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44화
“꿀꺽.”
성벽 위에 서 있던 오거 하나가 마른 침을 삼켰다.
한순간에 증발해 버린 벌레 무리.
그리고 그들이 있던 자리를 대신하여 하얀 연기를 내뿜는 검은 늪이 되어버린 대지.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도저히 이 상황이 현실이라 믿어지지 않았다.
“이, 이봐! 물러나!”
멍하니 살풍경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돌연 동료 오거가 그를 향해 황급히 소리쳤다.
이에 정신을 차린 오거가 소리치는 동료를 향해 무어라 말을 건네려는데 갑작스레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다.
“크아아아악!”
오거가 땅바닥을 나뒹굴며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을 내질렀다.
한참을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던 오거는 이내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하더니 결국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변을 겪은 것은 비단 이 오거만이 아니었다.
“크어어억!”
“사, 살려줘어어어!”
“아파아아아!”
처절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비명이 성벽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한순간에 수백에 달하는 오거들이 바닥을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밀려오는 하얀 연기에 몸이 노출되었다는 점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기현상에 라쿤타는 이것이 인간들의 소행임을 직감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까득-
라쿤타는 이를 부서지라 갈아대며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북문 방면을 제외한 요새의 일대에서 연기가 쉼 없이 피어오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순간 라쿤타의 뇌리로 소름 끼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저 연기가 지속적으로 피어오르는 것이라면 주변 일대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대지로 변하게 될지도 몰랐다.
인간들이 이런 현상이 발생할 것이란 걸 몰랐을 리는 없을 테니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 분명했다.
“용서하지 않겠다!”
손에 쥔 쇠몽둥이로 바닥을 내려치며 라쿤타가 시선을 옮겨 제국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다이어 울프를 탄 기수들을 앞세워 느긋하게 다가오는 그 모습이 그의 망막에 맺혔다.
“오냐. 한번 해보자!”
라쿤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했다.
크와아앙- 하고 그의 음성이 메아리치며 들레망 요새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적귀. 병사들을 북문으로 소집해라.”
“인간들과 전쟁을 치르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라쿤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제국군을 응시했다. 그러자 적귀라 불린 붉은 피부의 오거가 끄응- 하고 신음성을 토해내며 그를 만류했다.
“지금 병사들의 상태로는 인간들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 저 죽음의 연기가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오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항복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라쿤타가 불같이 화를 내며 적귀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찰진 소리와 함께 적귀의 고개가 돌아갔다.
적귀가 입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말했다.
“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벌레들과의 싸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이종족 연합의 병사들이었다.
하물며 밀려드는 죽음의 연기로 인해 요새에 머물 수 있는 시간마저 한정되어 있으니 그들이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사실상 그들의 목숨은 제국군의 의향에 달렸다는 뜻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도망칠 곳이 있습니까? 아니면 저렇게나 지친 병사들로 저 대군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다! 가능하고말고! 나는 간악한 술수만 부릴 줄 아는 인간들 따위에게 우리 연합의 병사들이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고집을 부리는 라쿤타의 모습에 적귀가 그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대체 저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음을 강요하십니까! 군을 이끄는 지휘관이라면 응당 병사의 목숨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하극상을 벌이는 것이냐!”
“예! 그렇게라도 해서 병사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래야지요!”
“이, 이놈이!”
라쿤타가 번쩍 쇠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이에 맞서 적귀 역시 자신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두 오거가 당장에라도 일전을 치를 것만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흐르던 순간.
탓-
인영 하나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 오거들의 허리춤에나 올 법한 상대적으로 작은 키.
물결치듯 흔들리는 연보랏빛 머리칼.
“이곳의 지휘관이 누구인가.”
인간, 발타자르가 두 오거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 * *
“왜 말이 없는 것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도 두 오거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문 채 발타자르를 응시했다.
“없다면 가서 책임자라도 불러오게.”
재촉하듯 발타자르가 재차 말하자 적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십니까?”
“발타자르. 인간 측의 지휘관일세.”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라쿤타가 기습을 감행했다.
수백 년 된 거목도 일격에 쓰러뜨리는 라쿤타의 일격이 발타자르의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피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머리통이 깨져 버릴 상황.
팟-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볍게 내뻗은 두 손가락 만으로 라쿤타의 일격을 막아낸 발타자르가 쇠몽둥이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퍼엉-
라쿤타는 밀려드는 충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쇠몽둥이를 놓쳐 버렸다.
그의 손을 떠난 쇠몽둥이가 빠르게 회전하더니 이내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환영 인사치고는 제법 거칠군.”
발타자르는 피식 웃으며 라쿤타를 바라보았다.
순간 라쿤타는 발끈했지만 섵불리 나서지는 못했다.
방금 전의 한 수로 발타자르가 얼마나 강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인간과는 할 말이 없으니 물러가라.”
라쿤타가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적귀가 재빨리 나서며 말했다.
“수장. 이야기라도 들어보시죠.”
“물러가라 하지 않았는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라쿤타의 행동에 발타자르가 품안에서 구슬 하나를 툭 내던졌다.
그러자 구슬이 빛을 내뿜으며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하얀 귀. 돌아가자. 수장들께서. 기다리신다.]
[싫어요! 인간들의 대장을 만날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네가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지. 죽여서라도 인간들에게 가지 못하게 하겠다!]
영상 속에는 발타자르의 등 뒤에 숨은 호야와 그런 호야를 억지로 데려가려다 그것이 여의치 않자 살수를 마다치 않는 오거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이, 이건…….”
라쿤타가 경악한 눈빛으로 영상을 바라보았다.
적귀 역시 이 영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떨리는 눈동자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두 오거의 모습을 발타자르가 우습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영상 기록구는 이종족들에게는 생소한 물건일지 모르지만, 제도의 귀족들에게 필수적인 물품이었다.
언제 상대가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그에 대한 대비책이었으며, 동시에 상대를 협박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발타자르 역시 영상 기록구를 항상 품 안에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이렇게 라쿤타의 목에 목줄을 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대화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다른 이와 대화를 하는 수밖에.”
발타자르가 영상구를 집어 들며 품 안에 넣었다.
그러곤 당장에라도 떠날 것처럼 몸을 움직이자 적귀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히 물었다.
“이, 이게…… 사실입니까?”
적귀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라쿤타를 바라보았다.
“어떤가. 자네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가?”
라쿤타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분명 인간과 접촉하려는 호야를 잡아 오기 위해 보낸 수하들에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죽여서라도 접촉을 막으라고 지시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죽일 각오를 하고서라도 막으라는 뜻이었지 실제로 죽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멍청한 놈들이 정말로 죽이려고 들 줄이야!
‘이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 이런 짓을 벌이고도 내게 보고 하나 하지 않았단 말이지!’
멍청한 수하들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만약 이것을 다른 이종족들의 수장들이…….
아니, 당장 요새 안의 수인족들이 알게 된다면 파국이었다.
오거족의 용맹한 전사이자 위대한 수장으로 알려진 그는 오욕으로 점철된 미래를 맞이하게 되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것이 외부에 퍼지는 일은 막아야만 했다.
그러나 무력으로 어쩔 수 없는 상대이니 라쿤타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였다.
“……단 둘이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쿤타의 제안에 발타자르가 미소를 지으며 수락했다.
“그러지. 안내하게.”
* * *
아군의 진영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여 다수의 수하들과 함께 기습을 감행한다는 뻔한 술책은 벌이지 않았다.
실행한다고 해도 성공할 가능성은 낮고 위험성만 높다는 것을 직감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발타자르를 자신의 처소로 안내한 라쿤타는 둘만 남게 되자 애처로운 낯빛으로 말을 꺼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든 말만하게. 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네.”
라쿤타의 말에 발타자르가 방안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방안의 가구들은 하나같이 거대했다.
그렇게 잠시간 방안을 둘러보던 발타자르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두 다리를 꼬았다.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그, 그렇네.”
당장 간이든 쓸개든 원한다면 모두 내어줄 기색으로 라쿤타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것인가.”
발타자르의 말에 일순간 라쿤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뭐……?”
“간절한 쪽은 자네인데 왜 내가 자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느냔 말일세.”
이제는 숫제 팔짱까지 끼고선 바라보자 라쿤타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렸다.
‘무, 무엇을 제시해야 하지?’
라쿤타는 발타자르가 원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라쿤타는 자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것을 원할지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고 그것을 제안해 보기로 결심했다.
“자네가 평생 보지 못한 이종족의 미녀들을 자네에게 안겨주겠네.”
“기각.”
고민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재화를 모두 주겠네.”
“제안할 것이 그것뿐인가?”
한심하다는 눈빛이 라쿤타의 몸을 쿡쿡 찔러대었다.
성격 같아서는 당장 발타자르를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기습으로도 어쩌지 못한 상대였다. 화가 나도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러지 말고 원하는 것을 얘기해 주게. 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네.”
라쿤타가 고개를 숙여 가며 간청하자 발타자르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풀었다.
“어쩔 수 없지.”
발타자르의 입이 열리기가 무섭게 라쿤타는 그것이 구원이라도 된 마냥 안색이 환해졌다.
“딱 한 번만 말하겠네.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자네 선택일세. 알겠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라쿤타가 열렬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구슬만 파괴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모두 수용하리라.
그렇게 결심하며 라쿤타가 발타자르의 입이 열리기만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내 제안은 하나 뿐일세.”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라쿤타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 기대에 응하듯 발타자르가 말을 끝맺었다.
“내 개가 되게.”
그 말에 라쿤타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