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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156화 (156/183)

공작이 회귀함 156화

은퇴를 선언한 이후 발타자르는 표면적으로는 남부 원정군의 편성을 제외한 모든 일에서 손을 놓아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당장에라도 은퇴할 것만 같은 모습인지라 일각에선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귀족들 대부분은 발타자르가 이렇게 쉽게 권력을 포기할 리가 없다며 분명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며 그가 다시 움직일 때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동시에 제국 각지에서는 불온한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은거하던 황위 계승권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세력을 추스르기 시작하였으며, 발타자르에 의해 제국으로 전향한 이종족들이 서부의 땅 일부를 점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칼 프란츠 대공의 군사적 움직임에 비하면 약과였다. 그들은 점령한 동부의 영지를 안정화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대규모 군사이동을 실시했는데 진군 경로가 동부가 아닌 중앙을 향해 있었다.

이렇듯 중앙에서는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들이 연달아 발생하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고, 일각에선 발타자르가 은퇴를 결심한 것이 아르세우스 때문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발타자르가 은퇴를 선언한 지 고작 2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발타자르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 *

“어르신.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생각에 잠겨 있던 노인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드높은 담벼락에는 포효하는 황금빛 용이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며 이곳이 발타자르 가문의 저택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노인, 슈텔리앙 후작은 심경이 복잡했다.

그가 판단하기로 발타자르가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것은 아르세우스가 발타자르를 견제하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전승식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남부 원정에 관련된 일을 제외한 모든 것에서 손을 놓아버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발타자르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였다.

‘길들이기인가…….’

아르세우스에게 직접 손을 쓰지 않으면서 그가 스스로 굽히고 들어오게 만들려는 것이 분명했다.

슈텔리앙 후작은 이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발타자르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 것을 종용해 보았으나, 아르세우스는 발타자르가 놓아버린 실권을 흡수한 이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각지의 혼란과 국정 마비.

전자는 발타자르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국정 마비만큼은 예상 밖의 사태였다.

황태자 파벌의 구성원 대다수가 중앙의 귀족들이니만큼 중앙에 대한 지배력만큼은 확고하리라 생각했던 게 틀렸던 것이다.

그동안 발타자르가 국정 운영을 주도하면서 은연중 그에게 의지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것을 간과한 탓이 컸다.

또한,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아르세우스의 자리가 굳건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지 기반을 제대로 다지기도 전에 일을 벌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겠지.’

아르세우스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동안 발타자르가 권력에 욕심을 내비치지 않는 모습에 그것만 믿고선 아르세우스가 일을 벌이고 있음에도 응원하고 내버려 둔 자신의 잘못 또한 컸다.

그렇기에 발타자르의 저택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와 직접 만나 담판을 짓기 위해서.

물론 이것은 아르세우스와 이야기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전하께옵선 발타자르 공작과 결별하기로 마음을 굳히신 것 같지만…….’

그것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견제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추후 제국을 다스릴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와 결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것은 배신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세우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이자 제국 최고의 권력자인 발타자르를 말이다.

‘대체 어떤 녀석들이 아르세우스 전하에게 붙은 것인지는 몰라도 최악의 상황만큼은 막아야 한다.’

발타자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황태자의 자리를 박탈시키고 다른 이를 새로운 황태자로 추대할 수 있음에도 아르세우스는 함께 일을 도모하는 이들을 맹신하며 사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모든 일이 너무 순탄하게 풀리기에 슬슬 물러날 때라고 여긴 것이 실책이었던가.

짙은 후회가 담긴 한숨을 내쉬며 슈텔리앙 후작이 마차에서 내렸다.

* * *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은데…….’

현재 극도로 불안한 제국의 정세는 모두 발타자르가 의도한 것이었다.

이종족의 경우는 발타자르가 미리 지정해 준 땅에 자치구를 건설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고 칼 프란츠 대공의 움직임은 사전에 말을 맞춰둔 것이었다.

또한, 황위 계승권자들이나 중앙의 불안감의 경우 앞선 두 일과 발타자르의 은퇴 소식이 맞물려 발생한 것이었고 말이다.

이는 황태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들이었고 따라서 아르세우스에게 붙은 배신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똑똑-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슈텔리앙 후작 각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슈텔리앙 후작의 행동이 딱 그러했다.

“들라 하게.”

발타자르의 허락이 떨어지자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슈텔리앙 후작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그러게 말이오. 자자 앉으시오.”

발타자르가 자리를 권하자 슈텔리앙 후작이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 어쩐 일로 연락도 없이 찾아오셨소?”

그 물음에 슈텔리앙 후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작 각하께서 서론을 싫어하시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은퇴를 선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라…… 후작 그대도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역시 예상대로였다.

발타자르는 황태자의 움직임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행동은 딱 하나였다.

“제가 어찌하면 마음을 돌리시겠습니까?”

슈텔리앙 후작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찻잔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네. 은퇴는 일전에 말했듯이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고 황태자의 일을 빌미로 공표하는 시기를 앞당긴 것뿐이니 말일세.”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발타자르의 결심이 굳건한 듯 보였다.

이것은 결코, 좋지 않은 징조였다.

만약 발타자르가 참지 않고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다시 한번 제도에 피바람이 몰아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용무가 끝난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게.”

발타자르의 축객령에도 슈텔리앙 후작은 떠나지 않고 망부석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할 이야기가 더 남았는가?”

말하며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슈텔리앙 후작이 감았던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생각을 조금 해보았습니다. 원하신다면 당장에라도 아르세우스 전하를 제치고 다른 이를 황태자의 자리에 올릴 수 있는 분께서 어찌하여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시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계속해 보게.”

다시 자리에 앉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그가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 것을 깨닫곤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아르세우스 전하를 길들이시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권력에 크게 욕심이 없으신 공작 각하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굳이 이러실 것 없이 마왕의 토벌이 마무리되는 직후 아르세우스 전하께 권력을 양도하시고 북부에서 여생을 보내셨겠지요. 각하의 입장에서는 아르세우스 전하와 정치 싸움을 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니까요. 하여 제 가설은 이렇습니다. 각하께서 노리시는 것은 아르세우스 전하가 아닌 다른 인물 혹은 인물들이라고. 그들을 꿰어내기 위해 일을 벌이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전 대신들을 상대로 황실을 지켜오던 노신다운 냉철한 안목이었다.

그는 발타자르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쉽지요. 최근 아르세우스 전하와 일을 꾸미고 있는 이들. 그들이 공작 각하의 표적이 아니겠습니까?”

말을 끝낸 슈텔리앙 후작이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지그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사실 황태자가 날 견제하려는 일 정도는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이었다네. 물론 거기서 한 발 더 나갔다면 쳐냈겠지만.”

그 말에 슈텔리앙 후작은 속으로 안도했다.

역시. 오늘 그를 찾아온 것은 백 번을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만약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하며 아르세우스를 내버려 두었다면…그 뒤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한데 최근 내 가신 중 일부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황태자에게 접근했다는 보고를 받았네. 배신을 하려는 것인가 싶어 뒤를 캐보니 재밌는 것이 발견되더군. 황위 계승권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지방의 중소 귀족들. 그리고 용사들 사이에서 배신자라 불리는 집단까지.”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 발타자르는 제국을 무대로 거대한 폭풍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에 미리 대비하지 못하거나 잘못 대응한다면 앞으로 몰아칠 폭풍우에 집터 하나 남기지 못하고 휩쓸려 버릴 것이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따로 시간을 내어 쓸어버릴 참이었는데 잘 되었지 뭔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후작은 생각했다.

이 길로 곧장 황궁으로 향해 아르세우스를 말리기로.

머리채를 쥐어 잡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슈텔리앙 후작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묻자 발타자르가 그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까지 그랬듯 아무것도 하지 말게. 이 길로 황태자에게 달려가 말릴 생각은 하지도 말란 뜻이네.”

속내를 꿰뚫어 보는 눈빛에 슈텔리앙 후작이 몸을 흠칫 떨었다.

“설마…… 전하를 밀어내실 생각이십니까?”

두려움에 떠는 슈텔리앙 후작의 모습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지금 그 자리를 쭉 유지할 수 있을 테니.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 제국은 프락시온 황실이 통치할 것일세.”

* * *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

타오르는 횃불만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가운데 환한 빛무리가 일어나며 형형색색의 망토를 두른 인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등장한 인물의 숫자가 총 열하나.

그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꼭 이런 곳에서 모여야 하는 거야? 우리가 무슨 범죄자들도 아니고. 굳이 이런 곳이 아니라 괜찮은 곳에서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면 좋잖아.”

붉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이 투덜거리자 녹색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어쩌겠나. 회주가 이곳을 고집하는 것을.”

“끄응…….”

회주가 거론되자 붉은 로브를 쓴 인물은 입을 꾹 다물며 신음성을 내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불평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슬슬 양지에 모습을 드러내도 될 것 같지 않아요? 발타자르가 뜬금없이 은퇴다 뭐다 하면서 한창 헛짓하고 있잖아요.”

분홍빛 로브의 여성이 화제를 꺼내자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발타자르니까.”

“에이. 요즘 하는 걸 보면 맛이 갔던데 뭘.”

“대장 놀이하기도 지쳤나 보지, 뭐. 덕분에 우리야 양지로 나갈 기회가 생겼으니 난 계속 저렇게 있어줬으면 좋겠는걸. 사냥개 놈들에게 쫓기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그렇게 한창 발타자르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들은 가장 상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자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빛이 사라지자 검은 흑발에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잠시 주변을 슥 하고 훑어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모두 모인 것 같군.”

말하며 사내가 목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펜던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펜던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펜던트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더니 이내 검은 뱀의 형상을 만들어내곤 사라졌다.

“지금부터 반천회反天會의 총회의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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