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42화
발타자르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터에 두 마리의 오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각기 붉고 푸른 피부가 인상적인 오거들은 발타자르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형, 어떡하지? 그냥 보내야 해?”
푸른 오거의 물음에 붉은 오거가 거칠게 콧김을 뿜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족장이 말했어. 수인의 어린 족장이 인간과 접촉하는 것은 반드시 막으라고.”
“그럼 지금 당장 쫓아갈까? 그런데 쫓아간다고 죽일 수 있을까? 그 인간들…… 무척 강해 보였는걸.”
가웨인이 벌레 무리들을 쓰러뜨리는 광경을 목격했던 푸른 오거는 그 광경을 떠올리며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쳤다.
사실 붉은 오거도 같은 광경을 보았기에 선뜻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족장의 명령은 절대적이야.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지. 설령…….”
일순간 붉은 오거의 눈동자에 스산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붉은 오거는 살기 어린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 * *
살랑거리는 꼬리.
쉴새 없이 쫑긋거리는 앙증맞은 두 귀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이리저리 둘러보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가웨인이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호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수인족의 왕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굳이 따지자면 그렇지.”
발타자르의 대답에 가웨인이 다시 한번 호야를 바라보았다.
아이린의 또래로 보이는 저 아이가 수인족의 왕이라니.
잘 믿기지 않는 데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수인족의 왕씩이나 되는 이가 호위 없이 홀로 숲속을 돌아다니다니.
아무리 벌레들과의 싸움으로 정신이 없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수인족의 왕이 호위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데요.”
“두 가지 상황 중 하나겠지. 벌레들의 공세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몰래 빠져나왔거나. 혹은 본래는 호위들과 함께 이동했지만, 이동 도중 호위들을 모두 잃었거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발타자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수인족 내부에서 벌어지는 것일지도 모를 테니까.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네. 저 아이는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것.”
길도 모르면서 혼자 앞서가는 호야가 일순간 뒤를 돌아보더니 발타자르와 눈이 마주쳤다.
돌연 아이가 해맑게 활짝 웃더니 쪼르르 발타자르에게 다가왔다.
“저기!”
호야가 발타자르의 바짓춤을 잡아당겼다.
“왜 그러니?”
발타자르가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묻자 호야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인간은 이름이 뭐예요?”
“알, 알이라고 한단다.”
발타자르의 말에 일순간 가웨인이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 모양으로 말을 걸었다.
‘어째서 거짓말을 하십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발타자르의 말대로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애칭이 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도 아니었으니 가웨인의 입장으로썬 괜히 어린아이를 속이는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호야.”
“왜요? 알?”
호야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이 발타자르를 빤히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참 웃음이 많은 아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발타자르가 말했다.
“인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왔다고 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냐?”
발타자르의 물음에 호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침울한 기색을 내비쳤다.
“벌레들이…….”
돌연 호야가 말을 하다 말고 발타자르의 다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그러고는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벌레들이 세계수님을 괴롭히기 시작한 이후로 용 아저씨들이 많이 아파요.”
“용?”
순간 발타자르는 아몬과의 대화가 떠올랐지만 이내 호야가 말하는 용 아저씨라는 이들이 드래고니안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드래고니안.
드래곤의 피를 이은 혼혈아들로 신체가 마나로 이루어져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일족이었다.
드래고니안은 태생부터 압도적인 마나 친화력을 보유하고 태어나기에 마나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강력한 종족에게도 한 가지 결함이 있었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있지도, 그렇다고 만들 수도 없는 종족이었다. 장기간 세계수의 곁을 떠날 경우 신체가 붕괴하며 사망에 이르는, 어찌 보면 저주에 가까운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네. 그래서 제가 대장 용 아저씨에게 물어봤어요. 아저씨들이 아픈 것이 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구요. 그러니까 대장 용 아저씨가 그랬어요. 세계수님을 구하면 아픈 것이 나을 거라구요. 그러려면 인간들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구요. 그래서 왔어요.”
말하는 호야의 눈빛은 무척이나 간절해 보였다.
“그치만…… 다른 어른들은 모두 반대하고 계세요. 다들 인간은 믿을 수 없대요.”
발타자르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쯤 되니 멸망의 기로에 서 있음에도 그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한 이종족이라도 사리분간을 못 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원래는 다들 인간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어요. 그치만 빌 헬름이라는 인간이 저희를 배신하고 벌레들의 편에 선 후로는 다들 인간을 무척이나 싫어하게 됐어요.”
뜻밖의 이름이 호야의 입에서 거론되었다.
그제야 의문이 해결되었다.
‘빌 헬름. 그자 때문이었구나.’
세계수를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빌 헬름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평소에도 이종족들과 꾸준한 교류가 있었다는 뜻이고 그만큼 그에 대한 믿음 또한 강했다는 뜻이 되었다.
한데 그런 빌 헬름이 벌레 군주의 편으로 돌아서 버렸으니 이종족들이 인간을 불신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원래는 어른들께 인간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런데 다들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말라면서 못 가게 말리시고 방안에 가둬두려고 하셔서…….”
호야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몰래 도망쳐 나왔어요.”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를 너무 해맑게 대답하는지라 발타자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썽꾸러기로구나.”
발타자르가 호야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호야가 그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렸다.
그때였다.
둘의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가웨인이 돌연 검을 뽑아 들었다.
“장군.”
가웨인보다 훨씬 앞서 추격해 오는 이들의 기척을 눈치채고 있던 발타자르가 지나쳐 온 길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거대한 체구의 오거 둘이 허공에서 뚝- 하고 떨어져 내리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하얀 귀. 돌아가자. 수장들께서. 기다리신다.”
모습을 드러낸 두 오거 중 붉은 오거가 호야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호야가 재빠르게 발타자르의 등 뒤로 모습을 감추더니 빽- 소리를 내질렀다.
“싫어요! 인간들의 대장을 만날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호야의 대답에 붉은 오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인간들은 믿을 수 없다. 너도 알 텐데?”
“빌 헬름이 배신했다고 다른 인간들까지 못 믿는 건 바보 같은 말이에요!”
“멍청한 소리! 그자가 배신했기 때문에 검은 발이 죽었다! 그런데도 인간을 믿는다고?”
붉은 오거의 말에 일순간 호야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 그래요!”
말하는 호야의 목소리는 몹시도 떨렸다.
발타자르는 이쯤에서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하고는 호야를 등 뒤로 감추고 붉은 오거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는 내가 추후 책임지고 잘 돌려보내 줄 테니 이만 물러가는 것이 어떻겠나?”
발타자르의 제안에도 붉은 오거는 대답하지 않고 호야를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네가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지. 이들을 죽여서라도 인간들에게 가지 못하게 하겠다!”
돌연 붉은 오거가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숲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 마리의 오거가 숲 속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간. 지금이라도 하얀 귀를 내어놓는다면 곱게 보내주마.”
붉은 오거의 경고에 발타자르는 말없이 호야를 안아 들었다.
그러곤 가웨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서 가능하겠지?”
발타자르의 물음에 가웨인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와주지 않으십니까?”
“보다시피 아이를 안고 있는지라 그건 힘들겠군.”
발타자르의 대답에 가웨인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뭐. 잠시 몸 푼다고 생각하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웨인의 모습이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붉은 오거와 푸른 오거가 반사적으로 나무를 뿌리째 뽑아 이리저리 사방으로 내던졌다.
“힘은 장사구나!”
가웨인이 날아드는 나무들을 가볍게 베어 넘기곤 순식간에 푸른 오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어?”
이에 당황한 푸른 오거의 몸이 경직된 순간.
퍼엉-
푸른 오거의 머리통이 가웨인의 검신에 후려 맞으며 나가떨어졌다.
그가 손속에 인정을 두었기에 망정이지 칼날로 베었다면 즉사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 이익! 쳐라!”
자신과 비슷한 실력을 지닌 푸른 오거가 허무하게 당해버리자 붉은 오거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이에 오거들이 일제히 가웨인을 향해 덤벼들었지만,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웨인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오거들을 쓰러뜨리며 붉은 오거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 무슨…….”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가웨인을 바라보는 붉은 오거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물들었다. 강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숫자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거늘!
“다, 다가오지 마!”
붉은 오거가 발악하듯 소리치자 가웨인이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싫은걸?”
“……뭐?”
가웨인의 몸이 재차 꺼지듯 사라졌다.
붉은 오거가 대항하듯 손에 쥔 나무를 이리저리 거칠게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가웨인을 막을 수 없었다.
휘둘러지던 나무가 수십, 수백 조각으로 토막 나더니 이내 가웨인의 검이 붉은 오거의 목에 맞닿았다.
“……꿀꺽.”
붉은 오거가 이마 위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긴장된 표정으로 가웨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붉은 오거의 모습에 가웨인이 피식-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어찌할까요? 죽일까요?”
가웨인의 말에 붉은 오거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발타자르는 힐끔 품안에 안긴 호야를 바라보았다.
가웨인의 무용에 넋이 나간 듯 초롱초롱한 두 눈망울로 가웨인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냥 보내주게.”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은 망설임 없이 검을 거두고는 발타자르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에 붉은 오거가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그런 붉은 오거에게 발타자르가 말했다.
“가서 전하게. 조만간 찾아가겠다고.”
그 말에 붉은 오거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