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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140화 (140/183)

공작이 회귀함 140화

세계수를 잠식한 벌레 무리가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모든 전선이 너무나도 손쉽게 무너져 내렸고 연전연패를 반복하며 영토의 삼분지 일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패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패인은 적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벌레 무리는 그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기에 위협적인 것이다.

전술적인 움직임 없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놈들의 특성상 성을 끼고 수성에 돌입할 경우, 그 숫자가 얼마가 되던지 상관없이 손쉽게 막을 수 있을 것이란 게 현장 지휘관들의 판단이었다.

몇 차례의 세계수 탈환전에서 벌레 무리와 사투를 벌여온 이들의 판단이었으니, 집정관 베르그를 비롯해 연합의 원로들은 이 판단을 굳게 믿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게 웬걸.

벌레 무리는 이전과는 달리 각자의 특성에 맞게 병종을 구성하고 집단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며 연합의 군대를 압살했다.

이 급작스러운 변화에 연합의 수뇌부들은 벌레 무리의 지배자가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판단, 놈을 찾기 위해 무수히 많은 정찰대를 투입했다.

많은 이가 희생되었다.

벌레 무리를 뚫고 그들의 지배자를 찾는 일은 일견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결국 찾아내었다.

기대했던 지배자는 아니지만, 벌레 무리들을 지휘하는 자를.

“정말로 빌 헬름, 그 자였습니까?”

제국에서는 이종족 연합이라 알려진 7왕국 연합의 집정관 베르그는 어두운 낯빛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처음 벌레들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이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만 해도 마족을 인간으로 착각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 보고에서 그들의 면면이 세계수 탈환을 돕기 위해 참전했던 빌 헬름 공작가의 장교들과 흡사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의심이 들었다.

최근 보고에서도 전선에 빌 헬름 대공이 벌레들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증언들이 속출했다.

동시에 전장에 투입시켰던 정찰대에서도 그것을 확신하는 보고서를 올리자, 결국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크흠…….”

드워프들의 수장인 아이언 해머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연합에서 세계수 탈환전에 인간 측의 세력을 끌어들이기로 결정할 당시 빌 헬름 공작 가와의 교섭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다들 믿기 힘드신 것은 알겠지만 빌 헬름의 배신이 사실로 드러난 이상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리자드맨의 수장 카케르가 나서며 이야기하자 수인족의 수장 검은 발이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직접 전선으로 나가서 빌 헬름, 그 빌어먹을 배신자의 목을 가져오지.”

“아니, 내가 가겠네.”

아이언 해머가 테이블 위로 올라서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느끼는 배신감이 무척이나 큰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이유로 배신한 것인지 그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네.”

아이언 해머의 말에 검은 발이 그를 삐딱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봐, 난쟁이. 내가 먼저 나서겠다고 말했을 텐데?”

“애송이 놈아. 네가 끼어들 자리는 없느니라.”

“하! 보는 눈이 없어 뒤통수나 처맞은 노인네는 물러나시지?”

“뭐야! 발정 난 똥개 놈아! 한번 해보자는 거냐!”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각 종족의 수장 중에서도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둘이 대치하니 그럴 만도 했다.

이에 베르그가 나서며 둘을 진정시켰다.

“자자, 두 분 모두 진정하시고 이렇게 하시지요. 두 분이 함께 전선으로 향하시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두 분이 함께하신다면 적의 수가 얼마나 많던지 간에 빌 헬름을 잡아 오는 일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 * *

이종족의 영토에 진입한 토벌대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순탄하게 진군을 개시하고 있었다.

드넓은 초원을 지나 하늘 높이 솟아오른 나무들이 빽빽한 숲속에 들어설 때까지도 말이다.

평소라면 이종족 연합의 병사들이 나타나 앞을 막아섰겠지만 지금 그들은 벌레 무리와의 전쟁으로 인해 모든 이목이 그쪽으로 몰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이런 상황이 지속될 리는 없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간다면 아무리 정신없는 이종족들이라도 토벌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대응하려 들 것이었다.

“이종족들의 땅이라고 해서 무언가 다를 줄 알았는데,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네요.”

발타자르의 곁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트리스탄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에게 이런 평화로운 광경은 마음이 편안해진다기보다는 어딘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이 불편하기만 했다.

“대장, 정찰이라도 다녀오면 안 될까요?”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하게.”

그러자 트리스탄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지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저리 보내도 되겠습니까? 트리스탄 경 성격에 선제공격을 가해오면 그 자리에서 상대의 머리통에 화살을 꽂아버릴 텐데요.”

멀어져 가는 트리스탄을 바라보며 가웨인이 염려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발타자르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답했다.

“뭐,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발타자르의 대답에 순간 가웨인이 홱 하고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혹여 이참에 이종족들 역시 쓸어버릴 생각이십니까?”

“그럴 리가.”

“한데, 왜…….”

“왜 트리스탄을 보냈느냐고?”

자칫하다간 이종족들과 마찰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그녀를 보내준 이유는 단순했다.

애초에 벌레 군주를 처치하려는 것은 이종족들을 돕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종족들 역시 제국의 적일세.”

“하오나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들과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자칫 벌레 군주와 이종족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가웨인이 염려를 표하자 발타자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걸세.”

이종족들의 경우는 한시라도 빨리 세계수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멸망으로 치닫기에 다른 쪽으로 전력을 쏟아부을 여력은 없었다.

또한, 벌레 군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종족의 처리가 아닌 세계수의 잠식이기에, 굳이 제국군이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는 이상에야 굳이 상대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공공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니, 기왕이면 이종족들과 손을 잡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종족들은 대체로 고집이 세고 자부심이 강한 편일세. 이쪽에서 먼저 손을 내민다면 자신들의 상황에 상관없이 코웃음을 치며 거절할 걸세.”

하여 발타자르는 전선 코앞에 군을 주둔시키고 전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종족과 벌레 군주 모두 제국군이 참전하지 않는 이상에야 경계는 할지언정 견제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눈앞의 적이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결국 이종족들은 저들이 먼저 몸을 굽히고 제국군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시기를 놓친 이종족들은 결코 벌레 군주를 이길 수 없을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눈앞에 살길이 버젓이 존재한다면 그 콧대 높은 이종족들이라고 해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세계수를 잠식한 벌레 군주란 자가 그렇게나 강한 겁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가웨인이 묻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종족 연합이 전력을 다했다면, 아니, 하다못해 아이언 해머와 검은 발이 직접 나섰다면 이 지경까지도 오지 않았겠지. 하지만 벌레 군주가 힘을 대부분 회복한 지금에 와서는 이종족 연합 전체가 전력을 다해도 결코 이기지 못할 걸세.”

발타자르의 대답에 가웨인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벌레 군주를 토벌하기 위해 이 먼 이방의 땅까지 찾아왔음에도 이종족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벌레 군주를 토벌할 생각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벌레 군주가 이종족 연합을 멸망시킨 이후, 벌레 군주를 제국군의 힘만으로 상대하려 들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랬다면 굳이 군을 전선으로 이동시킬 것이 아니라, 양측에서 제국군을 식별하지 못하도록 몸을 숨기고 멀리서 전황을 지켜보기만 했을 테니까.

따라서 답은 하나였다.

“장군께서는…… 이종족 연합의 굴복을 받아내고 벌레 군주를 토벌하실 생각이시군요.”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태울 뿐이었다.

* * *

가웨인의 염려와는 달리 트리스탄이 이종족 연합과 마찰을 빚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재 이종족 연합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긴급한지를 알려주는 방증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숲을 벗어나 다시 초원지대로 접어든 토벌대는 이종족과 벌레 무리가 맞부딪치는 전장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대지를 검은빛으로 물들이는 벌레 대군과 성벽을 뛰쳐나온 이종족들의 군대가 대회전을 벌이고 있었다.

화력 면에서는 단연 이종족 측이 압도하고 있지만, 적의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전황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싸우기를 얼마간.

전투는 점점 난전으로 치닫고 점점 이종족 연합의 패색이 진해져 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이종족 연합 측에서 강수를 두었다.

작은 몸집과 대비되게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드워프와 검은 털이 인상적인 웨어 울프가 아군 진영을 뛰쳐나와 벌레 무리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아이언 해머와 검은 발이로군.”

담배를 태우며 전황을 지켜보던 발타자르는 드워프와 웨어 울프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차리곤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직접 움직이기는 했지만, 글쎄…….

이제 와서 분투한다고 한들 기울어진 전황을 뒤집기는 어려웠다.

“저런, 당했군요.”

곁에서 전장을 지켜보던 가웨인이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발타자르의 짐작은 현실이 되었다.

기세 좋게 두 수장이 나선 것은 좋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밀려드는 벌레 무리의 공세에도 압도적인 무위를 발휘하며 싸우던 두 수장은, 곧이어 나타난 일단의 무리에게 하나씩 쓰러지더니, 이내 목이 베여 창끝에 내걸렸다.

“하…….”

발타자르가 피우던 담배를 내던지곤 전장을 응시했다.

[아이언 해머와 검은 발이 죽었다!]

[또 누가 덤비겠는가!]

두 수장의 수급을 창끝에 내건 기사들을 대동하고 전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내.

발타자르는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제국군이 잘 아는 얼굴이었다.

“이종족의 땅에 몸을 숨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벌레 군주의 휘하로 들어갔을 줄이야.”

한때는 서부의 성군으로 인망이 자자했던 사내.

그러나 발타자르가 주도한 서부 전에서 혈육보다 아끼던 두 의형제를 잃고 복수를 다짐하며 이종족들의 땅으로 넘어갔던 서부의 선제후.

“빌 헬름.”

빌 헬름 공작이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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