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59화
첨탑의 꼭대기.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 두 개가 위태로이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불길이 치솟은 발타자르 가의 저택이 위치해 있었다.
“용케도 황태자를 설득했네요?”
가녀리고 청아한 음성.
여인으로 추정되는 이의 물음에 굵직한 목소리가 답했다.
“당연한 결과지. 지금 그는 무척이나 조급한 상황이니까.”
“발타자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낸 덕분에 정권 장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조급할 게 뭐가 있나요?”
여인이 사내를 바라보며 말하자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주도한 연쇄 살인사건으로 제도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흉흉한 상태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황태자는 이것을 빌미로 군권을 장악하여 중앙군은 물론 북부군까지 통제하려 들고 있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닐세. 북부의 병사들이 충성하는 것은 발타자르라네. 그건 절대적이지. 북부군의 지휘관을 몇 포섭했다고 해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그래서 칼 프란츠를 불러들인 거잖아요? 중앙군과 칼 프란츠의 병사들로 북부군을 견제하려고요.”
“그때까지 발타자르가 손 놓고 보고 있겠나?”
사내의 물음에 여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당장이야 겉보기에 황태자가 슬슬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발타자르가 방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발타자르가 작정하고 움직인다면 지금까지 짜 놓은 판이 단번에 뒤집힐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혼자 지레 겁먹고 조급해하여 권력욕이 없는 발타자르를 건드린 황태자일세. 물론 우리가 옆에서 부채질하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이참에 발타자르를 밀어내고 자신이 직접 국정을 운영할 야심을 가지고 있는 황태자가 이대로 물러날 리는 없으니……. 결국 황태자로써는 칼 프란츠가 제도에 입성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 외에는 달리 수가 없지.”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데요? 이건 완전히 발타자르를 적으로 돌리는 일인데 너무 쉽게 승낙했잖아요.”
여인의 물음과 동시에 바람이 불어왔다.
사내의 얼굴을 덮은 후드가 뒤로 날아가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창백한 인상의 사내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을 본 여인은 사내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임을 확신했다.
“제도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들이 군권을 장악하기 위한 움직임인 것을 눈치챈 발타자르는 우리의 꼬리를 잡기 위해 수하들을 투입한 상태일세.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발타자르를 어찌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의 시선을 끄는 사이 발타자르 가의 영애를 납치하는 정도는 충분하겠지.”
“그래도 제법 손실이 크겠어요. 간부의 대다수가 투입되었는데 과연 살아 돌아올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네요.”
“발타자르의 발목을 붙잡는 것치고는 싼 대가지.”
여인의 말에 사내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투입된 간부들의 목숨에 크게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일이 실패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그래도 상관없네.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시간을 끄는 것이니까. 일이 실패하면 분노한 발타자르의 검은 황태자에게로 향할 것이 분명하고 황태자는 살기 위해 발악할 테지. 그럴수록 발타자르가 추진하는 남부 원정은 늦춰질 테니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겠는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사내는 실패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황태자는 모르는 일이겠지만 사내는 정령왕의 개입까지 염두에 두어 아가레스로부터 마왕 넷을 지원받았다.
동부에 이목이 집중된 틈을 타 제도에 잠입한 그들까지 투입되었으니 제아무리 발타자르라고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자아. 어떻게 할 텐가. 발타자르.”
사내의 눈동자가 어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 * *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뿌연 먼지가 걷히고 검은 연기가 덩치를 부풀려 가기 시작했다.
발타자르는 아이린을 품에 안아 들고는 몸을 떠는 아이린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이제 괜찮단다. 내가 왔으니 무서워하지 말려무나.”
아이린이 발타자르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그 순간 검은 연기에서 촉수처럼 검은 연기 수십 줄기가 뻗어져 나왔다.
동시에 발타자르의 손에 쥔 검이 빙글 회전했다.
쏘아져 오는 촉수를 일격에 베어버리고는 검 끝을 검은 연기를 향해 겨누었다.
“네가 왜 아이를 노렸는지. 왜 본가를 침입했는지에 대해 추궁할 생각이었다만…….”
분노로 일렁이던 발타자르의 황금빛 두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되었다. 묻지 않겠다.”
팟-
순간 꺼지듯 발타자르의 신형이 사라졌다.
잔상조차 남기지 않은 채 발타자르의 신형이 사라지자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촉수를 쏘아 보냈다.
콰앙-
기둥과 벽면이 촉수에 꿰뚫리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건물의 잔해를 직격으로 맞았음에도 검은 연기의 괴인은 아무런 피해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 존재했다.
“어디냐.”
괴인이 다시 한번 사방으로 촉수를 쏘아 보냈다.
뿌연 먼지를 뚫고 뻗어 나간 촉수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괴인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팟-
순간 괴인의 등 뒤로 발타자르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괴인이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검이 휘둘러졌다. 일격에 괴인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반으로 갈라진 괴인의 몸이 순식간에 재생되며 원상태로 돌아갔다.
마치 불사신과도 같은 모습에도 발타자르는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고작 그런 검으로 이 몸을 베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다시 한번 촉수가 뻗어져 나왔다.
발타자르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공격을 피해내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더냐!”
촉수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물결치며 허공으로 도약한 발타자르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것을 베어내기 위해 발타자르가 마나를 움직여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하였으나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수작질을 부려 놓았군.’
멀리서 느껴지는 마기들로 짐작하건대 최소 둘 이상의 마왕이 방해 마법진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될 테니까.
발타자르는 쫓아오는 촉수를 바라보며 검을 휘둘러 단박에 베어내었다.
그러나 베어진 절단면에서 다시 촉수가 돋아나며 다시 한번 쏘아져 나갔다.
“말했을 텐데. 고작 그런 검으로는 이 몸을 벨 수 없다고!”
촉수가 더욱더 늘어나며 발타자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발타자르를 노리고 쏘아지는 촉수에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 그대로 당하겠다 싶은 그때.
검신을 타고 새하얀 기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것은 검의 형상을 취하며 검을 뒤덮었다.
백광이 번쩍이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을 내뿜는 검이 휘둘러졌다. 순식간에 촉수들이 흩어지듯 사라지기 시작했고 거침없이 괴인을 향해 뻗어 나갔다.
괴인은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급히 피하려고 하였으나 그보다 다가오는 검이 더 빨랐다.
“죽어라.”
발타자르의 사형 선고가 떨어지고.
몰아치는 섬광이 괴인의 신형을 뒤덮었다.
“꺼억-”
괴인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더니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동시에 괴인의 몸을 감싸던 검은 연기가 흩어져 사라지고 괴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얼굴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흉측한 몰골의 사내가 가슴이 길게 베인 채 대지를 검은 피로 적셨다.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하는 시체.
‘마왕까지 동원했다라…….’
제도 한복판에 마왕이 습격을 자행했다.
그 말인즉 이번 사태가 생각보다 큰일이라는 뜻이었다.
‘목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아이를 건드린 이상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잠시 괴인의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발타자르는 이내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고는 품에서 떨고 있는 아이린을 가볍게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괜찮으니 울지 말 거라.”
“어엉…… 오라버니…….”
“그래. 오라버니 여기 있단다.”
“무서웠어요. 어엉…….”
무척이나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린의 등을 토닥이는 발타자르의 감각에 강렬한 마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방해 마법진을 유지하던 놈들이 분명했다.
‘둘인 줄 알았더니. 셋이로군.’
하나도 아니고 무려 넷이나 되는 마왕이 제도에 잠입했다.
이것은 내부의 동조자가 존재하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범인은 뻔했다.
‘황태자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군.’
그가 무슨 이유로 어떤 사정으로 이런 결정을 한 것인지는 관심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에게 검을 들이민 것으로도 모자라 아이린까지 노렸다는 점이었다.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서늘한 눈빛과는 달리 한없이 부드러운 손짓으로 아이린의 등을 어루만지길 얼마간.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진정이 되었는지 떨림이 멎었다.
발타자르는 품에서 아이린을 내려놓았다.
품에서 내려놓을 때 떨어지지 않으려 아이린이 ‘이잉’ 하고 투정을 부리기는 했지만 결국 발타자르의 품에서 떨어졌다.
“오라버니 보려무나.”
발타자르의 부름에 아이린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울어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코에는 콧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동자를 보며 발타자르는 이런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아이린이 무척이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발타자르가 옷소매로 엉망이 된 아이린의 얼굴을 닦아준 후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좀 진정 되었느냐?”
그 자상한 물음에 아이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발타자르의 옷소매를 꼭 쥐고서 놓지 않았다.
발타자르가 곤란하다는 듯 아이린의 손을 바라보았다.
“히끅…… 같이. 히끅…… 있으면. 안 돼요?”
발타자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이린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아직 울음기가 남아 있는지 딸꾹질을 하며 말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왕과의 전투가 벌어질 곳에 아이린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발타자르라고 해도 마왕 셋을 상대로 아이린을 지키며 싸울 자신은 없었다.
“금방 다녀올 테니 비비안과 넵튠을 불러 함께 기다리고 있으려무나.”
방해 마법도 사라졌을 테니 그편이 더 안전했다.
하지만 아이린은 발타자르의 곁에서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같이 있을래요.”
아이린이 투정을 부렸다.
처음으로 고집을 피우는 아이린의 모습에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발타자르였지만 이번만큼은 그 고집을 들어줄 수 없었다.
“위험한 곳에 널 데려갈 순 없으니, 그건 들어줄 수 없겠구나.”
다시 두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는 아이린을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작은 한숨과 함께 엄지로 아이린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오늘따라 눈물이 많구나.”
“그치만 너무 무서워요.”
겁에 질려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어릴 적의 발타자르 자신과 겹쳐 보였다.
조금 상황이 다르기는 했지만 어릴 적 귀신이 무서워 우는 발타자르에게 그의 어머니가 종종 해주던 것이 있었다.
그것을 떠올린 발타자르가 아이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주문을 걸어주마.”
흥미가 동한 듯 아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주문이요?”
“그래, 어머니께서 생전 내게 종종 걸어주시던 주문이지.”
“엄마가요?”
“그렇단다.”
이제는 흐릿해져 가는 어머니와의 추억 가운데 발타자르가 또렷이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추억 중 하나였다.
“무슨 주문인데요?”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용기가 나게 하는 주문이란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요.”
아이린이 결의에 찬 표정을 짓자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살며시 손을 뻗어 아이린의 앞머리를 올렸다. 그러자 반들반들한 아이린의 고운 이마가 드러났다.
쪽-
“착하게 기다리고 있거라. 금방 다녀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