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48화
발레포르가 사망하자 촉수처럼 꿈틀거리던 세계수의 뿌리들이 그 힘을 잃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쿠웅-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주인을 잃은 벌레들이 하나둘씩 폭발하기 시작했다.
수만에 달하는 벌레들이 일제히 폭발하자 세상이 녹색 빛으로 물들었다.
발레포르의 시신 위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발타자르가 입에 담배를 물었다.
치익-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드리운 어둠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티 없이 맑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빌어먹게도 좋은 날씨군.”
중얼거리며 발타자르가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최후의 순간.
발레포르가 남긴 말이 발타자르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선택받은 존재가 그대뿐이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단순히 생각한다면 용의 일족이란 것이 발타자르 외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발레포르가 남긴 유언이 경고의 의미임을 생각한다면 그가 말한 선택받은 존재란 마계의 의지가 선택한 존재일 수도 있었다.
“……모르겠군.”
지금으로선 아무리 고민한다고 한들 해답이 나오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발레포르가 말한 존재가 어떤 이든 상관없었다.
그 누가 되었건 앞을 막는다면 물리치고 갈망하는 미래를 쟁취하리라.
“이 긴 여정도 슬슬 끝이 보이는군.”
발레포르가 죽은 이상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불사왕 아가레스를 물리치고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는 것.
발타자르는 결전의 순간이 손에 잡힐 듯한 거리까지 다가왔음을 느꼈다.
‘충분히 해볼 만해.’
회귀 전과 달리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전력을 일정 부분 온존할 수 있었으며, 바이칸과의 오랜 분쟁이 끝난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제국의 신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거기다 용사들에 대한 통제도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이종족들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회귀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강력한 군세가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었다.
물론 불안정한 점도 많았다.
당장 반역자 집단의 행방이 묘연하여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데다 급속도로 세력을 불려 나간 탓에 체제도 불안정했다.
더 큰 문제는 바알이 여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어떠한 문제점보다도 강력한 변수로 작용 될 그가 어찌 된 영문인지 자취를 감추고 있으니 큰 근심거리로 남아 있었다.
“제도로 복귀하는 대로 조사해 봐야겠군.”
발타자르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그렇게 해결을 해오며 지금에 이를 수 있었으니 여태까지 해온 대로만 해가면 앞으로도 잘해 나갈 수 있으리라.
“린이 보고 싶군.”
문득 아이린이 보고 싶어졌다.
회귀한 이후의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노력한다고 했지만, 일이 너무 바쁘다 보니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일이 다 끝이 나면 린과 함께 북부로 돌아가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는 것도 좋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본대로 복귀하려던 순간이었다.
두근-
크라운 하트가 거칠게 요동쳤다.
발타자르가 이상을 느낀 순간.
몸이 기울기 시작했다.
“알!”
비비안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며 발타자르의 의식이 끊어졌다.
* * *
빌 헬름이 이끄는 벌레 무리의 공세에 요새가 함락 직전까지 치달았던 상황에서 돌연 군을 물리고 퇴각을 실시하자 연합의 수뇌부들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엘프들의 왕족이자 그들의 왕인 하이 엘프 만델로프가 적의 군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인간들과 싸우기 위해 물러간 것은 아닐까요?”
요정 왕 로렐라이가 조심스레 의견을 꺼내자 이에 동의하듯 리자드맨의 수장 케르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오.”
“흥. 인간이든 벌레들이든 서로 싸워 다 죽어버리라지.”
아이언 해머의 사후 드워프 일족의 수장직에 오른 붉은 수염이 이죽거렸다.
그는 아이언 해머의 죽음이 빌 헬름의 배신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인간을 혐오했고,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인 벌레들을 증오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인간들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보내는 것이 어떤가요?”
로렐라이의 제안에 붉은 수염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지금 그 배신자들을 돕자는 말인가! 놈들 때문에 우리가 무슨 일을 당했는데!”
붉은 수염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로렐라이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봐요. 붉은 수염. 심정이 어떤지는 잘 알지만, 저희는 인간들의 도움이 없다면 더는 버틸 수 없어요. 그리고 배신자는 빌 헬름과 그의 병사들인데 왜 애먼 다른 인간들까지 배신자라고 몰아붙이는 거죠?”
“하! 인간들에게 아양이라도 떨겠다는 거요? 그렇게 해서까지 살고 싶소?”
“뭐예요? 지금 말 다 했어요?”
“아니! 못했소!”
로렐라이와 붉은 수염이 언쟁을 벌이던 순간.
세계수가 위치한 곳에서 찬란한 서광이 뿜어져 나왔다.
세계수에 이변이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일족의 수장들은 일제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원군의 편성은 차차 논의하더라도 우선 세계수 쪽에 정찰대를 보내야 하지 않겠소?”
케르크의 말에 회의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드래고니안들의 수장, 아즈라엘이 입을 열었다.
“그게 좋겠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아즈라엘의 물음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의 동의임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 * *
발타자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나서였다.
정신을 차린 발타자르는 마나 하트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 반대편에 위치한 크라운 하트의 비어 있는 마지막 홈에 백색의 결정체가 생겨났다. 그것은 다른 두 결정체와는 달리 신성을 품고 있었다.
이전과 달리 완전한 형상을 이룬 크라운 하트.
발타자르는 이 크라운 하트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성장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혹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성군의 구와 가라틴이 충돌하며 일으킨 거대한 신성의 폭발.
그것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결정체가 생길 정도의 신성이 쌓인 것 같았다.
이것 말고는 달리 이 상황을 설명할 것이 없었다.
‘설마 이것 또한 용의 일족이기 때문일까?’
아몬의 말대로 단순히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부조리에 가까울 정도의 운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상단이라도 하나 꾸려볼 것을 그랬나?’
만약 그랬다면 세상의 모든 부를 손에 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압도적인 운이 뒷받침된다고 해도 그만한 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미래를 대비하는 일에 쓸 시간도 부족한 판에 그런 곳에 시간을 투자할 여유는 없었다.
더욱이 재물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알! 일어났어요?”
맑고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비비안이 두 눈동자에 눈물을 머금은 채 발타자르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걱정했어요!”
발타자르의 목에 매달리듯 와락 끌어안은 비비안이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비비안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며 발타자르가 물었다.
“내가 의식을 잃은 지 며칠째인가?”
“하루예요.”
비비안의 대답에 발타자르는 그리 긴 시간을 쓰러져 있지는 않았다는 것에 속으로 안도했다.
“몸은 괜찮아요?”
걱정스레 묻는 비비안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발타자르는 옅은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네. 오히려 이전보다 더 힘이 넘친다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요. 이제 일도 다 끝났잖아요.”
“그러지.”
무뚝뚝한 발타자르의 대답에도 비비안은 마냥 좋은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돌연 깜빡 잊었다는 듯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 참. 이거요.”
비비안이 꺼내 든 것은 작은 씨앗이었다.
발타자르가 이것이 무엇이냐는 의미를 담아 바라보자 비비안이 이 씨앗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세계수의 씨앗이에요.”
순간 발타자르의 눈이 치떠졌다.
마기에 물든 세계수를 본 순간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씨앗이나마 남겨놓았다고 하니 의외의 결과였다.
“마왕에게 완전히 힘을 빼앗기기 직전에 알이 마왕을 쓰러뜨린 덕분에 이렇게 씨앗이라도 남길 수 있었대요.”
‘세계수가 고맙다고 전해달랬어요’하고 비비안이 말을 덧붙였다.
발타자르는 말없이 세계수의 씨앗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정말 세계수의 씨앗이라면…….
‘이종족들을 회유하기가 한결 쉬워지겠군.’
발타자르에게는 이 대륙과 함께 기나긴 역사를 보내온 거목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보다 이종족들을 회유할 수단을 얻었다는 것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거…… 다행이군.”
“그렇죠?”
비비안과 발타자르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말이다.
* * *
“장군. 일어나셨습니까?”
발타자르가 막사를 나서자 가웨인이 비비안과 똑같은 말을 건네왔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발타자르의 몸을 살펴보는 것이, 이대로 두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아 화제를 전환했다.
“이제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보다 빌 헬름 쪽은 어찌 되었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가웨인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재차 물었다.
“왜 그러는가?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그것이……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웨인이 어딘가로 안내했다.
두 사내가 잠시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은 회색 천막의 앞이었다.
중 죄인이 갇혀 있기라도 한 듯 천막의 주변에는 이례적으로 군타낙스 기사단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프락시온 제국에 영광을!”
기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발타자르가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왔다.
이에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막사 안을 둘러보자 그곳에는 몸이 반쯤 녹아내린 사내 둘과 여인 하나가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마왕과 계약한 이들이 마왕이 사망했을 때 겪는 증상이었다.
그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던 발타자르이기에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그들이 누구인지 정도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로군. 빌 헬름.”
발타자르가 막사 기둥에 몸을 기대고 축 늘어져 있는 사내, 빌 헬름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그가 간신히 눈동자를 움직여 발타자르를 노려보았다.
“죽여라.”
잔뜩 쉰 목소리.
그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한심하군. 고작 그런 꼴을 당하려고 마왕에게 혼을 팔았는가.”
발타자르의 말이 빌 헬름의 심장을 거칠게 난도질했다.
순간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이 꼴을 하고선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후회와 미련으로 뒤섞인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패자는 말이 없다 하였다. 그대와 할 말은 없으니 죽여라.”
모든 것을 포기한 그 모습에 발타자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한때 제국을 뒤흔들 정도의 세력을 구축했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비참한 말로였다.
“제도에서 처형식을 거행할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숨통을 붙여놓게.”
발타자르가 가웨인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리자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은 빌 헬름이 눈동자를 부릅뜨며 남은 힘을 모두 쥐어 짜내어 소리 질렀다.
“죽여라! 내게 인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날 죽이란 말이다! 죽음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단 말이더냐!”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발타자르가 등을 돌렸다.
“으아아아악!”
떠나가는 발타자르의 등 뒤로 빌 헬름의 울분에 찬 괴성이 울려 퍼졌지만, 결코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