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41화
빌 헬름 공작의 행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장들을 잃은 이종족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져 갔다. 밀려드는 벌레 무리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퇴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종족들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서인지 아니면 제국군의 등장을 모른 척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빌 헬름의 시선은 퇴각하는 이종족 연합의 군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푸른 빛을 띠는 피부에 감정을 잃은 듯 표정 없는 얼굴.
한때 제국의 패권을 노리던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모습이었다.
“복수에 눈이 먼 것인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빌 헬름.”
말하며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제국군 진영 측에서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살라잔 후작 성에서 크게 무리한 세 마탑주들을 대신하여 합류한 레티시아와 간다르바가 주축이 되어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잠시 전황을 지켜보다 존재감을 드러낸 후 물러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락한 빌 헬름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이렇게 이국의 땅에서 만난 것도 인연이니 선물 하나 정도는 주어야겠지.”
들어 올렸던 발타자르의 손이 떨어져 내렸다.
피잉-
트리스탄이 쏘아 보낸 화살 두 발이 검은 발과 아이언 해머의 수급이 내걸린 창을 들고 다니던 기사 둘의 미간에 꽂혀 들었다.
그것을 신호 삼아 각양각색의 빛을 뿜어내며 수백, 수천 발의 마법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며 벌레 무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꽈아앙-
콰아앙-
거친 폭음과 함께 전장이 흙먼지로 뒤덮이자 발타자르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물러난다.”
그의 지시에 제국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철수를 시작했다.
* * *
제국군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흙먼지가 걷히며 전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방금 전의 습격으로 퇴각하는 이종족들을 추격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병력에도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물론 병력이야 시간만 주어진다면 금세 복구할 수 있지만, 손실에 비해 얻은 것이 너무 적었다.
“분명 제국군이었습니다.”
책사 슬로덴 클루앙이 전장을 둘러보는 빌 헬름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 역시도 빌 헬름과 마찬가지로 인간과는 거리가 먼 괴이한 모습이었는데 전체적으로 메뚜기를 닮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발타자르. 그놈이겠지.”
빌 헬름이 차가운 안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의 두 눈동자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마왕들의 대대적인 발호로 제국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종족의 땅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분명 벌레 군주를 치기 위해서일 겁니다.”
슬로덴의 말에 빌 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것 외에는 이 변방까지 발걸음을 옮길 이유가 없을 테니.”
한시도 쉬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슬로덴이 잠시 이종족들의 진영과 빌 헬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제안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전투로 이종족들은 한계까지 내몰렸으니 잠시 병력을 정비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슬로덴의 제안에 빌 헬름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대로 몰아쳐서 최대한 빠르게 이종족들을 끝장낸다.”
“하오나 그랬다가 자칫 제국군과 이종족들이 손을 잡기라도 한다면…….”
“그럴 일은 없네. 만약 발타자르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작 이종족들과 접촉하였을 걸세. 그랬다면 이번 전투에서 이리 쉽게 이기지 못했겠지. 놈은 승냥이처럼 이종족들과의 전투로 우리 측의 전력이 손실된 틈을 노리고 있을 걸세. 서부를 침공했을 당시 그랬듯이 말이야.”
빌 헬름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던 슬로덴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현 상황에선 한계까지 내몰린 이종족들을 몰아붙이기보다는 병력을 정비하든지 혹은 제국군에 대한 견제를 시행하는 것이 옳았다.
사실상 멸망이 확정된 이종족들 보다 제국군이 더 위협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빌 헬름의 결심이 확고해 보이니 그 뜻을 꺾을 도리가 없었다.
‘서부 전의 트라우마가 여전하시구나.’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빌 헬름 공작가의 전력이 이종족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기습적인 공습을 감행해 혈육보다 아끼던 두 의형제를 잃고 복수는커녕 변방으로 도망쳐야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심지어 복수를 위해 마왕에게 혼을 바치고 힘을 구걸하기까지 했으니…….
‘그래도 이대로 이종족들을 끝내는 것이 나쁘기만 한 선택은 아니지.’
어차피 쓸어버려야 할 것들이기도 하고 제국군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둔다면 이후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일어날 변수를 배제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도 마냥 방관하는 것은 하책이니 제국군 진영으로 벌레들을 투입하여 주기적으로 기습을 감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금방 보충되는 것들이기도 하고 습격이 계속되면 물질적인 피해는 크지 않겠지만 심적으로 크게 압박받지 않겠습니까?”
“그 건은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그리고…….”
말끝을 흐린 빌 헬름이 제국군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복수를 이룩하려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병사들을 불러 모으게. 복수의 때가 도래했음이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먼 변방으로 따라온 것도 모자라 인외人外의 길까지 함께한 충신들.
빌 헬름이 그들을 소집할 것을 지시했다.
* * *
시일이 지날수록 이종족들의 상황은 악화되어만 갔다.
압도적인 물량을 바탕으로 한시도 쉬지 않고 몰아치는 벌레들의 공세에 차례차례 전선이 무너지고 후퇴하기를 반복하니 그 말로는 뻔해 보였다.
“결국, 이자야도 함락되었나?”
정찰대의 보고를 받은 발타자르는 다리를 꼬고 앉아 테이블 위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종족들에게 남은 요새는 총 여섯 곳.
그중 세 곳이 같은 전선을 공유하니 이번 전선마저 무너져 내리면 남은 것은 멸망뿐이었다.
“여전히 이종족들에게서 아무런 접촉도 없었는가?”
정찰대 임무를 맡은 아그라베인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각하의 지시대로 최대한 그들의 눈에 띄는 동선으로 이동했습니다만 지켜보기만 할 뿐 일체의 접촉도 없었습니다.”
“그런가…….”
발타자르가 제 턱을 쓰다듬었다.
슬슬 이종족 측에서 접촉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여전히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내부적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인지, 벌레 무리의 공세를 막는 것에만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설마 이대로 고사孤死하는 멍청한 선택을 하지는 않겠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웨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모든 사안을 각 종족의 수장이 표결에 부쳐 결정하는 그들의 정치 특성과 종족들의 성향을 토대로 할 때 급박한 상황이라도 자존심을 지키기를 선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그 정도로 멍청한 이들이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았다.
결코, 먼저 손을 내밀 것 같지 않은 발타자르의 모습에 가웨인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그들이 현명한 판단을 했으면 좋겠네요.”
* * *
그날 밤.
오늘도 어김없이 벌레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기분 나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몰려드는 벌레 무리.
그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이어져온 습격이었기에 격퇴하는 것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놈들도 꾸준하네요.”
검신에 묻은 녹색 피를 흩뿌리며 가웨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심리적 압박을 노리는 것이겠지.”
“그런 것이라면 대실패로군요.”
말하며 가웨인이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는 바이칸들을 바라보았다.
전투가 삶 그 자체인 그들에게 꾸준한 벌레들의 습격은 삶의 활력소나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경비를 서는 것을 자청하며 누가 더 많이 죽이나를 두고 저들끼리 내기를 벌일 정도였다.
“그렇긴 하지.”
발타자르가 웃으며 말하는 순간.
어디선가 앳된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이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달려갔다.
* * *
소리가 들려온 곳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하얗고 작은 무언가가 벌레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척 보아도 수인족의 아이 같았다.
“가웨인.”
발타자르가 가웨인을 부르자 그가 지체 없이 검을 휘두르며 벌레들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따로 도와줄 것도 없이 가웨인만으로도 충분히 정리 가능해 보였기에 발타자르는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야.”
발타자르가 아이에게 말을 건네자 아이의 새하얀 귀가 쫑긋거렸다.
“이제 괜찮으니 고개를 들어보려무나.”
발타자르의 말에 그제야 아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더니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순간, 아이의 눈이 더없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이는 이내 발타자르를 향해 활짝 웃으며 쪼르르 달려왔다.
“인간! 인간 맞죠?”
“그렇다만.”
아이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아이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검은 발의 아들, 하얀 귀라고 해요. 친구들은 호야라고 부르니 그리 부르셔도 돼요.”
수인 꼬마.
아니, 호야가 말하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검은 발의 아들이라고?”
“네! 혹시 제 아버지를 아세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 호야의 모습에 발타자르가 눈을 빛냈다.
검은 발이라면 일전의 전투에서 사망한 수인족의 수장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눈앞의 아이는, 인간으로 치자면 수인족의 왕세자라는 뜻이었다.
아니, 검은 발이 사망했으니 이제는 엄연히 수인족의 왕이었다.
그런 이가 호위 하나 없이 나타났으니 현재 이종족에게 닥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아니란다.”
고개를 내저으며 발타자르는 호야를 빤히 바라보았다.
호야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능히 짐작되었다.
제국 측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다만 이것은 이종족의 의사가 아닌 호야 개인의 뜻이 분명했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군.’
수인족의 왕으로 추정되는 호야를 잘만 구슬릴 수만 있다면 자존심에 고사하는 것을 택할지도 모를 이종족의 여론을 크게 변화시킬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그건 그렇고 이곳은 이종족들의 진영에서 제법 떨어진 곳인데 수인족의 아이가 이 먼 곳까지는 무슨 일이더냐.”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음에도 발타자르는 모른 체하며 물었다.
이에 호야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들의 대장을 만나러 왔어요. 그분의 도움을 받으려고요.”
호야의 말에 발타자르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타자르가 묘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일단 이곳은 위험하니 함께 가자꾸나. 진영으로 안내해 주마.”
“정말요? 감사합니다!”
호야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발타자르의 손을 맞잡았다.
때마침 벌레들을 모두 해치우고 돌아온 가웨인이 호야와 손을 잡은 채 진영으로 돌아가는 발타자르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발타자르는 인간임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그의 뒤로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