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50화
‘삼 일의 말미를 주지.’
그것이 이날 발타자르와 나눈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처음의 기세등등함은 오간 데 없고 요새로 복귀한 연합의 수장들은 패잔병처럼 안색이 어두웠다.
“아무래도 제국 측의 뜻에 따라야겠죠?”
로렐라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붉은 수염이 반발했다.
“지금 제국의 노예를 자처하겠다는 말인가!”
붉은 수염의 말에 로렐라이가 그를 샐쭉이 노려보며 말했다.
“말을 왜 그렇게 하시나요? 제국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어째서 노예가 된다는 말이 되나요?”
“멍청하기는! 저들의 뜻대로 제국의 땅에 터를 잡고 살아간다고 치자. 그럼 저놈들이 우리끼리 살아가도록 그냥 둘 것 같은가? 분명 간섭하고 통제하려 들 것이다. 그것이 노예가 되는 길임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그건 억측이에요! 아니, 설령 그렇다고 쳐요. 지금 연합에 다른 선택지가 있나요? 설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이자는 말인가요?”
로렐라이의 물음에 붉은 수염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국이 저런 태도를 고수한다면! 그렇다면 요정왕 당신 말대로 전쟁이라도 치러야겠지.”
붉은 수염은 그렇게 말하며 다른 수장들을 바라보았다.
아즈라엘을 제외한다면 다들 붉은 수염과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저들이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붉은 수염은 불안함을 느꼈다.
“다들 설마 제국의 억지를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겠지?”
붉은 수염의 물음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와 뜻을 함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만델로프까지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모습이었다.
현재 연합 측에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세계수의 씨앗이 없다면 이 땅에 잔류하는 것은 가만히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꼴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붉은 수염의 주장대로 제국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었다.
몇 년 동안 벌레 무리를 토벌하지 못해 현 상황에까지 치달은 연합과 달리 제국은 단기간에 큰 피해 없이 벌레무리를 토벌하였다.
그런 제국을 상대로 연합이 이길 수 있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설령 연합에서 전쟁을 치르고자 해도 제국이 상대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들로서는 굳이 연합과 전쟁을 치를 필요 없이 세계수의 씨앗을 가지고 제국의 영토로 복귀하면 그만일 문제였으니까.
“우리 오거들은 제국으로 전향하겠다.”
연합의 수장들이 요새로 복귀할 당시 그들을 따라왔던 라쿤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에 붉은 수염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연합을 배신하겠다는 소리더냐!”
“배신?”
붉은 수염의 외침에 라쿤타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라쿤타가 성큼성큼 붉은 수염에게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봐, 난쟁이. 잘 들어라. 애당초 연합이 결성된 목적은 종족 간의 조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어. 연합의 창설 목적은 오로지 세계수를 놓고 벌어진 전쟁을 종식 시키고 이후 재발할지 모를 세계수 쟁탈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 세계수가 이제는 제국의 손에 넘어갔으니 이는 더 이상 연합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
“그렇다고 그것이 제국의 노예를 자처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억!”
붉은 수염이 무어라 반발하려 하자 라쿤타가 그의 멱살을 잡아채 단숨에 들어 올렸다.
“네놈이 잘못된 선택을 하여 드워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드워프가 아닌 오거들이니까. 그러니.”
라쿤타의 눈동자가 타오를 듯 이글거렸다.
당장에라도 몸뚱이를 찢어발길 듯한 기세에 붉은 수염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백성들의 목숨을. 미래를. 네놈 멋대로 정하지 마라.”
쥐었던 붉은 수염의 멱살을 놓아준 라쿤타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자 붉은 수염이 떠나가는 그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한동안 제국 놈들과 붙어먹더니 이제 제국의 개가 다 되었구나!”
“좋을 대로 생각해. 아! 그리고 전향하는 것은 수인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럼.”
회의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연합의 주축이 되는 일곱 종족 중 벌써 두 종족이 제국으로의 전향을 선언했다. 이는 연합의 분열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 수장은 아무도 없었다.
* * *
회의장을 벗어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라쿤타는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구슬의 특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하고 찌르자 구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무언가를 비치기 시작했다.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요.”
라쿤타가 구슬을 향해 허리를 굽히곤 연신 손바닥을 살살 비벼대었다. 회의장에서 내비친 당당한 태도는 오간 데 없고 한없이 비굴한 모습이었다.
“어차피 그냥 내버려 두어도 사분오열할 연합인데 그 분열을 재촉하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단순히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라쿤타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스며 있는 두려움이 그것을 증명했다.
[드워프의 수장…… 붉은 수염이랬던가?]
구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구슬에 비친 모습이 선명해지며 상대방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연보랏빛 머리칼에 황금빛 눈동자.
목 부근에 새겨진 붉은 문신이 인상적인 사내.
발타자르의 물음에 라쿤타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요.”
[잘 주시하게. 제법 쓸 만해 보이니까.]
“예? 쓸 만하다니요?”
라쿤타로서는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붉은 수염은 쓸데없이 고집만 강한 전형적인 드워프였지만 그렇기에 수장으로서 실격인 녀석이었다.
당장 회의장에서 내비친 모습만 보아도 그랬다.
일족의 수장이라면 응당 제국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옳았다.
설령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해도 그 선택으로 일족을 살릴 수 있다면 더더욱.
한데, 붉은 수염은 쓸데없는 아집으로 제국과 반목하려 하니 드워프 일족의 미래는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놈은 결코 발타자르 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요. 조만간에 일을 치러도 크게 치를 녀석입니다요.”
[그래서 쓸 만하다는 것이네.]
발타자르의 말에 라쿤타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가 정확히 무슨 생각인지는 짐작할 수 없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드워프들을 본보기로 삼으실 생각이십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작은 웃음소리가 라쿤타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 웃음소리에 라쿤타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생각했다.
‘역시 이자에게 굴복한 것은 백번 생각해도 옳은 선택이었어.’
실로 두려운 자였다.
연합을 벼랑 끝에 세우고 선택을 강요하며 등을 떠미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또다시 음모를 꾸미는 모습이라니!
만약 들레망 요새에서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맞서 싸우려 했다면…….
‘으으…… 생각하기도 싫군.’
라쿤타가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가운데 구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짐작한 것 같으니 붉은 수염의 건은 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믿겠네.]
그것을 끝으로 통신구가 빛을 잃었다.
라쿤타는 균열이 일어나 산산 조각나 버린 통신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즈라엘. 그 영감은 대하기 어려우니 로렐라이와 케르크. 그 둘을 만나 봐야겠군.”
결정을 내린 라쿤타가 서둘러 처소를 벗어났다.
수장의 과반수가 전향을 선택한다면 궁지에 몰린 붉은 수염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발타자르가 원하는 대로 말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발타자르가 약속한 3일째가 되던 아침.
철수를 준비하는 제국 군 진영으로 연합의 사절단이 방문했다.
드워프와 수인족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종족의 수장들이 군타낙스 기사단의 안내를 받으며 제국 군 진영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제국군의 분위기가 심상찮아요.”
“분명 저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고 있는데 이런 반응은 확실히 이상하군.”
로렐라이와 케르크가 양옆으로 도열한 제국군의 모습을 살펴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설마 이제 와서 태도를 돌변하는 것은 아니겠지?”
만델로프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띠며 앞서가는 군타낙스 기사단을 응시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그렇게 연합의 수장들이 제국 군의 흉흉한 분위기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제국군 진영의 중심에 도착했다.
기사들이 둥근 원을 그리며 둘러싼 그곳에는 발타자르가 다가오는 연합의 수장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꺄…… 꺄아아악!”
이윽고 연합의 수장들이 기사들의 장벽 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보이는 풍경에 로렐라이의 비명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올람브르그.
드워프 일족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100인의 드워프로 구성된 드워프 최강의 전사 집단.
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창끝에 목이 내걸린 채 혀를 빼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툭-
누군가의 수급이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갑작스러운 올람브르그들의 죽음에 놀란 마음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연합의 수장들은 자신들의 발치 앞까지 굴러온 수급을 바라보곤 다시 한번 기함했다.
“붉은 수염!”
“끄응,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만…….”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이자가 누구인지 모르는가!”
만델로프가 발타자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발타자르는 다리를 꼬고 앉은 그 자세에서 일절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연합의 수장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젯밤. 드워프 일족의 수장인 붉은 수염이 일족의 전사들을 이끌고 기습을 감행해 왔네.”
발타자르의 입이 열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에 연합의 수장들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발타자르의 얼굴을 응시했다.
“지금…… 뭐라고……?”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멍하니 되묻는 로렐라이와는 반대로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끝낸 만델로프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붉은 수염의 수급을 노려보았다.
“붉은 수염! 이 얼간이가……!”
그렇지 않아도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연합이었다.
한데, 붉은 수염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제국은 연합을 통제할 강력한 명분까지 손에 쥐게 되었다.
붉은 수염이 그토록 주장했던 제국의 노예가 되는 일을 그가 자초한 것이었다.
“붉은 수염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본 제국에서는 연합이 제국으로 전향하는 일에 앙심을 품은 집단이 연합 내부에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하여 연합 내부의 불순분자들을 모조리 축출할 때까지 연합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통제를 실시한다.”
발타자르의 황금빛 눈동자가 연합의 수장들을 응시했다.
“이의. 있는가?”
감히 반발하는 자는 없었다.
* * *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붉은 수염의 일로 인해 연합은 제국의 요구에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제국으로의 전향이 결정되었음에도 연합 내부에선 그 어떠한 잡음도 나오지 않았다.
언덕 위에서 제국을 향해 이동을 준비하는 연합의 백성들을 지켜보던 발타자르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곤 불을 붙였다.
“후우…….”
새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발타자르가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즈라엘의 전언이 떠오르고 있었다.
‘북쪽을 조심하게. 점괘를 보니 어둠이 북쪽에서부터 그대를 향하고 있었으니 말일세.’
발타자르가 그 말에 대한 의미를 묻기 위해 아즈라엘을 찾아갔지만, 그때는 이미 드래고니안 일족 전체가 동면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들이 깨어나는 것은 제도 탈라브하임에서 세계수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할 무렵일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니 아즈라엘이 남긴 전언에 대한 의미는 직접 겪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의문으로 남게 되어버렸다.
“어둠인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 손에 쥐고자 하는 결말을 얻기 위해 나아갈 테니까.
“장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군타낙스 기사단과 함께 다가온 가웨인이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자 발타자르가 태우던 담배를 툭 내던지곤 말 위에 올라탔다.
“출발하세.”
발타자르의 말이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로 연합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길고 길었던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