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58화
피잉-
파공음과 함께 한발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쏘아져 나갔다.
나무둥치 아래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던 사슴은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가 꿰뚫리며 즉사했다.
짝짝짝-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제법 떨어진 곳에 있던 새들이 깜짝 놀라 날아오를 정도였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대공 전하의 궁술은 역시 천하제일이시옵니다!”
“궁술뿐이겠는가? 검술도 잘하신다네!”
남부의 늑대.
제국 유일의 대공.
레온하르트 칼 프란츠의 가신들이 그의 눈에 띄기 위해 앞다투어 나서며 저마다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그를 둘러싼 인의 장벽 속에서 칼 프란츠를 칭송하는 목소리는 드높아져만 갔다.
그때였다.
인파 사이로 외눈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빈틈없이 빽빽이 늘어선 이들을 거침없이 밀어내며 등장한 사내, 레이크 서머셋은 이내 칼 프란츠에게 서신 한 통을 내밀었다.
“대공 전하. 제도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발타자르인가?”
“아니옵니다.”
칼 프란츠의 물음에 레이크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어 보이자 칼 프란츠가 다시 한번 물었다.
“또 그 반천회라는 곳에서 보낸 것이더냐?”
반천회는 얼마 전부터 칼 프란츠와 접촉을 시도하는 조직이었다.
황태자의 지지를 등에 업은 그들은 칼 프란츠에게 함께 손을 잡고 발타자르를 견제하자 제안하였었다.
그러나 칼 프란츠로서는 아무리 조사를 해보아도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칼 프란츠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결정을 보류한 상태였다.
그것이 몇 달 전이었으니 슬슬 다시 접촉해 올 시기가 된 듯하여 물은 것이었으나 이번에도 칼 프란츠의 짐작은 틀렸다.
“아니옵니다.”
“그럼 누구인가?”
“아르세우스 황태자이옵니다.”
레이크의 입에서 예상 밖의 인물이 튀어나오자 칼 프란츠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서찰을 펼쳐보았다.
“흠…….”
빠르게 내용을 훑어본 칼 프란츠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겨났다.
“무슨 내용입니까?”
“우리 조카님께서 상황이 무척이나 다급하신 모양일세.”
“그게 무슨……?”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레이크에게 칼 프란츠가 서신을 돌려주며 말했다.
“군을 이끌고 제도로 향해달라는군.”
아르세우스가 보낸 서신.
거기에는 딱 두 문장이 쓰여 있었다.
제도 입성.
공작 견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뿐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으나 아르세우스가 발타자르를 견제하기로 굳게 결심한 듯하네.”
칼 프란츠의 말에 대륙 5대 상단 중 하나인 검은 태양 상단의 주인 오슬란 메멘토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함정은 아닐런지요?”
충분히 합당한 의심이기는 했다.
칼 프란츠를 불러들이는 것은 호랑이를 내쫓겠다고 늑대의 등에 올라타는 것과 같았으니까.
언제 늑대가 변심하여 자신을 집어삼킬지 모를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글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만.”
현재 제도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험악했다.
주도적으로 제국을 운영하려는 황태자는 그것에 방해되는 발타자르를 밀어내려 하고 있고 발타자르는 그런 황태자를 길들이려 하고 있었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혼란이 찾아왔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 황태자. 그리고 칼 프란츠 대공과 지방으로 도망친 황위 계승권자들을 끌어들여 제국 전체에 흉흉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발타자르의 움직임이 그 증거였다.
“황태자는 나를 이용해 발타자르를 견제하며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심산일 걸세. 어지간히도 만만하게 보였나 보군.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를 이용해먹을 궁리만 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말투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나로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말이야.”
칼 프란츠의 두 눈동자에 강렬한 열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챈 레이크가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면.”
“아아. 그토록 기다려온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군을 준비시키게. 제도로 향한다.”
이날.
칼 프란츠 대공가의 10만 대군이 제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 * *
중앙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인범은 그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범행 장소를 제도 인근의 숲에서 제도의 골목으로 변경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골목길에서 시체가 발견되기 시작하니 분위기가 흉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국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인해 골치가 아프던 차에 제도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까지 겹치자 중앙의 관료들은 골머리를 앓으며 살인범의 색출에 전념했다.
한데 놈이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제도를 이 잡듯이 뒤졌음에도 이렇다 할 증거 하나 나오지 않았다.
“……라는 건 표면적인 상황이고. 실제는 황태자가 부리는 수족들이 은연중에 방해 공작을 펼치고 있더라고요. 돌아가는 꼴을 보니 한동안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길 원하는 것 같아요.”
말을 끝마친 신시아가 사과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볼록해진 양 볼을 씰룩거리며 사과를 먹는 신시아를 바라보며 발타자르는 생각에 잠겼다.
황태자가 살인범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제도 안팎으로 흉흉한 분위기가 이어지도록 조치한 뒤 그것을 명분 삼아 군권을 장악하려는 속셈이겠지.
저택에서 칩거를 시작한 이후 남부 원정군의 편성 외에는 국정에서 손을 떼어버린 발타자르에게는 이를 제지할 명분이 없었다.
‘황태자치고는 제법 괜찮은 꾀를 내었군.’
뭐. 그렇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현재 제도에 주둔 중인 군은 북부군이 7만, 중앙군이 5만이었다.
본래는 중앙군을 제외한 다른 군은 제도에 주둔할 수 없지만, 발타자르의 지위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따라서 황태자가 군권을 장악한다 한들 발타자르에게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보다 살인범 색출에 성과는 있는가?”
“아직요. 트리스탄 경 덕분에 꼬리는 잡았는데 아무래도 황태자 파벌의 방해가 심해서 조금 시간이 걸리네요. 아! 그래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방해하는 녀석들을 몇 잡아서 심문 중이니까 금방 정보를 토해낼 거예요.”
신시아의 말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저택 곳곳에 피워 놓은 횃불과 경비를 서는 기사들을 제외한다면 적막이 가득했다.
그렇게 저택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담장 너머로 무언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감각에는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잘못 보았나 싶었다.
“그럴 리가 없지.”
은신술이 제법 경지에 오른 듯 어둠 속에 스며들어 얼핏 본다면 발견하기 쉽지 않았지만, 횃불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잠깐씩 보이는 무구의 반짝임에 놈들의 위치를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놈들의 침입을 눈치챈 기사들도 재빨리 놈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신시아.”
상황이 심상찮음을 눈치챈 신시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에게 발타자르는 호위 인원을 차출하여 아이린에게 보내도록 지시한 후 침입자들의 뒤를 쫓았다.
* * *
펑-
거친 폭음이 울려 퍼지고 담벼락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불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고 비명과 고함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침입자 몇이 들어온 문제가 아니었다.
기습이었다.
그것도 발타자르 가家를 상대로 말이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택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붉은 기운을 내뿜는 여인.
“심장 포식자…….”
그러나 녀석만이 아니었다.
회귀 전 용사들 사이에서도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더러 보였다.
“저놈들이 다 배신자였단 말이지.”
발타자르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습격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감히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 일을 벌였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붉은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침과 동시에 발타자르의 신형이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 * *
창가에 턱을 괴고 창문 너머의 정원을 바라보던 아이린은 문득 주변이 소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환해진다 싶더니 불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 창문을 닫고 뒤돌아서는데 눈앞에 사람의 형상을 한 검은 연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꺄악!”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내 검은 연기가 가시처럼 삐죽 솟아올랐고, 아이린의 호위를 맡고 있던 엘룬 자매는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단박에 가슴을 꿰뚫린 채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고이기 시작하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아이린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그때, 무척이나 탁한 노인의 목소리가 검은 연기 사이로 새어 나왔다.
아이린은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순간. 아이린의 앞에서 뽀글뽀글 기포가 생겨나더니 비비안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감히! 린을!”
단숨에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검은 연기를 향해 물의 창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검은 연기에 닿음과 동시에 물의 창들은 소멸했고 이어 검은 연기가 비비안을 집어삼켰다.
“비비안!”
아이린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서둘러 정령들을 소환하려 했지만 도무지 마나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 오라버니…….”
아이린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벽에 등이 맞닿았다.
그녀의 작은 몸이 두려움에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검은 연기는 아이린의 주변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두려움에 아이린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애타게 발타자르를 불렀지만 당연하게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검은 연기에서 손의 형상이 불쑥 솟아나며 아이린의 앞으로 뻗어져 나갔다.
“아이야. 얌전히 날 따라간다면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으마.”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이린이 실눈을 뜨며 앞을 바라보았다.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손이 금방이라도 아이린의 몸을 잡아챌 듯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이에 아이린이 재차 눈을 감고는 발타자르를 불렀다.
“도와주세요…… 오라버니. 무서워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극심한 두려움에 머릿속이 새하얘진 아이린은 한시라도 빨리 발타자르를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아이린에게 검은 연기가 재차 말했다.
“자. 내 손을 잡거라. 어서.”
뻗어진 손이 흩어지더니 검은 연기가 아이린의 머리를 휘감기 시작했다.
순간 눈물로 범벅이 된 아이린의 두 눈동자가 치켜 떠지더니 점점 탁해지기 시작했다.
“옳지. 자. 가자꾸나.”
무언가에 홀린 듯 아이린이 터벅터벅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검은 연기를 따라 무너진 벽을 넘어 건물 밖으로 나서려던 순간.
콰앙-
붉은 섬광이 번뜩인다 싶더니 이내 검은 연기가 반으로 갈라졌다.
“감히…….”
먼지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가 사나운 기색으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