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46화
제도 탈라브하임.
축제가 열렸다.
내전이 종결된 이후 처음 열린 축제였다.
아직 제국 전역이 내전의 상처로 가득함에도 그것을 잊으려는 듯 무척이나 성대한 축제였다.
제도의 중심인 황궁을 시작으로 외성의 빈민가에 이르기까지 온통 축제의 분위기로 물들었다.
길목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뿌려졌으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신민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했다.
다그닥- 다그닥-
동서남북 각 성문을 통해 한껏 치장한 마차들이 저들이 태운 귀족가의 문장을 뽐내며 황궁으로 향했다.
길게 줄지어진 마차의 행렬.
그중에는 발타자르가의 마차 또한 존재했다.
포효하는 황금빛 용이 음각된 팔 두 마차.
그것에 타고 있던 발타자르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이해할 수가 없군.”
“무엇이 말인가?”
갑작스레 들려오는 낯선 이의 목소리에 발타자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인자해 보이는 인상에 큰 귓불이 유독 눈에 띄는 사내.
빌 헬름 공작이었다.
“공작 각하.”
발타자르가 작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빌 헬름이 웃으며 창틀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 마차를 호위하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빌 헬름을 불렀지만, 그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자세를 바로 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이지? 발타자르 후작. 지난 내전 때 함께 로마노프 공작가의 50만 대군을 박살 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북부는 여전한가? 들리는 소문에는 거대한 용이 북쪽으로 날아갔다고 하던데?”
“용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입니다. 그리고 잘 지내냐고 물으신다면……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동토의 야만족들도 최근 들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어 간만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잘 지낸다니 다행이로군.”
웃는 낯을 유지하던 빌 헬름이 관찰하는 듯한 눈빛으로 발타자르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건 그렇고……. 무엇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가?”
빌 헬름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답했다.
“내전이 종결된 지 제법 시일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제국의 신민들은 내전의 여파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한데 이렇게나 보란 듯이 호화로운 축제를 벌이고 있으니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여기에 들일 돈을 신민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보다 많은 이를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발타자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빌 헬름은 행렬을 지켜보기 위해 거리로 나온 백성들을 가리켰다.
“보게나. 저들의 얼굴을.”
빌 헬름의 말에 발타자르가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웃음이 만개해 있었다.
아이들은 아비의 어깨 위에 올라타 초롱초롱한 두 눈망울로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여인들은 저마다 꽃이 한가득 담긴 바구니를 한쪽 팔에 내걸고선 행렬을 향해 꽃을 던지고 있었다.
“다들 즐거워 보이지?”
“……그렇긴 합니다만.”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에 빌 헬름이 달래듯이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워낙 흉흉했지 않은가. 그러던 차에 이렇게 크게 축제를 열었으니 잠시나마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건 제도의 신민들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까.”
“아니지. 이번 축제에는 고위 귀족만이 아니라 지방의 중소 귀족들도 대거 초대한 축제일세. 이 축제가 끝이 나고 그들이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면 사용인들에게 영웅담처럼 이야기하겠지. 제도에 어느 귀족이 방문했다. 어느 귀족 가문의 자제가 그렇게나 멋지더라. 어느 영애가 그토록 아름답다더라.”
빌 헬름은 거리로 나온 신민들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면 사용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지인들에게 이야기를 전할 것이고 신민들은 욕하거나 제도를 동경하며 잠시나마 웃고 떠들 것일세. 잠시나마 신민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축제가 아니겠는가?”
발타자르는 빌 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겠지만 발타자르는 그와는 생각이 달랐다.
“……궤변입니다. 신민들이 그것으로 잠시나마 웃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들과 달리 화려한 축제를 벌이는 제도의 신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요.”
발타자르의 날 선 목소리에 빌 헬름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음. 이것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른 것 같군.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빌 헬름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는지 화제를 전환했다.
“최근에 말일세. 수하들과 함께 이종족의 땅을 방문했다네.”
빌 헬름의 말에 발타자르의 눈동자가 놀란 빛을 띠었다.
“이종족의 땅 말씀이십니까? 거긴 인간들의 출입을 불허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수십 년 동안 서부 국경을 지켜온 나이지만 단 한 번도 그곳에 발을 들일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네. 한데 웬걸. 이종족들이 먼저 나서서 자신들의 땅을 방문해 주기를 요청하지 않겠는가?”
발타자르가 흥미를 보이자 빌 헬름이 들뜬 기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무슨 꿍꿍인가 싶었지. 하도 의심스러워서 거절할까 생각하기도 했었네만 최근 서부에 일어나고 있는 기근의 원인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말에 냉큼 수락해 버렸지 뭔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기근의 원인이 바로 세계수 때문이더군.”
“세계수…… 말입니까?”
발타자르의 물음에 빌 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세계수에 웬 벌레가 기생하는 바람에 기근이 찾아온 것이었더군. 내 살아생전 그토록 기괴하게 생긴 벌레는 처음이었다네.”
빌 헬름은 아직도 그 벌레의 모습이 선명한 듯 이리저리 손짓을 해가며 이야기했다.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형의 벌레였는데 한시도 쉬지 않고 벌레들을 출산하더군. 출산이란 것이 원래는 한없이 경건한 것인데 그 벌레가 출산하는 모습은 말일세…….”
소름이 돋더군.
빌 헬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벌레를 무찌르기 위해 이종족의 마법사들이 수일 밤낮을 쉴 새 없이 마법을 퍼부었지만, 몸에 흠집 하나 나지 않더군. 그것뿐인 줄 아는가? 날이 지날수록 출산하는 벌레들의 힘은 강력해져만 가는데 세상에 뭐 이런 놈이 다 있을까 싶었어. 마스터 둘이 달라붙어 죽으라 칼질하고 나서야 겨우…….”
말하던 빌 헬름이 돌연 고개를 들고선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창문에서 멀어지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 도착했나 보군. 먼저 가 보겠네. 남은 이야기는 연회장에서 하세나.”
그것이 그날 나눈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 * *
“장군.”
가웨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그것이 한두 차례 더 이어지고 나서야 발타자르는 상념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옛날 일이 떠올라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네.”
“혹시 회귀 전의……?”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무슨 일인가?”
“아! 트리스탄 경이 도착했습니다.”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소란스러운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트리스탄과 그녀의 수하들이 복귀하고 있었다.
세계수로 향하는 최단거리를 물색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트리스탄이 돌아온 것이었다.
한데 그녀의 복장에 드문드문 녹색 액체가 묻어 있는 것이, 돌아오는 길에 한차례 전투를 치르고 온 듯했다.
“제국에 영광을!”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경례를 올린 그녀는 보고를 시작했다.
“말씀대로 세계수로 향하는 길에는 경비가 느슨한 편이었어요. 다만 세계수가 보이기 시작하는 곳부터는 벌레들로 득실거려서 살펴보지 못했어요. 최대한 가까이 가보려고 했는데 제가 데려간 병력으로는 무리더라고요.”
말하며 트리스탄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좀 더 싸우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이 뻔히 보여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네.”
발타자르가 그녀의 노고를 치하하곤 아그라베인을 불렀다.
“아그라베인. 자네에게 지시할 것이 있네.”
발타자르의 말에 아그라베인이 냉큼 그의 앞에 서더니 힘찬 경례와 함께 무엇이든 지시해 달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엇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자네에게 기병 2만을 주겠네. 본대가 떠난 직후 혹여나 이종족 연합과 대치하는 적의 군세가 세계수로 향하려 한다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게. 혹은 적의 군세를 향해 이동하는 생명체는 모조리 잡아 척살하게.”
사실 이런 임무는 아그라베인 보다는 트리스탄이 적격이었지만 그녀의 성향으로 볼 때 적이 나타나면 무조건 한판 붙고 볼 것이 뻔했기에 아그라베인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이동하면 되겠습니까?”
아그라베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그라베인이 재차 경례를 올리고는 기병들을 이끌고 떠나갔다.
아그라베인과 그가 이끄는 기병들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발타자르가 지휘관들을 소집하며 지시를 내렸다.
“진격 나팔을 울려라. 지금부터 세계수까지 직행한다.”
지시와 동시에 발타자르가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지휘관들이 발타자르를 향해 힘차게 경례를 올리곤 사방으로 흩어져 자신들이 맡은 병사들을 지휘하며 진군 준비를 서둘렀다.
뿌우우우우─
잠시 후.
나팔수들이 부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제국군이 일제히 진군을 개시했다.
* * *
하늘 높이 솟아오른 거목.
본래 푸른 잎사귀가 무성했던 이 거목은 현재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연분홍빛의 거대한 살점 덩어리로 뒤덮여 있었다.
이 기괴한 살덩어리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눈이 달려 있었는데 그 눈들은 쉴 새 없이 눈동자를 움직이며 사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온다.]
돌연 하늘에서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이 살점 덩어리의 목소리였다.
서열 6위.
벌레들의 왕.
발레포르.
그가 다가오는 제국군의 움직임을 눈치채곤 노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감히 이 몸을 노리는 것인가!]
눈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곳은 제국군의 진격로였다.
[제국의 용이여, 오만하기 그지없구나.]
이제 조금.
앞으로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세계수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이 비참한 모습을 벗어나 본래의 모습을 형상화할 수 있을 터.
따라서 발레포르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가거라.]
발레포르의 명령에 마치 땅이 물결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벌레 무리가 거목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괴성을 내질렀다.
[가서 저 오만방자한 인간들의 살점을 가져오라!]
벌레들의 괴성이 더욱더 커져갔다.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는 것만 착각이 들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괴성.
[놈들의 살점으로 성대한 축제를 열리라.]
하늘과 땅을 검게 물들이며 수십만에 달하는 벌레 무리가 일제히 제국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