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53화
발타자르가 입궁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먼저 입궁해 있던 귀족들이 앞다투어가며 발타자르에게 인사하기 위해 몰려왔으나, 굳어 있는 발타자르의 표정을 발견하곤 다급히 발걸음을 돌려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한지 길의 양옆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메이드 중 하나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렇게 걷기를 얼마간.
발타자르는 제국의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대전에 입장했다.
“제국의 수호자! 북부 전선을 어어……?”
대전의 입구에서 발타자르의 등장을 알리던 시종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대전 안으로 입장하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그러나 그에게 시선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전의 중심에서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황태자를 바라보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승전식의 주인공이 대체 왜 저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 공작! 생각보다 일찍 왔구려.”
황태자가 두 팔을 활짝 벌려 보이며 발타자르를 맞이했다.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한 그 모습에 몇몇 귀족이 황태자를 향해 다급한 눈빛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주인공이 도착했으니 이제 논공행상을 시작해도 되겠군. 자자. 이리로 오게 공작.”
황태자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는 손짓을 하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천천히 발을 움직여 황태자에게로 향했다.
“기대해도 좋다네. 누가 뭐래도 이번 토벌전의 일등공신은 공작 자네이니 말일세.”
다가오는 발타자르를 향해 황태자가 눈웃음과 함께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몇몇 귀족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른 척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황태자의 저런 태도가 발타자르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이윽고 발타자르가 황태자의 앞에 도달한 순간.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전하.”
묘한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발타자르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에 잠시 몸을 움찔거린 황태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러는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논공행상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황태자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신시아로부터 황태자가 자신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정보를 전해 듣기는 하였지만, 그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자신을 견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토사구팽을 하려는 것인지.
전자의 경우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권력의 습성상 군주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신하를 견제할 수밖에 없기도 하였고 어차피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황태자에게 모든 권력을 내어주고 북부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기도 하였기에 충분히 눈감아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후자라면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는 명백히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행위였기에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다른 이를 황제로 옹립하는 수밖에.’
현재 발타자르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의 손짓 한 번으로 제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따라서 황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장 손을 쓰지 않고 황태자의 의중을 떠보는 이유는 단순했다.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선을 넘지 않는다면 황제가 될 것이나. 선을 넘으려 한다면.’
배신자들과 함께 목을 날려 버리리라.
발타자르가 서늘한 빛을 띠는 눈동자로 황태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전하를 제외한 황위 계승권자들을 축출하여 승계 구도를 공고히 하자는 안건. 미뤄왔던 그 일을 바로 시행하였으면 합니다만. 어찌 생각하십니까?”
발타자르의 말에 황태자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네.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네.”
“전하. 결정하실 시간은 지금뿐이옵니다.”
그 말에 황태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뿐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이번 서부 토벌전을 끝으로 이제 남은 적은 남부 대수림에서 마신의 강림을 준비 중인 불사왕. 그자뿐이옵니다. 그동안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충분하였으니 저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국은 불사왕을 토벌하기 위해 전력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고 지금이 아니라면 일을 치를 적기를 놓쳐버리게 될 것입니다.”
“어찌 그렇소?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일을 치러도 되지 않는가?”
황태자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만약 불사왕이 토벌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소신은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북부의 영지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자 합니다.”
대전이 술렁였다.
아직 결정된 사안은 아니라고는 하나 제국 최고 권력자의 은퇴 선언이었다. 이로 인해 제국이 혼란에 빠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진다면 지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황족들이 발타자르가 은퇴하기만을 기다리며 칼을 갈 테니 말이다.
“……진심인가?”
“그러하옵니다.”
답하며 발타자르는 황태자를 빤히 응시했다.
은퇴라는 패까지 꺼내 놓았으니 황태자가 단순히 발타자르를 정치적으로 견제하려고만 한다면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다른 황위 계승권자들을 쳐내지 못한다면 발타자르의 은퇴 이후 지금까지 다져놓은 후계 구도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황태자의 자리까지 크게 흔들릴 것이 분명하니까. 고민할 가치도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만약 황태자가 발타자르를 쳐내려는 의도라면?
애초에 발타자르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 되니 이 제안을 거절할 것이었다.
황태자를 제외한 황위 계승권자들은 그가 발타자르를 상대할 수단 중 하나이니까.
“으음…….”
황태자는 선뜻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쳤다.
발타자르는 재촉하지 않고 그가 결정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있기를 얼마간.
침묵을 깨고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그전에 미리 언질을 줄 수도 있었지 않았는가.”
“사실 그동안 생각만 해 왔던 일이었습니다만. 이제 끝이 다가오다 보니 소신도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뿐이옵니다.”
발타자르의 말에 황태자는 입만 뻐끔뻐끔 움직이더니 차마 질책하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긴 한숨만 내뱉었다.
“내게 며칠만 말미를 주시게.”
“알겠사옵니다.”
답하며 발타자르가 자리에 착석하자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논공행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것에 집중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 전 황태자와 발타자르가 나눈 대화가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앞으로 변화할 권력 구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손익 계산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까닭이었다.
* * *
그날 밤.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발타자르에게 가웨인이 다가왔다.
평소라면 와인이라도 한 병 들고 왔을 그이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빈손이었다.
“장군.”
“음? 아, 가웨인. 술친구를 찾아 왔는가?”
발타자르가 가벼운 농담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어째선지 차가웠다.
“은퇴하신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발타자르가 눈동자만 또르륵 움직여 가웨인을 바라보았다.
잔뜩 경직된.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벌써 소문이 그렇게나 퍼졌는가?”
“예. 그 일로 제도 귀족가가 떠들썩합니다. 대체 무슨 의도 십니까? 설마 소문대로 은퇴하실 생각이 십니까?”
“그렇다네.”
“어째서입니까?”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가웨인을 힐끗- 바라본 발타자르가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더니 정원에 마련된 티테이블로 이끌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듯하니 앉아서 얘기하지.”
앉으며 자리를 권하자 가웨인이 마지못해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퇴는 말일세.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네.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그 순간부터 말이야.”
말하며 발타자르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능숙한 동작으로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매캐한 담배 연기가 폐부를 들쑤셨다.
“지난번에 얘기했었지? 회귀 전의 제국은 몰락했다고.”
“……예.”
발타자르가 내뿜은 담배 연기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연기 사이로 제도가 침공당하던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일평생을 바쳐가며 지키려 했던 제국이었네. 그런 제국이 몰락하는 순간을 두 눈으로 목도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는가?”
불타오르는 제도.
성벽을 넘어오는 반군들.
도망치는 황족들과 고집을 부리는 황제.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순간 떠오른 감정은 분노도, 후회도 아니었다.
“허탈했다네. 내가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노력했을까? 하나뿐인 혈육마저 내팽개치고 내 평생을 바친 결과물이 고작 이것이었던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
가웨인은 말없이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후련해 보였다.
“그래서 회귀했음을 깨달았을 때 결심했지. 이번 생은 나를 위해. 린을 위해 살아보자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으니 원한다면 세상의 모든 부를 가질 수도, 혹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황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한다는 것이 고작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살겠다니.
남들이 본다면 한심해 보일지도 모를 결심이었다.
“그럼 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의 자리에 오르신 것입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뭐 그런 한심한 질문을 하냐는 투로 답했다.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위해서는 단결된 제국의 힘이 필요하니까.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을 위한 전제 조건이니까.”
말하는 발타자르의 모습을 보니 그의 결심을 돌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긴. 언제 그가 발타자르의 결정을 돌린 적이 있던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이룩한 것이 아깝지는 않으십니까? 장군의 한마디면 제국이 좌지우지되는 지금의 자리가 손에서 떠나게 될 텐데 아쉽지는 않으십니까?”
“권력이란 마약과도 같다네. 독인 것을 알면서도 한번 손에 쥐게 되면 그것에 미쳐버리게 되지. 당장 황태자를 보게나. 내가 그동안 헌신한 것은 까맣게 잊고서 권력을 위해 내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차라리 황제가 되어보심은 어떠십니까?”
가웨인이 역모죄로 목이 달아날 소리를 태연하게 해대었다. 하지만 말하고서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그냥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인 것 같았다.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황제가 될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이후엔? 남은 삶을 오로지 황제의 자리와 제국을 건사하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그 삶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네.”
“……다른 가신들은요? 장군을 믿고 따르는 그들은요?”
순간 발타자르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서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들에겐 미안하네만. 다른 이를 위해 사는 삶은 지난 삶으로 충분하네. 그러니 내가 희생하는 것은 딱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는 것까지일세. 그 이후엔 각자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지. 날 따라 은퇴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찾아올 혼란 속에서 제 몫을 찾기 위해 뛰어들든지 말일세.”
“……무책임한 발언인 것은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러나 그들까지 생각한다면 은퇴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기적이라도 밀고 나가는 수밖에.
“제국은. 장군이 은퇴하시면 제국에 찾아올 혼란은 어쩌시려고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해보았지만 되려 발타자르의 비웃음만 살뿐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알게 뭔가. 망하려면 망할 것이고, 유지되려면 유지되겠지. 내가 언제까지 뒤치다꺼리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툭- 하고 다 태운 담배꽁초를 내던지며 발로 짓밟던 발타자르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아! 그러고 보니 벌써부터 제 살길 찾아 움직이는 녀석들이 있던데.”
발타자르의 말에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가웨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배신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누구인지는 아직 특정되지 않았지만, 보아하니 황태자에게 헛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모양일세.”
말하며,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휘영청 떠오른 달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괘씸하기도 하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은퇴 이후 곤란하게 만들 것 같으니 은퇴 직전에 싹 쓸어버릴 생각이라네. 어떤가. 자네도 함께하겠나?”
장난스레 말하고 있지만 말하는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