숨값은 길거리의 부랑자만도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아르세우스가 시급을 다투는 중상을 입었다고 해서 당황할 리가 없었다.
물론 레오노플이 개입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는 아르세우스의 목숨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방관하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겠군.’
결정적인 장면에서 끊겼으니 제국민들은 이제 이 일의 결과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잠시나마 지극한 효심을 보였던 제국의 황태자가 마왕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제국민들은 마왕들을 규탄할 것을 소리 높여 외칠 것이고, 남부 대수림을 정벌하려는 발타자르의 계획에 큰 힘을 실어줄 것이었다.
“뭣들 하느냐! 마왕의 수족들이 제국의 황태자를 시해하였다. 어서 놈들의 목을 베어라!”
목숨이 붙어있음에도 태연히 그의 죽음을 언급하는 발타자르의 행동에 검은 로브인은 발타자르가 이참에 자신들과 황태자를 한꺼번에 치워 버릴 속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챙- 채앵-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며 군타낙스 기사단과 검은 로브인의 동료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 이 정신 나간 놈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망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사대 마탑이 축이 되어 제도 전역을 둘러싼 방해 마법진으로 인해 제도에선 전이 마법을 펼칠 수 없는 데다 사방이 다 적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몸을 피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이는 실로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선 꼴이었다.
“황태자를 치료해라! 어서!”
이제 살길은 아르세우스가 레오노플에게 인정을 호소하게 하는 것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검은 로브인이 황급히 지시를 내렸다.
이에 아르세우스를 들쳐 맸던 이가 그의 상처를 치료하자 혼절했던 아르세우스가 정신을 차렸다.
“헛! 이게 무슨……?”
정신을 차린 아르세우스가 눈 앞에 펼쳐진 난전에 당혹스러워하는데 검은 로브인이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아채더니 그를 땅에 내팽개치곤 사나운 기색으로 말했다.
“얼른 황제에게 빌어라.”
“……뭐?”
“황제에게 살려달라 구걸하란 말이다! 지금 당장!”
검은 로브인이 아르세우스를 향해 윽박지르는 가운데 그의 등 뒤로 레오노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네.”
이에 검은 로브인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샌가 발타자르의 곁에 선 레오노플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죽은 자식일세. 그러니 죽이던, 살리던 자네 맘대로 하게.”
“아, 아버지!”
레오노플의 매정한 말에 아르세우스가 처량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레오노플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혀를 차며 말했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가만히만 있었더라면 철의 옥좌가 네 것이 되었을 것이거늘.”
레오노플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을 깨달은 아르세우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잘못…… 잘못했습니다. 폐하! 아버지!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더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하지만 레오노플은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었다.
“일을 도모하고자 했으면 철저하게 할 것이지…… 쯧쯧.”
발타자르를 배신하고 그에게 목줄을 걸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그가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전무 했다. 그러니 살려두어 봤자 분란 거리만 될 뿐이었다.
따라서 이참에 대의를 위한 명분으로써 죽는 것이 황실과 제국을 위하는 길이었다.
“제국의 황족답게 당당하게 가거라.”
그 말을 끝으로 레오노플이 단 상 아래로 내려가며 인파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하…… 돌아가는 꼴을 보니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 버림받으신 것 같네?”
마지막 수단인 황태자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자 검은 로브인은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되면 회주의 뜻대로 되는 건가?’
검은 로브인은 반천회주의 마지막 지령을 떠올렸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시 최대한 장렬히 산화하여 제국이 남부 침공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유도하라는 지령을.
‘이런 곳에서 죽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검은 로브인이 뒤집어쓴 로브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얼굴을 제외한 신체가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괴인이었다.
세븐스타Seven Star의 일좌.
흑운군주黑雲君主 샤펠이 모습을 드러내자 로브인들의 정체가 변절자 무리임을 확신한 발타자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스르릉─
검명을 토해내며 발타자르의 검이 부드럽게 검집을 벗어났다.
그것을 지켜보던 샤펠이 망연자실 해하는 황태자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봐, 황태자 전하. 이대로 있을 거야?”
“뭐?”
“복수…… 해야지?”
샤펠의 손이 아르세우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컥…….”
아르세우스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돌연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가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는 생각이 들 무렵.
아르세우스의 피부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괴물로 변화했다.
“자. 한번 놀아보자고.”
샤펠이 두 팔을 벌리며 사방으로 검은 연기를 흩뿌리는 것과 동시에 괴물로 변한 아르세우스가 단상 위의 발타자르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크와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