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52화
“발타자르 공작이 저택으로 향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소환령을 내릴까요?”
슈텔리앙 후작의 물음에 아르세우스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제국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발타자르이기에 이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었다.
“그냥 두게. 한동안 타지 생활을 전전했으니 가족이 그리울 법도 하지.”
“그래도 자칫 뒷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슈텔리앙 후작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아르세우스야 이 일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세간의 시선에는 발타자르가 아르세우스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함에도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아르세우스가 먼저 고개를 숙인 것처럼 내비칠 수도 있었다.
“무얼. 보기 좋지 않은가. 철인 같았던 공작의 인간적인 면모도 볼 수 있고 하니 말이야.”
“하오나…….”
“그만하게.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괜히 세간의 평의 신경 쓰다 자칫 발타자르 공작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음이야. 인간관계란 사소한 것에서 틀어지기 쉬운 법이니 말일세.”
현재 발타자르의 권세는 황실을 아득히 뛰어넘어 제국 제일이라 칭해질 만큼 거대했다. 당장 황족들을 축출하고 황제를 참칭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본인이야 마왕들을 토벌하고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눈치였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봉신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아르세우스의 입장에서는 발타자르가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최대한 배려해 주는 것이 옳았다.
그것이 발타자르가 온전히 제 할 일에 집중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봉신들이 불순한 행동을 벌일 여지를 배제시키는 일이었으니까.
다른 황위 계승권자들에 비해 무능하다고 평가받는 아르세우스라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물론, 나라고 언제까지 이런 제스처를 취할 생각은 없다네. 비록 발타자르 공작의 도움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고마운 것이야 고마운 것이고 차후 제국을 운영할 통치자의 입장에선 신하가 군주보다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으니 말일세.”
슈텔리앙 후작은 말없이 아르세우스를 바라보았다.
근래에 부쩍 발타자르를 의지하는 모습을 내비치기에 내심 걱정이 많았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아르세우스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 계획이 있으신 모양이시군요.”
“미리 말해주지 못해 미안하네. 계획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그때는 모두 말해주겠네.”
최측근인 자신에게조차 아무런 언질도 없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었음을 시인하는 아르세우스의 말에도 슈텔리앙 후작은 실망하거나 서운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기특하기만 했다.
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군주의 덕목 중 하나인 의심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 지어졌다.
“그새 부쩍 성장하셨군요. 선황께서 보셨다면 무척 기뻐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무척 기쁘군.”
“그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발타자르 공작이 지금까지 황태자 전하께 헌신하는 모습만 내비치고 위협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였습니다. 만약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면 황태자 전하라도 무사하시지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기특한 것은 기특한 것이고 아르세우스가 어떤 계획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심히 걱정되었다. 만약 아르세우스 홀로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면 당장에라도 말릴 생각이었다.
그런 슈텔리앙 후작의 우려를 눈치챈 듯 아르세우스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무척 뛰어난 인재가 날 도와주고 있으니까.”
아르세우스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말하는 인재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 알지 못하는 슈텔리앙 후작이기에 걱정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아르세우스가 주도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이기에 믿고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만약 아르세우스가 계획한 일이 틀어져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다면 아르세우스를 대신하여 발타자르의 분노를 받아내리라 결심하면서.
“알아서 잘하시리라 믿습니다만 그래도 노신을 너무 따돌리시지는 말아 주십시오.”
“알겠네. 그리고 고맙네. 믿어주어서.”
아르세우스가 진심이 담긴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슈텔리앙 후작이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에르제가 발타자르 영애와 부쩍 친하게 지낸다던데.”
“예. 주변의 평을 들어보니 친자매처럼 지낸다더군요. 실제로 황궁에서 머무시는 날보다 발타자르 가에서 머무시는 날이 많기도 하고요.”
“계속 친하게 지내도록 조치해 주게.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슈텔리앙 후작의 대답에 아르세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이야기도 다 끝났고 발타자르 공작이 입궁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듯하니 우선 식사라도 함께하세.”
* * *
발타자르 가의 저택.
정원에서 아이린과 함께 티타임을 가진 발타자르는 그녀가 구워온 파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갓 구워낸 파이에서는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안에 사과 잼이 든 것인지 사과 향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맛은 어떠세요?”
발타자르가 파이를 한입 크게 베어 물자 기대에 찬 눈망울로 그를 응시하던 아이린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물어왔다.
이에 잠시 뜸을 들이며 파이의 맛을 음미하던 발타자르가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맛있구나.”
별다른 미사여구 없는 투박한 칭찬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아이린의 얼굴에는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많이 드세요! 여기 많이 있어요.”
아이린이 파이가 담긴 접시를 내밀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물었다.
“파이를 만드는 법은 누구에게 배웠니?”
“에르제가 가르쳐 줬어요!”
“에르제?”
에르제 황녀를 편하게 부르는 그녀의 말에 발타자르가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아이린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아, 아니. 에르제 황녀님이요.”
말하며 아이린이 힐끔힐끔- 발타자르의 눈치를 보자 발타자르가 괜찮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앞에서는 편하게 불러도 된단다. 그보다 에르제 황녀와 많이 친해졌나 보구나.”
“네. 에르제랑 정원도 가꾸고요. 광장 구경도 다니고 또…….”
아이린이 재잘재잘 에르제 황녀와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발타자르는 턱을 괴고서 물끄러미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황녀라고는 해도 또래의 아이와 거의 붙어살다시피 생활하다 보니 부쩍 친해진 듯했다. 아이린에게 또래의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발타자르가 제국 최고의 권력자인 만큼 호시탐탐 그를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는 이들은 도처에 산재해 있었는데, 그들이 이 관계를 이용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건은 신시아에게 따로 언질을 주어야겠어.’
그녀라면 아이린과 에르제의 관계를 이용하려는 조짐을 미리 알아차리고 적절하게 조치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라버니?”
그 모습을 아이린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그가 아이린을 품에 안아 들었다.
“미안하지만 이만 입궁해야 할 것 같구나. 못다 한 이야기는 돌아와서 하는 것으로 하자꾸나.”
발타자르의 말에 일순간 아이린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활짝 만개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이린이 인사하자 발타자르가 그녀의 등을 두어 번 토닥여 주고는 내려주었다.
“다녀오마.”
떠나가며 발타자르는 가웨인에게 저택에 남아있을 것을 지시하곤 최소한의 호위만 대동한 채 황궁으로 향했다.
* * *
발타자르가 저택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거리에는 여전히 환영 인파로 북적였는데 그들 사이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와 발타자르의 마차 안으로 난입했다.
그러나 이를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호위들은 이 그림자에 대해 눈치를 채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발타자르는 난입한 이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요란스럽게도 등장하는군.”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난입한 인물을 바라보자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인물이 얼굴을 가린 새하얀 가면을 벗으며 배시시- 웃었다.
“에이. 요란스럽기는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잖아요?”
신시아의 너스레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고는 물었다.
“그래. 굳이 잠입을 시도하면서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서운하게 잠입이 뭐에요? 그냥 오랜만에 아저씨를 볼 겸해서 찾아온 것뿐이에요.”
신시아의 대답에 발타자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집요한 시선이 한동안 이어지자 신시아가 슬쩍- 그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
“아니…… 저도 웬만하면 오늘 밤에나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마침 조사하던 정보에 대한 보고가 막 올라온 참이거든요. 근데 이게 입궁하시기 전에 미리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순간 발타자르가 눈을 빛냈다.
그녀가 이렇게 다급하게 찾아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말해보게.”
발타자르가 묻자 신시아가 품에서 서류를 한 장 꺼내 들어 건네었다.
그것을 받아 펼쳐본 발타자르는 서류에 빽빽이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자 이게 무엇이냐는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신시아를 바라보았다.
“우리 황태자께서 슬슬 아저씨가 불편해지셨나 봐요.”
“황태자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말인가?”
“네. 거기 적힌 이름들은 황태자의 계획에 직접 적으로 개입한 사람들이에요. 당연히 간접적으로 개입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더 많겠죠?”
신시아의 말에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젠가 황태자가 일을 치를 것은 예견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무능하다고 평가받기는 해도 그것이 멍청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현 상황에서 발타자르를 적대하는 행동을 취했다가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뻔한 상황임에도 황태자가 일을 꾸몄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확신에는 아마도…….
“누가 관계되었는가?”
“네? 거기 다 적혀 있잖아요?”
발타자르의 물음에 신시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자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순간 발타자르의 서늘한 눈동자를 마주한 신시아가 몸을 흠칫- 떨었다.
“내 휘하의 가신 중에 누가 황태자에게 바람을 넣었는지를 묻고 있는 걸세.”
지금 발타자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딱 하나였다.
배신.
“캐러독인가? 아니면 모드레드인가?”
발타자르가 의심 가는 인물들을 나열했음에도 신시아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발타자르는 신시아가 거기까지는 눈치채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 가신들을 샅샅이 조사하게. 근래 누구와 만났는지, 어디서 무얼 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황태자에게 확신을 줄 만한 인물.
동시에 발타자르에게 큰 타격을 줄 만한 이는 몇 없었다.
그는 발타자르 세력 내에서도 제법 큰 세력을 구축한 이가 분명했다.
“죄송해요. 다시 조사해서 보고 올릴게요.”
자신의 실책에 신시아가 굳은 얼굴로 사죄하고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인파 사이로 사라져가는 신시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발타자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배신인가.”
생각보다 일이 번거롭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