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54화
“뭐야? 또?”
이른 아침.
실로 오래간만에 에르제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생각으로 들떠 있던 레티시아는 갑작스러운 발타자르의 호출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서부에서 그렇게 부려먹었으면 충분하잖아.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당분간은 좀 내버려 둬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투덜거리며 아그라베인을 흘겨보자 그가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부름에 불응하셨다고 전할까요?”
아그라베인의 물음에 레티시아가 잠시 몸을 흠칫거렸다.
만약 발타자르의 부름을 거부했다가 혹시 무슨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진 탓이었다.
“그건 아니고…….”
“그럼 가시는 겁니까?”
“…….”
레티시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에 답답할 만도 하건만 아그라베인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그녀의 대답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녀에게 발타자르 가로 올 것을 전하고 답을 받아오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지시도 내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그라베인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자 되려 답답해진 것은 레티시아였다. 그리고 본래 답답한 사람이 먼저 행동하는 법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부르는 거냔 거지.”
“글쎄요. 저도 정확한 것은 잘 모릅니다만. 동부에서 처리할 일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아그라베인의 대답에 레티시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동부?”
현재 동부는 프리드리히 공작가의 내전으로 극도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뭐, 돌아가는 상황으로 볼 때 프리드리히 공작가의 승리로 끝이 나겠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 전쟁 중이라는 점이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전장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거절하고 싶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그 후환이 두려웠던지라 부름에 응하기로 결정했다.
‘동부에 병력을 파견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잠시 볼일만 보고 돌아오겠지, 뭐.’
어차피 가기로 결정한 것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그녀가 아그라베인을 바라보았다.
“먼저 간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아그라베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불의 마탑을 대표하시는 분이 너무 방정맞군. 역시 지위가 높다고 다 우리 각하 같은 건 아니로군.”
늘 그렇듯 끝은 발타자르에 대한 찬양으로 끝나는 아그라베인이었다.
* * *
동부 블랙비어드 후작령.
“각하. 하이레딘 백작의 함대가 대패하였다고 하옵니다.”
프레시모 자작의 보고에 블랙비어드 후작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칼 프란츠 대공가와 프리드리히 공작가, 그리고 바르바토스까지.
하나같이 강력한 군세를 보유한 그들을 상대로 반란군이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하이레딘 백작이 이끄는 함대가 해상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번에 하이레딘 백작의 함대가 대패함으로써 해상의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었으니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백작은? 그는 어찌 되었다더냐?”
“천운으로 목숨만은 건져 크림슨 군도로 몸을 피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블랙비어드 후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림슨 군도는 전대 프리드리히 공작이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하기 전까지 해적 시대의 주 무대로 활약했던 곳이었다.
사시사철 짙은 해무로 뒤덮여 있는 데다, 물살이 거세고 곳곳에 암초가 산재해 있어 인근의 물길을 꿰고 있는 길잡이가 없다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난공불락 요새였다.
또한, 지금쯤이면 반란을 위해 준비하던 함선들이 대다수 완성될 시기이니 하이레딘 백작이 크림슨 군도까지만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면 빼앗긴 해상권을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었다.
“문제는 하이레딘 백작이 함대를 해상권을 탈환할 때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느냐이겠군.”
후작이 전술 지도를 바라보았다.
칼 프란츠 대공가 측이 동남부 방면을 점령한 이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기에 현재 유일한 전장은 바르바토스의 군대와 대치 중인 동북부뿐이었다.
여기에 곧 몰려올 프리드리히 공작가의 병력까지 생각한다면 두 개 전선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좋지 않군. 좋지 않아.”
그나마 다행인 점은 칼 프란츠 대공 측의 경우 점령한 영지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과 중앙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점이었다.
“제도로 보낸 이들은 어찌하고 있다더냐?”
블랙비어드 후작의 물음에 프레시모 자작이 어두운 낯빛으로 답했다.
“그것이…… 별다른 진척이 없다고 합니다. 발타자르 공작이야 귀족가의 접촉을 일체 차단하기로 유명한 데다 황태자는 업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접견을 미루고 있습니다. 그나마 슈텔리앙 후작과 선이 닿아 최대한 물고 늘어져 보았습니다만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프레시모 자작의 말에 가슴이 답답해진 블랙비어드 후작이 담배를 태웠다.
처음 반란을 계획할 때만 하더라도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러나 막상 거사가 시작되자 동북부에서는 바르바토스가.
동남부에서는 칼 프란츠 대공이 기다렸다는 듯이 밀고 들어왔다.
덕분에 일은 꼬일 대로 꼬여 벼랑 끝에서 등을 떠밀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후우…… 우선 발타자르 공작과 접촉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으라 전하게. 그가 유일한 구명줄이니.”
발타자르.
현 정국에서 황제나 다름없는 제국 제일의 권신.
그의 개입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기울대로 기운 전황을 단박에 뒤집을 수 있으리라.
“어렵구나. 어려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블랙비어드 후작의 한숨이 깊어져만 갔다.
* * *
동북부 바르바토스 진영.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블랙비어드 후작군과 대치 중인 그곳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바르바토스는 당장에 막사를 뛰쳐나와 마중을 나왔다.
“이게 누구야!”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함께 바르바토스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마기.
길게 늘어져 거대한 낫의 형상을 취한 마기가 휘둘러지며 공간을 베었다.
그 순간, 붉은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바르바토스가 휘두른 마기의 낫과 충돌했다.
꽈아아앙-
폭음과 함께 주변 일대에 거친 돌풍이 휘몰아쳤다.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던 마족과 마수들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돌풍에 휘말려 날아가거나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그러나 제 손에 의해 수하들이 죽어 나갔음에도 바르바토스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지면으로 착지했다.
“여전하구나! 조금이라도 약해졌다면 단박에 찢어 죽였을 텐데 말이야!”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을 띠며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이에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환영 인사가 거칠군. 바르바토스.”
사내의 말에 바르바토스가 그에게 다가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엄살이 많이 늘었네? 발타자르.”
그녀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발타자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렇게 세워둘 참인가?”
“에이, 그럴 리가. 자자, 따라오라고.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여 줄 테니까. 아! 혹시 여자가 더 좋아? 원한다면야 이번에 포로로 잡은…….”
그녀의 장난이 계속될 기미를 보이자 발타자르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에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응이 너무한데?”
“미안하지만 오늘은 일 때문에 온 것이니 어울려 줄 시간이 없네.”
“네네. 그러시겠죠. 공사다망하신 분이니 어련하시겠어.”
바르바토스가 한껏 서운하단 표정을 지으며 앞서 걸어갔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가웨인이 발타자르에게 바짝 다가서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잔뜩 토라지신 것 같은데요?”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었다.
“토라지긴. 지금도 장난치고 있는 걸세.”
발타자르의 말에 순간 앞서가던 바르바토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딱 봐도 정곡을 찔렸다는 몸짓이었다.
“보게. 내 말이 맞지?”
“아니거든! 계속 그렇게 미적거릴 거야? 일 때문에 왔다면서!”
바르바토스가 괜히 신경질을 내며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발타자르와 가웨인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곤 그녀를 뒤따라갔다.
* * *
“자자, 편히들 앉아.”
테이블 위에 한껏 꼰 두 발을 턱 하니 올리고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자리를 권했다. 이에 두 사내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르바토스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부탁을 하시려고 오셨나?”
“이제 슬슬 바알을 칠 때가 된 것 같네.”
발타자르의 말에 순간 바르바토스의 기세가 돌변했다.
섬뜩한 마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며 주변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찌나 강렬한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가웨인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낼 정도였다.
“바알의 행방을 찾은 거야?”
그녀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이봐, 발타자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당장에라도 발타자르를 향해 달려들 기색을 내비치는 그녀의 모습에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제국 전역에 내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이 없네. 그런데 바알에 대한 정보는 단 하나도 들려오지 않더군. 그렇다면 그가 있을 곳은 단 한 곳이지. 현재 유일하게 제국의 눈길이 닿지 못하는 곳.”
시간에 쫓기며 일을 처리하면서도 발타자르는 바알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만큼은 결코 잊는 법이 없었다. 특히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바알의 행방이었다.
가장 우선적으로 물리쳐야 할 마왕은 마신의 강림을 준비하는 아가레스이지만 가장 큰 변수가 될 마왕이 바로 바알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회귀 전의 기억까지 떠올려가며 제국 전역을 이 잡듯 뒤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바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유력한 후보지 중 한 곳이었던 이종족의 땅에서조차도.
하여 발타자르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바알이 머무는 장소는 대륙에 단 한 곳.
“그게 남부 대수림. 아가레스 영감의 영토다?”
바르바토스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추측은 그렇다네.”
발타자르의 대답에 바르바토스는 의자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까딱까딱 흔들어대었다.
확실히.
제국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권력자도 찾지 못한 바알이니 남부 대수림 말고는 바알이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뭐. 아가레스 영감을 치는 것은 좋다 이거야. 그런데 네 말대로 바알이 대수림에 있다면 아가레스 그 노친네랑 손을 잡았다는 뜻인데……. 감당할 자신은 있어?”
바르바토스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회귀 전.
아가레스와 그가 이끄는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300만에 달하는 연합군이 희생되었고 간신히 그를 제압하는 것에 성공한 이후 신성력을 다루는 용사 수십 명과 성녀의 목숨을 희생하고 나서야 그를 간신히 소멸시킬 수 있었다.
아가레스 하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그만한 전력이 필요했다.
한데 거기에 바알까지 더해졌다고 가정한다면 회귀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한 제국이라도 승리를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대답이 없는 발타자르를 바라보던 바르바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타자르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거침없이 걸어간 끝에 발타자르의 앞에 도착한 그녀가 그의 멱살을 잡아채며 바짝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수백만은 우습게 죽어 나갈 거야. 그들의 죽음을. 감당할 자신이 있냐고.”
그녀의 물음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작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었으면 애초에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겠다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북부에 틀어박혀 린과 함께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가올 멸망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것도 감당 못 할 거면 그냥 포기해.”
말하며 그녀가 쥐었던 멱살을 놓아주자 이번에는 발타자르가 그녀의 멱살을 잡아챘다. 순간 바르바토스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걸세.”
어차피 아가레스를 막지 못한다면 이 대륙은 끝이었다.
마신이 강림하게 되면 중간계의 생명체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테니까.
그러니.
“그러니 결정하게. 싸울 것인지. 말 것인지.”
바르바토스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녀의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
이날.
전선 전역에 걸쳐 바르바토스가 이끄는 군세가 일제히 진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을 때.
블랙비어드 후작 성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