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45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선선히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타고 하늘을 헤엄치듯 날아다니는 새들.
한없이 평화로운 어느 날.
재앙이 찾아왔다.
꽈르르릉-
거친 폭음과 함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성벽 위에 배치되어 있던 수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변변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지휘관들이 정신을 차리고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다독이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무의미한 행동일 뿐이었다.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무너진 성벽의 파편을 타고 검은 물결이 밀려들었다.
그것에 휩쓸린 병사들이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져가고 지휘관들은 더 이상 이곳에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있을 리가.
언제까지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줄 것 같았던 성벽은 모조리 무너져 내렸고 그 빈자리에는 검은 물결로 가득했다.
“아아…… 세계수여!”
어느 한 엘프가 두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주변의 이종족들이 엘프가 그랬듯 목놓아 울부짖었다. 그들은 모두 세계수가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애원했다.
명백히 적의를 상실한 모습.
그럼에도 검은 물결은 일말의 자비도 없이 이들을 휩쓸었다.
그들이 애타게 바란 세계수의 구원은 없었고, 이들의 닿지 않는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조용히 사라져갔다.
* * *
선택지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라쿤타가 발타자르의 번견番犬을 자처하며 나서자 발타자르는 그에게서 군의 지휘권을 양도받아 2군으로 편성하였다.
이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최고 지휘관인 라쿤타가 자처하여 군의 지휘권을 이양하고 수인족의 수장인 호야가 발타자르를 지지하며 나서니 반대하는 자가 나올 리 없었다.
그렇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연합의 병사들을 흡수한 발타자르는 들레망 요새를 뒤로하고 군을 이동시켰다.
그라운드 제로의 여파로 들레망 요새 인근 일대는 생명체가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죽음의 대지로 변모한 상황이었다. 더 이상 전략적 가치가 전무해진 것이다.
“레프콘 요새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길잡이 역할을 맡은 적귀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만 이동한다면 대략 이틀에서 사흘 정도가 소요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답하며 발타자르가 힐끗 군의 라쿤타를 바라보았다.
약점이 잡힌 까닭인지 적귀에게 무슨 말을 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저…….”
적귀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인가?”
발타자르가 묻자 적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국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적귀의 질문에 발타자르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재밌는 질문이군. 그것이 어째서 궁금한 것인가?”
갑작스레 몸을 옥죄어 오는 기운.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힘겹게 압박감을 떨쳐낸 적귀가 입을 열었다.
“제국의 의도에 따라 향후 저희 오거들의 운명이 결정될 테니까요.”
말이 끝나는 순간.
몸을 옥죄어 오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서늘한 빛을 띠던 발타자르의 눈동자가 호기심을 머금었다.
“계속 말해보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의문일 뿐이었습니다. 어째서 제국의 군대가 우리 연합의 땅을 침범했는가. 혹시 연합을 정복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전례가 없었던 일도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인간보다 세계수를 잠식한 벌레 무리를 무찌르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그들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희 연합을 향해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고 방관하는 태도를 보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제국의 목적이 우리 연합이 아닌 저 벌레 무리가 아닐까 하는.”
적귀가 이 생각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제국군이 갑작스레 태도를 돌변하여 벌레 무리를 물리치고 라쿤타를 굴복시키면서부터였다.
만약 제국군이 연합을 노렸다면 연합이 수세에 몰렸을 때. 멸망의 문턱에 발을 들이밀기 직전까지 기다렸을 것이었다.
절박한 순간에 내미는 손길은 그 상대가 누가 되었건 간에 쉽게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제국군은 들레망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여태껏 그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았던 그들이 말이다.
“한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국이 벌레 무리가 목적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들이 어째서 저희를 도왔을까 하는.”
제국의 입장에서야 그들의 목적이 벌레 무리든 연합이든 서로 싸워 전력을 최대한 소모할 때까지 방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벌레 무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혹시 제국은 벌레들을 물리치는 한편 연합을 병탄하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적귀의 말이 끝나자 발타자르가 손가락으로 제 검집을 툭툭 두드렸다.
그가 생각에 빠질 때면 내비치는 버릇이었다.
‘제법 쓸 만하군.’
연합의 백성들을 제국의 신민으로 흡수시키려는 기존의 계획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멍청할수록 좋았다.
따라서 제법 싹이 보이는 이는 우선적으로 쳐내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향후 싹틀 불안의 씨앗을 근본부터 제거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탐이 나는 인재였다.
“만약 자네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면 다른 종족들보다 앞서 제국의 그늘로 들어가려 합니다.”
발타자르의 물음에 적귀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미리 예측하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연합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힐 터인데도?”
“물론입니다.”
적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연합은 엘프와 드워프들이 오랜 시간 권력을 틀어쥐고 집권하며 속이 곯을 대로 곯은 상황입니다. 종족 간의 평등을 위한다는 본래의 이념은 사라지고 특정 종족만을 위한 연합이 되어버렸습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드래고니안들이 조치를 취해보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능력보다는 종족을 우선시하는 풍습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무능한 이들이 지휘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세계수 탈환에 실패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순간 발타자르가 눈을 빛냈다.
이것은 발타자르도 알지 못했던 비사였다.
“물론 단순히 이런 이유로 결심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 정세로 볼 때 향후 연합의 운명은 제국의 손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벌레들의 공세를 막아내기에 급급한 연합. 반면 전력을 온존하고 있는 제국.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과입니다. 이만하면 답이 되었습니까?”
적귀의 말이 끝나자 발타자르는 결정할 수 있었다.
그를 품에 안기로.
불안의 씨앗이 될지도 모를 이였지만 그것을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알겠네. 이만 자리로 돌아가게.”
발타자르의 축객령에 적귀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이 한동안 발타자르의 눈동자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레프콘 요새.
전략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무척 중요한 거점이다.
전선을 공유하는 다른 두 요새의 경우 요새가 함락됐을 때 남은 요새에 적의 병력이 증가하는 부담을 안겨주는 것과 달리, 이곳은 곧장 후방의 요새들로 향하는 길을 내어주게 된다.
따라서 연합의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수해야 하는 요지였고 기간테스를 비롯하여 연합의 주요 전력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강력한 마법이 도배되다시피 새겨진 성벽과 그것을 지킬 수많은 병력.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벌레 무리라도 쉬이 넘볼 수 없는 전력이기에 단시일 내로는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연합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 이게 무슨…….”
라쿤타가 황망한 표정으로 레프콘 요새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레프콘 요새가 있던 터를 바라보았다.
드높게 치솟은 성벽은 오간 데 없고 무너져 내린 건물의 잔해만이 이곳에 요새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웜이로군.”
잠시 주변을 둘러본 발타자르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닫고는 중얼거렸다.
“웜이라니요?”
곁에서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가웨인이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발타자르가 폐허가 되어버린 레프콘 요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것이 웜들이 남긴 흔적이라네. 웜은 토지를 먹이 삼아 지면 아래를 돌아다니는 거대한 마충이라네.”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폐허로 시선을 옮겼다.
무너진 성벽의 잔해와 드문드문 보이는 혈흔.
그리고 폐허의 곳곳에 선명하게 보이는 거대한 구멍들.
재앙이 휩쓸고 간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저것이 웜이 남긴 흔적들이라네.”
웜은 발타자르의 회귀 전 제국군을 숱하게 괴롭혔던 녀석들이었다. 놈들은 몸통 길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고, 땅속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특성으로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성안으로 진입하는 땅굴을 만들어내는 데 주로 사용되곤 했다.
어떤 면에서는 마왕보다 위협적인 것이 바로 웜이었다.
“웜까지 동원했으니 웜에 대한 대비책이 없는 연합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걸세.”
마왕군 측에 웜이 등장하였으니 더 이상 성벽이 병사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따라서 연합이 어떠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면 서둘러 마왕군의 뒤를 쫓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웨인의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에는 그럴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군이 이동하는 속도보다 연합의 요새들이 함락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따라서 발타자르는 기존의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아니. 우리는 놈들과 반대 방향으로 이동한다.”
말하며 발타자르는 세계수가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현재 적의 전력은 연합을 상대하는 것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
그 말은 벌레 군주가 있는 세계수 인근은 상대적으로 무방비한 상태라는 것을 뜻했다.
물론 제국군을 견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겠지만 그 정도 수준으로는 결코 제국군을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설마…… 연합을 미끼로 삼으실 생각이십니까?”
가웨인이 묻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
물론 제국군의 도움이 없다면 연합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테지만 그것이 이 기회를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연합에게 아주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제국군의 진격 소식이 빌 헬름에게 전해지기까지 버틸 수만 있다면 목숨 정도는 부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버티지 못한다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겠지만, 그것은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적의 주력이 본진을 비운 데다 이목까지 엉뚱한 곳에 쏠려 있으니 응당 이 상황을 이용해야지 않겠는가.”
일명 빈집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