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55화
남부 메디치 가家.
서부 토벌전을 마무리 짓고 본가로 복귀한 조반니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보르네오의 파벌을 견제하는 일로 정신이 없던 조반니가 직접 마중을 나갈 정도의 귀중한 손님이.
“공작 각하.”
조반니가 예의를 갖춰 눈앞의 사내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사내는 조반니를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어 보이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집주인의 양해도 구하지 않는 그 태도에 인상을 찌푸릴 법도 하건만 조반니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만이 맴돌았다.
이것은 조반니의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사내가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는 이였기 때문이었다.
“이 밤중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오신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조반니의 물음에 사내, 발타자르가 그를 빤히 응시하더니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어 그의 발치 앞으로 툭 내던졌다.
이에 조반니가 그것을 집어 들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발타자르가 말했다.
“펼쳐보게.”
발타자르의 말에 조반니가 순순히 서찰을 펼쳐 들고 그것을 훑어본 순간. 조반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크게 기함했다.
“이, 이건!”
서찰에 빼곡히 적힌 글자들.
보르네오가 마왕과 손을 잡았다는 정황과 증거들이었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였다.
메디치 가의 몰락.
“여기에 적힌 것이 사실입니까?”
조반니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이 작은 서찰 하나만으로 제국의 역사를 함께해온 메디치 가문이 한순간에 몰락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고 또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조작된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조반니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도 의심 가는 정황들이 여럿 떠오른 탓이었다.
조반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리해지더니 손을 덜덜 떨었다.
‘설마 발타자르 공작이 본가를 치려는 것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발타자르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직접 찾아올 것도 없이 대규모 병력이 편성되어 메디치 가로 향하고 있었겠지.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었다.
발타자르가 메디치 가에.
아니, 조반니 자신에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선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선결 과제였다.
이 일에 대해 보르네오를 문책하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직접 찾아오셔서 이것을 보여주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발타자르가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조반니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발타자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 달의 말미를 주지. 그 기간 내에 보르네오를 처리하고 제도로 상경하게. 그리하면 메디치의 명맥은 유지시켜 주겠네.”
발타자르의 말에 조반니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은 조반니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반길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정적인 약점을 잡고도 원하는 것이 고작 이런 것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올 말이 바로 본론이겠지.
“그다음에는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제도에 상경한 이후. 정식으로 공작 위에 오르게. 단, 제도의 신민들이 보는 앞에서 충성 서약을 하게.”
“……황태자에게 말입니까?”
조반니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공작 각하께……?”
이번에도 역시 발타자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조반니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면 대체 누구에게 충성 서약을 하라는 것입니까?”
“그건 그때가 되면 알려주겠네.”
황태자도 그렇다고 발타자르도 아니라면 대체 누구에게 충성하라는 말인가?
그의 말에 대한 의미를 알아내려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짐작 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조반니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야 어렵지 않사옵니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말하게.”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지금 제 파벌의 힘만으로는 한 달 내로 보르네오의 파벌을 몰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명분이 있다고 해도 보르네오를 지지하는 순혈주의자들이 쉬이 마음을 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반니의 말에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떠나가려 하자 조반니가 황급히 그를 불렀다.
“공작 각하?”
이에 발타자르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그것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지금쯤 도착했을 테니.”
“무엇이 말입니까?”
조반니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남긴 말은 딱 한마디였다.
“북부의 사냥개들.”
보르네오를 지지하는 대영주 중 하나인 스포르차 후작가가 트리스탄이 이끄는 삼만의 기병에 의해 불타올랐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삼 일 뒤의 일이었다.
* * *
바르바토스가 본격적으로 전선에 참여함으로써 블랙비어드 후작과 그 주력들이 한순간에 쓸려나갔다.
그러자 전황은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빠르게 진행되더니 이제는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물론 블랙비어드 후작의 잔당들이 동부 곳곳에 저항 활동을 벌이고 있는 데다 크림슨 군도로 도망친 하이레딘 백작이 큰 위협으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기울대로 기운 전황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동부의 일이 끝나갈 무렵 제도에서는 발타자르의 은퇴 소식으로 정국이 크게 격동하고 있었다.
* * *
“이걸로 벌써 스무 명째이군요.”
창문 너머로 저택을 떠나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가웨인이 중얼거렸다.
동부에서 발타자르가 돌아온 이후 북부의 귀족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발타자르를 찾아왔다. 근래에 퍼진 그의 은퇴 소식에 대한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들의 입장에서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꼴이니 말일세.”
찻잔에 남은 차를 홀짝이며 발타자르가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가웨인이 그를 바라보는데 그의 맞은편에서 고개를 까딱거리며 졸고 있는 트리스탄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전투를 치르고 온 이답지 않게 한껏 늘어진 모습이었다.
“트리스탄 경은 장군의 은퇴를 크게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말하며 가웨인의 그녀의 옆에 앉자 덕분에 잠에서 깬 그녀가 입가에 묻은 침을 슥- 하고 닦아내고는 배시시 웃었다.
“아, 뭐. 대장이 은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요.”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요?”
가웨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나 대장을 따르는 바이칸들은 다 그럴걸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잖아요. 황제의 자리 말고는 더 오를 데가 없는. 귀족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대장이에요. 그런 대장이 은퇴한다고 해서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어요? 물론 처음에야 대장의 뜻에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말리는 사람이 있기야 하겠지만 대다수는 그냥 지켜보기만 하겠죠. 욕심스러운 사람들은 기뻐할 테고요.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에는 어떨까요?”
말하며 트리스탄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나 눈매는 웃음기 한 점 없는 것이 그녀가 전투를 앞두었을 때 버릇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힘 있는 자들은 대장이 손 놓아버린 권력을 차지하려고 서로 아우성일 거고 그 와중에 힘없는 자들은 가진 것을 빼앗기게 되겠죠. 그렇게 빼앗긴 자들은 자신을 도와줄 이를 찾게 될 테고, 당연하게도 은퇴한 대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겠죠. 그럼 자연스레 대장의 은퇴 후에 권력을 쥐게 된 사람들은 생각하겠죠.”
가웨인은 그녀가 발타자르의 은퇴 소식에서 피 냄새를 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살기 띤 눈을 할 리가 없었다.
“아! 혹시나 대장이 마음을 달리 먹어 다시 권력을 손에 쥐려 한다면 어쩌지? 하고 말이에요. 그 뒤는 뻔하죠. 대장을 이용하려는 이들, 대장을 영원히 은퇴시키려는 이들 등등. 온갖 것들이 대장에게 들러붙을 거예요. 당연히 분쟁이 많아질 것이고 그에 따라 전투도 많아지겠죠. 그러니 저나 바이칸들은 상관없다는 얘기에요.”
트리스탄의 말이 끝나자 가웨인은 아차 싶었다.
그녀도 이리 쉽게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을 왜 자신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녀의 말대로였다.
발타자르가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한들 그게 말처럼 쉽게 진행될 일은 아니었다. 또한, 은퇴한다고 해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도 없었다.
발타자르의 은퇴 이후 권력을 쥐게 될 자들은 발타자르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테고,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하는 이들은 어떻게든 발타자르의 도움을 얻어 권력자가 되고자 할 것이었다.
그것을 몰랐을 리도 없을 터인데 발타자르는 공식 석상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측근들에게조차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서.
순간 가웨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가웨인이 번쩍 고개를 들어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대국을 보는 안목은 자네보다 트리스탄이 더 낫군그래.”
피식 웃으며 트리스탄을 바라보고 있는 발타자르의 눈동자가 몹시도 차가웠다.
* * *
그날 밤.
신시아가 발타자르를 찾아왔다.
일의 진행에 대해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따로 서류는 준비하지 않았다.
아직은 심증만 있을 뿐 실질적인 정황이나 물증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의 조언 덕분에 꼬리는 잡았어요. 다만 워낙 철두철미하게 대비한 터라 머리는커녕 몸의 일부에도 닿지 못했지만 며칠만 더 시간을 주시면 동조자를 찾아낼 수 있을 듯해요.”
신시아의 보고에 발타자르가 담배를 태우며 말했다.
“그 건은 주모자를 찾아낼 때까지 따로 보고하지 않아도 좋네. 하지만 그 일과 관련된 이들은 확실하게 선별해 내야 할 걸세.”
발타자르의 지시에 신시아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표정을 풀고는 발타자르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보다…… 은퇴를 하신다던데. 사실인가요?”
신시아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물었다.
“왜. 그렇다면 날 떠날 텐가?”
그 물음에 신시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생명의 은인을 배신할 정도로 막돼먹지는 않았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발타자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순간 신시아가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왜요? 혹시 제가 떠날까 봐 걱정되셨어요?”
“그럴 리가. 은퇴 건으로 정신없는 마당에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네.”
단호한 대답에 기분이 상할 만도 하건만 신시아는 무엇이 그리 기분 좋은지 들뜬 기색으로 발타자르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대었다.
“에이. 맘에도 없는 말 하시기는.”
“간지럽네.”
발타자르가 냉정하게 신시아의 손을 쳐내며 말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장난은 끊이지 않았다. 발타자르는 결국 그녀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내버려 두어야 했다.
그러자 한참 장난을 치던 신시아는 반응 없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흥미를 잃었는지 창밖을 바라보더니 시간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곤 집무실을 나서기 위해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열기 직전.
딱 한마디를 남겼다.
“아! 그리고 거짓말을 좀 크게 치셨던데. 이러다 나중에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히시는 건 아니에요?”
그 말에 발타자르가 그녀를 짧게 쏘아보자 그녀가 화들짝 놀란 몸짓을 하더니 이내 도망치듯 집무실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