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62화
까득-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어찌하면…….”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아르세우스는 제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연신 주위를 서성거렸다.
“황태자 전하. 조금 진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황이 긴급한 것은 알지만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어찌 진정한단 말이냐! 계획했던 일은 모조리 물거품이 되었고 이제는 발타자르가 내 목을 가져가기 위해 저리 황궁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황실기사단장 드미트리 백작의 충언에도 아르세우스는 진정하기는커녕 크게 성을 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발타자르에게 직접 손을 썼으니 그의 분노를 피할 길은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희망이었던 중앙군조차 깜깜무소식이니 아르세우스는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다고 발타자르 공작이 날 용서하리라 보는가! 오밤중에 보란 듯이 발타자르 가를 습격했네! 그의 목에 칼을 겨눈 것이란 말일세! 세상천지에 어느 성인군자가 제 목에 칼을 겨눈 이를 용서하겠는가!”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고래고래 소리치는 아르세우스를 바라보며 드미트리 백작은 남몰래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엇이 황태자 전하를 현혹하였단 말인가.’
무장인 그의 짧은 소견으로도 발타자르에게 손을 쓰는 것은 실로 무모한 일이었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가 적대적인 인물이었다면 모를까, 아니, 설령 적대적인 인물이었다고 해도 너무 성급한 행동이었다.
발타자르가 적으로 돌아섰을 때 어떤 위협이 되어 다가올 것인지를 황태자가 모를 리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도 일을 벌인 것은 분명…
‘최근 황태자 전하와 접촉했던 그놈들이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번 일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아르세우스의 엄명이 있었기에 따로 뒤를 캐보지 않았던 것이 이렇게 한이 될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럴 때 슈텔리앙 후작 각하께서 계셨더라면…….’
시기가 엇갈려 슈텔리앙 후작은 황궁에 입궁하지 못한 상태였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아르세우스를 설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련만.
‘아니. 차라리 다행인가?’
현재 황궁을 포위한 발타자르의 군대로 인해 외부와의 접촉이 일체 차단된 상태였다. 덕분에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슈텔리앙 후작이 입궁하지 못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황궁에 갇혀 손도 써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후우…… 선황께서 계실 적이 그립군.’
드미트리 백작이 속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창문 너머로 서광이 뿜어져 나오며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 * *
“조용하군. 마치 망자의 도시를 보는 것 같아.”
산책하듯 여유로이 탈라브하임의 거리를 노닐던 레오노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밝았음에도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집안에 틀어박힌 탓이었다.
“그래, 공작. 어떤 무대를 준비한 것인가?”
레오노플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적막이 가득한 거리에 고요히 울려 퍼지는 소리.
그것과 동시에 거리 곳곳에 검은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품에서 자그마한 구슬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것은 통신구가 아닌가. ……그렇군.”
구슬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챈 레오노플은 발타자르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바로 오늘. 제국 전역에 황제의 귀환을 알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허허…… 팔자에도 없이 제국 전역에 얼굴이 팔리게 생겼구먼.”
“송구합니다.”
발타자르의 말에 레오노플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은 전혀 송구스러운 것 같지가 않네만?”
레오노플의 짓궂은 농담에도 발타자르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에 레오노플이 흥이 식었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사람 참 재미없기는.”
“폐하께서는 북부에 계시는 동안 많이 가벼워지신 것 같습니다만.”
다른 이였다면 무례하다며 당장에 호통을 쳤겠지만, 그 상대가 발타자르이기 때문일까?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곳에선 무게를 잡아야 할 사람이 없었으니 말일세. 그보다 본 무대는 황궁인가?”
“아닙니다.”
발타자르의 대답에 순간 레오노플의 눈동자가 빛났다.
황제의 귀환을 알리기에 황궁만 한 곳이 없을 텐데도 그곳이 본 무대가 아니라면 현재 황궁에서 아르세우스가 농성 중일 것이 분명했다.
발타자르가 그것을 제압하지 못해서 내버려 둔 것은 아닐 테니 그가 생각하는 바는 뻔했다.
“손 쓰기도 하찮다는 것인가?”
“괜한 피를 흘리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사람. 그 말이 그 말이지.”
레오노플이 발타자르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저 멀리 보이는 준비된 단상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기를 잠시. 단상 앞에 도착한 레오노플은 오르기 직전 툭 한마디를 내던졌다.
“현명한 선택이었네. 쉬운 길을 두고서 괜히 분란 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으니 말이야.”
이윽고 레오노플이 단상 위에 올랐을 때.
제국의 각 도시에 준비한 통신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황제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 * *
단상의 끝으로 걸어간 레오노플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선 환한 빛무리와 함께 실시간으로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고 탈라브하임의 시민들은 갑작스레 벌어진 이변에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을 바라보다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깜짝 놀라 집 밖을 뛰쳐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광경은 탈라브하임 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겠지.
“제국의 신민들이여.”
레오노플의 중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본능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넋을 놓고 상영되는 레오노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만끽하며, 레오노플이 황제의 귀환을 선언했다.
“짐이 돌아왔노라.”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여파는 컸다.
백성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황제 폐하 만세!”
“프락시온 제국 만세!”
“철의 제국이여! 영원 하라!”
함성은 순식간에 탈라브하임 전체를 뒤흔들렸다.
그 광경에 가웨인이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요. 폐하께서 백성들에게 이만한 신망을 받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제는 존재 자체만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네. 일종의 정신적 지주이지. 긴 시간 동안 비어 있던 옥좌의 주인이 돌아왔으니 저리 환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세.”
이것은 제아무리 발타자르라고 해도 대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외부로는 발타자르가 권력자들을 하나로 묶고, 내부로는 황제가 백성들을 다독인다.
발타자르가 구상한 가장 이상적인 체제였다.
만약 아르세우스가 사고를 치지 않았더라면 저 자리에 있는 것은 레오노플이 아니라 아르세우스였을 것이었다.
“음? 손님들이 도착했군.”
가웨인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메디치, 칼 프란츠, 프리드리히.
발타자르가 급부상하기 전, 제국을 좌지우지했던 유력 가문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었다.
이종족 연합의 수뇌부들까지 이어서 등장하자 텅 빈 광장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무대의 조연들이 모두 등장하자 이제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음을 깨달은 발타자르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단상 위로 향했다.
* * *
단상 위에서 연설하고 있던 레오노플은 단상 아래 모인 이들을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확실히 발타자르가 걸물은 걸물이군.’
실로 대단한 자였다.
몰락 귀족 출신으로 변방의 기병대장에서 시작하여 강력한 정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결국 제국 최고의 권력자에 올랐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신의 무력도 뛰어난 데다 제국 유력 가문들을 제 수족처럼 다룰 정도로 정치적 수완마저 뛰어났다.
모자란 구석 하나 없는 그는 마치 다가올 위협으로부터 제국을 지키기 위해 하늘이 안배한 존재 같았다.
그가 있다면 결코 이 제국이 무너지는 일은 없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뛰어오르는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탁-
빠르게 치솟은 발타자르가 이윽고 자신의 곁에 내려서자 레오노플은 자연스레 한 걸음 물러나며 발타자르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이에 발타자르가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손을 내뻗으며 입을 열었다.
“위대하신 제국의 통치자시여. 그리고 친애하는 제국의 신민들이여.”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귀 전의 그가 높디높은 벽처럼 느꼈던 칼 프란츠도.
그에게 수많은 좌절을 안겨주었던 공작가의 주인들도.
그가 감히 말조차 섞지 못했던 이종족 연합의 수뇌부들까지도.
모두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도래했노라.”
발타자르가 내뻗었던 손을 움켜쥐었다.
묵직한 그의 음성이 좌중을 짓눌렀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협이 우리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하고 있다. 제국 각지에서 준동했던 마왕들이 그 증거이며, 그들은 제국의 심장인 황궁에까지 그 마수를 뻗쳤다.”
순간 그의 등 뒤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범인은 레오노플이었다.
발타자르가 은근슬쩍 황태자를 마왕과 엮어버린 것을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별다른 제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암묵적인 승인을 한 것으로 생각하곤 묵묵히 말을 이어갔다.
“그들로 인해 수많은 피가 흘렀고 그 여파로 제국 전역은 비탄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하다.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마왕들을 제국에서 몰아낼 수 있었지만, 이것으로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전쟁.
그로 인해 고통받은 백성들.
이것들을 뭉뚱그려 마왕들의 책임으로 떠넘겼다.
백성들이 원망할 대상을 마왕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반발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환영하면 모를까.
“현재 남부 대수림에서는 제국과 제국이 비호 하는 이 땅을 위협할 마신의 강림을 위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인간이란.
공통된 적이 있을 때.
더욱 굳게 단결할 수 있었다.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이 제국은.”
마신이란 공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이 땅을 수호하는 수호자로서. 그대들의 가족과 친인들을 지키기 위하여 남부로 향할 것이다.”
하나로 뭉쳐.
“그곳에서!”
마신과 마왕을 상대로.
“이 땅의 운명을 결정하는 위대한 성전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가자. 이 땅을 지키기 위해.”
그 누구도 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위대한 철의 제국. 프락시온의 이름으로.”
발타자르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에서 붉은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프락시온 제국 만세!”
“철의 제국이여! 영원 하라!”
좌중의 환호를 받으며 발타자르가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곳에는 황궁을 박차고 뛰쳐나온 황태자가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