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43화
“이게 수인족?”
트리스탄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호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려주세요!”
트리스탄에게 목덜미를 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호야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다리를 휘두르며 바둥바둥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트리스탄의 손을 뿌리칠 수 없자 결국 발타자르를 애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인간 아저씨! 도와주세요!”
호야의 부름에 지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던 발타자르가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에 트리스탄이 몸을 움찔거리더니 뾰로퉁한 표정으로 호야를 바라보았다.
“야! 너 치사하게 이러기야?”
“이잇! 그러니까 얼른 내려주세요!”
“싫은데? 싫은데?”
호야와 트리스탄이 투닥거리기 시작하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트리스탄. 그만 내려주게.”
“……네.”
트리스탄이 아쉽다는 듯이 호야를 내려주었다.
그러자 호야가 그녀를 향해 혓바닥을 삐죽 내밀고는 다시 붙잡힐세라 쪼르르 발타자르의 곁으로 도망쳤다.
트리스탄이 그런 호야를 약오른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지만 이어지는 발타자르의 시선에 더 이상 호야에게 장난치는 것을 포기하곤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는 사이 지휘관들이 속속 막사 안으로 들어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가 시작되었다.
안건은 제국군의 개입 시기였다.
“그냥 저들끼리 싸우게 내버려 두는 것이 낫지 않나요?”
의자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끼고 있던 레티시아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에 간다르바 또한 마찬가지로 손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 이후는? 벌레들만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이종족들이었네. 한데 빌 헬름 공작과 그의 군대까지 합세한 지금. 그들을 상대로 얼마나 전력을 깎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차라리 그보다는 이종족들과 연합하여 함께 마왕군을 몰아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세.”
“하지만 그 당사자들이 저희와 손잡을 생각이 없잖아요. 눈 앞에 동앗줄이 있음에도 외면하는 멍청한 놈들이에요. 그런 놈들과 손잡으려 시도하는 것은 괜히 쓸데없는 곳에 기력을 낭비하는 꼴이 아니겠어요?”
레티시아와 간다르바가 주축이 되어 지휘관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쪽은 이종족들을 도와주고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부류였고, 다른 한쪽은 이종족과 마왕군이 서로 전력을 소모할 때까지 방관하다 기회를 엿보아 기습전을 감행하자는 부류였다.
발타자르의 경우 본래 이종족들의 대처에 따라 이를 결정하려 했지만 호야의 등장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호야의 말에 따르면 드래고니안들은 인간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것 같고 수인족의 경우는 호야가 그들의 수장이니 끌어들이는 것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거기다 방금 전에 있었던 오거들의 돌발 행동 덕분에 오거들의 약점을 손에 쥐게 되었다.
사실상 이종족 연합의 주축이 되는 일곱 종족 중 세 종족은 확실하게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더해 한 종족만 더 끌어들일 수 있다면 다수결에 의해 총의를 결정하는 이종족 연합의 특성상 발타자르가 손에 쥐고 흔들기에 충분했다.
“수인족의 수장께 묻겠네.”
발타자르가 호야를 부르자 그때까지 멍하니 회의를 구경하던 호야가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그렇네. 수인족은 인간이 도와주기를 원하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호야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것은 드래고니안들 역시 마찬가지겠지?”
“네!”
호야의 대답에 발타자르가 지휘관들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이종족들이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발타자르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간파한 지휘관들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각하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회의장이 떠나가라 외치는 지휘관들의 모습에 호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치만 살피는 가운데 발타자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결정되었군.”
이것으로 제국군의 행보가 결정되었다.
* * *
이종족들을 지원하는 것이 결정되자 제국군은 날이 밝아 옴과 동시에 군을 일으켜 진군을 개시했다.
목적지는 인근에 위치한 이종족들의 요새.
들레망이었다.
* * *
발타자르는 자신과 함께 말을 타고 있는 호야를 바라보았다.
회의장에서 호야는 발타자르의 정체를 알게 되었음에도 놀라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 뒤로도 이것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호야의 모습에 발타자르가 말을 걸었다.
“놀라지 않는구나.”
“네? 뭐가요?”
“네가 찾던 사람이 나라는 것이 놀랍지 않더냐?”
발타자르의 물음에 호야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알고 있었는걸요.”
“알고 있었다고?”
“네! 그 많던 벌레를 그렇게 쉽게 쓰러뜨리는 인간이 장군이라고 부르면서 따르는 걸 보고 인간들의 대장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마냥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총명한 구석도 있었다.
“그런데 왜 말을 하지 않았니?”
발타자르의 물음에 일순간 호야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한 기색은 사라지고 무표정으로 돌변했다. 그러더니 상대방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심유한 눈동자로 발타자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무슨 의도인지 궁금했거든요.”
말하곤 다시 맑은 눈빛으로 생긋 웃었다.
“그런데 제 짐작대로 아저씨가 좋은 인간 같아서 안심했어요.”
호야의 말에 발타자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웃고 있는 호야를 바라볼 뿐이었다.
“좋은 인간이라…….”
* * *
“막아라! 놈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성벽 위에서 몰려드는 벌레 무리를 바라보며 오거들의 수장 라쿤타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벌레들의 공습이 시작된 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그동안 벌레들은 단 한시도 쉬지 않고 맹렬한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덕분에 병사들의 피로는 한계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수장! 그놈들이 또 밀려옵니다!”
경악에 찬 수하의 외침에 라쿤타가 황급히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바퀴벌레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제길! 궁수들과 마법사들에게 최대한 녀석들을 요격하라고 전해라!”
사실 바퀴벌레 자체는 크기만 할 뿐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위협은 저 바퀴벌레들이 죽으면서 뱉어내는 녹색 알들에 있었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산성액을 품고 있는 알들을 자그마치 수백, 수천 개를 뱉어냈다.
바퀴벌레 하나가 성벽 위에 올라와 사망하면 그 주변 일대가 발을 디딜 수 없는 산성 지대로 변해 버렸다.
그 때문에 벌레들과의 전투 도중 성벽이 함락될 뻔한 것이 수차례였다.
“젠장! 젠장!”
라쿤타가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애꿎은 성벽을 발로 차댔다.
피로에 지친 병사들과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벌레들의 공세.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이럴 때 지원이라도 온다면 조금 숨통이 트이련만 현재 전선 전체를 일제히 압박하는 벌레 무리로 인해 지원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퇴각해야 하는 건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요새를 포기하고 물러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전선을 공유하는 나머지 두 개 요새도 한 번에 무너질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될 경우 라쿤타가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차라리 다른 요새 중 한 곳이 함락된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면 퇴각할 명분이 생기는 것이니 이 무모한 수성전을 포기한다고 해도 라쿤타에게 책임을 물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수장! 지금 북쪽 성벽이 위험합니다!”
생각에 빠져 있던 라쿤타에게 수하 하나가 다급히 달려와 소리쳤다. 이에 라쿤타가 신경질적으로 수하를 밀쳐냈다.
“에잇! 알았으니 호들갑 떨지 마라! 내가 직접 그쪽으로 가겠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황에 참담함을 느끼며 북쪽 성벽을 향해 달려가려던 순간이었다.
라쿤타의 등 뒤로 수하의 밝은 외침이 들려왔다.
“인간! 인간들입니다!”
그 말에 라쿤타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어느샌가 등장한 인간의 군대가 벌레들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 * *
“징그러울 정도로 많네요.”
들레망 요새를 공략 중인 벌레들을 바라보며 트리스탄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수를 감히 헤아릴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들레망 요새 주변에는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벌레들로 득실거렸다.
아직 벌레 군주가 세계수를 완전히 침식하지 못해 개체 하나하나는 크게 위협적이지 못했지만 저만한 숫자를 상대로 대회전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간다르바. 준비는 되었는가?”
발타자르가 간다르바를 바라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다시 한번 생각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위력을 축소시켰다고는 하지만 타국의 영토에 그라운드 제로를 발동시키는 것은 향후 이종족들과의 관계에 있어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제국의 반역자에게만 내려지는 최악의 형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궁극의 마법.
마법이 구현된 일대가 향후 5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대지로 변모시키는 최악의 마법이었다.
본래는 4인의 아크 메이지가 모두 동원되어야 하는 마법이지만 현재 제국군 측에는 아크메이지가 둘뿐이기에 위력을 축소시키는 것으로 변형하여 간신히 발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간다르바는 그것을 타국의 영토에 발현시키는 것을 강렬히 반대했으나 발타자르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실시하게.”
아무리 설득해도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간다르바는 짙은 한숨을 내쉬더니 마법사들의 무리로 다가갔다.
“마법진을 발동한다.”
간다르바가 침중한 안색으로 지시를 내리자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대한 마법진이 검은빛을 토해내며 강렬한 기운을 사방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던 간다르바가 레티시아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준비가 되었으니 실시하세나.”
말하며, 간다르바가 마법진을 향해 손을 내뻗자 레티시아 역시 팔짱을 풀고선 마찬가지로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몸에서 빠른 속도로 마나가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충분한 마나를 흡수한 마법진이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과 함께 검은빛을 쏘아 보냈다.
꽈르르르릉─!
쏘아져 나간 빛은 하늘을 유유히 떠다니던 구름을 단박에 꿰뚫더니 수십 갈래로 찢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을 수십 조각으로 베어버린 것만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그 압도적인 광경을 이종족들도, 인간들도, 심지어 벌레들까지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이윽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검은 빛들이 일제히 낙하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진 검은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며 지면과 충돌했다.
* * *
그것으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