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61화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웨인은 군타낙스 기사단과 북부군 2만을 이끌고 황궁을 포위했으며, 가장 큰 변수인 마탑들은 발타자르가 미리 손을 써둔 터라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도 잡음 하나 나오지 않았다.
또한, 트리스탄은 자신의 기수들을 이끌고 탈라브하임의 각 성문 인근에 주둔 중이던 중앙군의 지휘권을 장악, 병력 통제를 실시했다.
물론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앙군의 사령관 군부대신 델피아네 후작을 비롯한 일부 지휘관들이 이에 반발하며 저항했지만, 트리스탄이 본보기 삼아 반발하는 이의 머리통을 깨부수자 순한 양으로 돌변하여 통제에 순응하였다.
황궁을 제외한 제도 탈라브하임이 발타자르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시간 남짓.
이는 발타자르의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다그닥- 다그닥-
황궁을 포위한 북부군을 향해 말을 탄 사내가 다가왔다.
그 모습을 발견한 병사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길을 열었다.
이에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몰아 병사들을 지나쳐 황궁의 성문으로 향했다.
“프락시온 제국에 영광을! 북부의 통치자. 제3군 총사령관, 발타자르 공작 각하께 충성을!”
군타낙스 기사단과 함께 황궁을 주시하던 갤러해드가 다가오는 발타자르를 발견하곤 경례를 올렸다. 그러자 뒤이어 군타낙스 기사단을 비롯한 북부군 전체가 경례를 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철의 제국에 영광을!]
[발타자르 공작 각하께 충성을!]
[와아아아─!]
지축을 뒤흔드는 함성에 황궁의 성벽 위에서 북부군을 주시하던 근위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발타자르에게 가웨인이 다가와 말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 군타낙스 기사단을 비롯한 북부군 2만이 황궁을 포위 중이며, 현재 황궁 내에 주둔 중인 근위군과 황실기사단의 숫자는 대략 3천 남짓으로 추정됩니다. 포위를 진행하는 동안 일체의 마찰도 없었으며 현재까지 황궁을 벗어나거나 진입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가웨인의 보고에 발타자르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로 보이는 것은 근위군뿐.
황실기사단이나 귀족들의 모습은 일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중앙군과 마탑은 발타자르의 통제 아래 떨어졌으니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으며 한 줌 남은 근위군과 황실기사단으로는 그 어떠한 일도 도모할 수 없었다.
아르세우스 황태자로서는 실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고생했네.”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바로 황궁으로 진입하시겠습니까?”
“아닐세.”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발타자르의 지시 한 번이면 쉬이 함락될 황궁이었지만 그렇다고 황궁을 점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반역이므로.
자칫 민심이 발타자르를 향해 날을 세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심이 중요하긴 하지만 정보 공작과 여론몰이를 통해 충분히 통제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발타자르가 마무리를 짓지 않는 이유는 현재 그가 준비한 패가 제도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오가 되기 전엔 일이 마무리될 테니 그때까지만 더 고생하게.”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표정과 함께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예정일이 오늘이었군요.”
“그렇네.”
고개를 끄덕이며 가웨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인 발타자르는 이내 갤러해드를 불렀다.
“갤러해드.”
“예. 주군.”
“군타낙스 기사단을 이끌고 따라오게.”
발타자르의 지시에 갤러해드는 말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군타낙스 기사단이 일제히 말 위에 오르며 갤러해드의 뒤로 도열 했다.
동시에 발타자르가 말머리를 돌리자 가웨인이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 물음에 발타자르가 짧게 답했다.
“북문.”
저 멀리.
북에서부터 귀중한 손님이 오고 있었다.
발타자르가 직접 마중을 나가야 할 정도로 중요한 손님이.
* * *
서문.
성벽 위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는 지축이 뒤흔들림과 동시에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단의 군세를 보곤 기함했다.
순백의 깃털을 흩날리는 일각수를 탄 기병들을 필두로 어림잡아도 족히 십 수만은 되어 보이는 군세였다.
그들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등장하자 병사는 다급히 비상사태를 알리는 경종을 흔들어 대었다.
댕댕댕- 댕댕댕댕-
병사의 다급한 심정을 대변하듯 경종은 쉴새 없이 목놓아 소리쳤다.
이에 성벽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이 부랴부랴 성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중앙군을 통제하던 발타자르 예하의 지휘관 또한 포함되어 있었는데, 일전에 있었던 서부 토벌전에 참전했던 그는 단박에 다가오는 군세의 정체를 파악해 내었다.
이에 그는 이종족의 군세가 다가오면 탈라브하임에 입성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발타자르의 지시를 떠올리곤 지체 없이 성문을 닫으려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대로 두어라! 이종족 연합의 군세다! 발타자르 공작 각하께서 초대한 손님이니 성문을 열어두고 길을 터라!”
지휘관의 지시에 병사들은 당혹스러워하며 자신들의 상관을 바라보았지만,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반쯤 올라갔던 도개교를 내리고 성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러한 광경은 남문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금색 바탕에 붉은 장미가 새겨진 깃발, 푸른 바탕에 늑대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흩날리며 들이닥치고 있었다. 메디치 공작가와 칼 프란츠 대공가의 군세가 그들이었다.
두 군세가 성문을 향해 다가오자 서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문 역시 성문을 열고 그들을 맞이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칼 프란츠는 껄껄거리며 큰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원…… 하하하하!”
한참을 그렇게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대는 칼 프란츠의 모습에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찬 외눈의 사내, 레이크 서머셋이 의아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대공 전하. 무엇이 그리도 즐거우십니까?”
그의 물음에 칼 프란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웃음을 뚝 그쳤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네. 내 꼴이 너무 한심해서 웃은 것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레이크가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칼 프란츠가 활짝 열린 탈라브하임의 성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보고서도 모르겠는가? 중앙군도 아닌 군대가, 그것도 십 수만에 달하는 대군이 접근하고 있음에도 경계하기는커녕 어서 오란 듯이 성문을 활짝 열고 있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황태자가 조치를 취해 둔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 군뿐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
말하며 칼 프란츠가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조반니 메디치를 위시한 메디치 공작가의 군대가 진군하고 있었다.
“보르네오가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 조반니가 메디치가의 실권을 틀어쥐었네. 세력으로 앞서던 보르네오가 이렇게 갑작스레 밀려난 까닭은 스포르차 후작가가 몰락했기 때문일세. 그리고 스포르차 후작가를 몰락시킨 것이 바로 발타자르의 사냥개이지.”
칼 프란츠가 이 정보를 접한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같은 남부에 자리한 경쟁 세력의 후계 구도가 뒤바뀌었음에도 칼 프란츠가 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짐작건대 발타자르의 정보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 분명했다.
“자. 그렇다면 저들이 제도에 군을 이끌고 온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답은 뻔했다.
황태자의 수완으로는 메디치가의 협조를 얻어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니, 결국 메디치가를 불러들인 것은 발타자르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보이는가? 성벽 위의 지휘관들이 하나같이 북부군 소속인 것이.”
칼 프란츠의 말에 레이크가 반사적으로 성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성벽 위에 서 있는 지휘관들의 가슴팍에 새겨진 문장을.
발타자르가를 상징하는 포효하는 용이 그의 망막에 선명하게 맺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기회가 왔다며 좋아하는 꼴이라니.”
칼 프란츠가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숫제 발타자르의 손에 놀아난 꼴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수도 없었다. 발타자르가 꾸민 무대의 결말이 그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몰랐으니까.
분하고 원통하지만 발타자르의 뜻대로 움직이더라도 그 결말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가세. 뜻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무대의 조연이 되었으니 끝은 봐야지 않겠는가.”
탄식과도 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칼 프란츠 대공이 군을 이끌고 제도 탈라브하임에 입성했다.
* * *
북문에 도착한 발타자르는 성문 앞에 군타낙스 기사단과 병사들을 도열시키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얼마간.
지평선 너머로 일단의 기마 무리의 호위를 받으며 화려하게 장식된 팔두마차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왔군.”
이윽고 마차가 발타자르의 앞에 멈추어 섰다.
마차의 문이 매끄럽게 열리더니 그 안에서 묘령의 메이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메이드의 도움을 받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내려 발타자르에게 다가왔다.
“남은 생은 북부에서 유유자적 할 줄 알았건만.”
노인은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혀를 차며 탈라브하임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발타자르가 짧게 인사를 건네자 노인이 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래. 아르세우스 고 아둔한 놈이 제 밥그릇을 제 발로 차버렸다지?”
발타자르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히 답이 되었던지 노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날 부른 것을 보면 사고를 쳐도 아주 크게 친 모양이로군.”
말하며 노인이 제 허리를 통- 통- 가볍게 두드렸다.
그 모습이 한적한 시골의 여느 촌부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촌부와 다른 점은 주변을 압도하는 기운을 은연중 뿜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고것을 어찌할 생각인가?”
노인이 형형한 눈빛으로 발타자르를 응시하며 묻자 발타자르가 짧게 답했다.
“생각 중입니다.”
이에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에잉. 생각할 것이 무에 있는가. 당장 내쳐 버리게.”
노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진정 그래도 되겠습니까?”
말투는 농담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서늘한 눈동자로 짐작건대 만약 아르세우스를 내치기로 결정한다면 그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걸 왜 내게 묻는가? 나야 관짝에 들어간 산송장이고 실질적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것은 자네가 아니던가.”
“…….”
“부정은 하지 않는구먼.”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리 될 것을 아시면서도 뒷 일을 떠맡기신 것은 폐하가 아니십니까.”
발타자르의 말에 노인, 레오노플 프락시온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렇긴 하지. 덕분에 노년이 제법 편했다네. 척박하기만 한 북부에 그렇게나 명소가 많을 줄 누가 알았겠나?”
“북부에서의 생활이 무척 즐거우셨나보군요.”
“왜 아니겠는가. 매일 일에 치여 살다 일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즐겁지 않을 리가 없지. 그것도 이젠 끝이지만.”
우드득- 소리와 함께 레오노플이 허리를 곧추세우기 시작했다.
허리를 구부리고 있을 때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올곧게 선 그는 일흔에 접어든 노인 답지 않게 무척이나 건장한 몸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 어떤가. 이참에 진짜 통치자가 되어보는 것은. 내 과년한 딸자식들 중에 맘에 드는 아이가 있다면 말만 하게. 내 당장 줄을 놔줄 터이니.”
“사양입니다.”
발타자르가 단호한 목소리로 답하자 레오노플이 그를 신기한 생명체를 보듯 바라보았다.
“자넨 참 신기하단 말이야. 그 정도 지위에 올랐으면 응당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게 마련인데, 자넨 그런 것에 일체 관심이 없으니 말일세.”
“송구하옵게도 사서 고생을 하는 취향은 없는지라.”
발타자르의 대답에 레오노플이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
“자, 가세. 이 정도면 다른 객들은 모두 도착했을 듯하니.”
말하며 레오노플이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뒷 모습은 무척이나 활기차 보였다.
“클클. 관짝에 들어간 줄 알았던 노인네가 떡하니 살아 있는 것을 본다면 죄다 깜짝 놀라 나자빠지겠구먼.”
바야흐로 황제의 귀환을 알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