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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138화 (138/183)

공작이 회귀함 138화

굵은 나무줄기가 얽히고설킨 독특한 외형의 성벽.

그 위로 녹색 천 옷에 활과 화살로 무장한 궁수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궁수들의 귀가 하나같이 길쭉하고 뾰족한 모양이었는데.

이들은 이종족 연합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종족, 숲의 정원사라 불리는 엘프들이었다.

“이제 숲도 얼마 남지 않았어.”

“세계수여…….”

성벽의 너머.

본래는 녹음으로 우거진 드넓은 수림樹林이 이제는 한 줌밖에 남지 않았다.

대부분의 초목들은 말라 비틀어져 죽음의 땅을 연상케 했다.

세계수를 잠식한 벌레 무리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얼핏 듣기로는 의회에서 워든을 포기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던데 그게 정말일까?”

워든은 현재 엘프들이 바라보고 있는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수림이었다. 본래는 엘프들의 주거지였으나 현재는 벌레 무리에 의해 빼앗긴 땅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지난번 원정이 실패했으니 이제부터는 세계수의 탈환보다는 남은 땅이라도 지키기 위한 투쟁이 되지 않겠어?”

동료 엘프의 대답에 질문을 건넸던 엘프가 탄식했다.

“맙소사…….”

워든은 단순히 엘프들의 주거지가 아니었다.

이 땅에 엘프가 탄생한 이래로 엘프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엘프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러한 워든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최악이라는 뜻이었다.

“지난번 인간 측에서 지원을 해주었을 때 어떻게든 결판을 냈어야 했어.”

엘프가 후회가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계수가 벌레 무리에게 잠식당하고 1차 탈환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의회에서는 인간 측의 세력을 끌어들이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드워프들과 교류하던 인간 측 세력이 있었는데 그 세력이 바로 빌 헬름 공작가였다.

드워프들의 수장인 아이언 해머가 직접 나서 협상을 시도했고 빌 헬름 공작가 측에서는 이종족 연합에게 큰 빚을 지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빌 헬름 공작가의 지원이 시작되고 이때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막상 지원이 시작되자 인간은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이 팽배하여 반대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의회에서는 기존에 투입하기로 예정했던 전력을 반으로 줄여 버렸고 이는 결국 세계수 탈환을 실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약.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빌 헬름 공작가에서 지원을 해주었을 때 전력을 다했다면 세계수를 탈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이고 때늦은 후회지만 말이다.

“……온다.”

엘프가 후회에 잠겨 있는 사이 동료 엘프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전방을 주시했다.

이에 정신을 차린 엘프가 수림 너머를 바라본 순간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수림 너머, 검게 물든 땅이 요동치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려가며 자세히 바라보자 그것은 땅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지평선을 가득 메울 정도의 벌레들.

그것이 요동치는 검은 땅의 정체였다.

* * *

아몬이 사망하면서 전투가 끝이 났다.

구시온은 사망했으며, 시트리는 한쪽 팔을 잃고 도주했다.

초월자들만의 싸움으로 끝이 난 전투였지만 토벌대 측에서도 제법 피해가 있었는데, 아몬의 등장 당시 사망한 병사만 수천이었으며, 마왕들과의 전투로 인해 서클하트Circle Heart에 무리가 온 세 마탑주들은 한동안 요양을 해야만 했다.

이는 발타자르가 계획한 일정에 작은 차질을 주었다.

세계수를 잠식한 벌레들의 군주와 그 휘하의 벌레 무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크 메이지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것은 작은 문제일 뿐이었다.

세 아크 메이지를 동원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대비책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레티시아를 불러야겠군.’

세 마탑주들을 후위로 돌리고 간다르바와 레티시아를 불러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난적이었던 아몬이 사라진 이상 남은 마왕들은 바이칸과 메디치 공작가의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견제가 가능할 테니까.

물론 바이칸 진영 쪽에 투입된 간다르바를 불러들인다면 전력의 공백이 있겠으나, 그 대체로 이번에 모집한 용사들을 투입하면 될 일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벌레 군주인가.’

놈만 해치운다면 서부의 안정을 꾀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부 대수림에 있는 불사왕을 상대할 때 이종족들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벌레 군주와 그 무리를 해치우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그 이후 이종족들의 지원을 얻어내는 것은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 될 것이었다.

‘이종족이라…….’

발타자르가 평가하는 이종족은 자존심만 높은 얼간이들이었다.

회귀 전 불사왕 토벌전 당시 놈들의 고집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인간은 믿을 수 없다며 제국군 측과 연계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그들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길들일 필요가 있겠어.’

이번에도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그들 멋대로 날뛰게 둘 생각은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원을 받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것이 발타자르의 생각이었다.

‘세계수 탈환에 실패했으니 우선 경계에 군을 지키고 상황을 주시해야겠군.’

벌레군주의 토벌은 시급을 다투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이종족들이 벌레 군주에 의해 생사의 기로에 설 때.

그들 스스로 몸을 숙이고 도움을 청할 때.

그때 벼락처럼 움직여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하는 것.

그것이 발타자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과였다.

‘이 기회에 이종족들을 제국의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제법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이종족들의 땅은 제국에서 볼 때 없는 땅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이종족들의 땅을 불모지로 만드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자신들의 터전을 잃은 이종족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스레 제국의 땅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길들이는 것이 한결 더 수월해지겠지.’

바이칸들이 그랬듯이 이종족들 역시 제국의 땅에 거주하며 그 문화에 서서히 잠식된다면 그들 또한 제국의 신실한 신민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제국 의회의 인가를 받아야겠군.’

이만한 문제는 발타자르 홀로 결정하기에는 정치적 위험 부담이 컸다.

그렇기에 제국 의회의 인가를 받아둘 필요가 있었다.

발타자르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았다.

빌 헬름 공작가를 점령하면서 노획한 것으로 서부의 지형 외에도 이종족들의 땅까지 상세히 나와 있는 것이었다.

‘이곳이 좋겠어.’

경계에 건설된 국경 요새들.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진 드넓은 초원.

대군이 일전을 치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특히나 마법사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함정을 깔아 둔다면 그곳은 벌레 군주의 무덤이 될 것이 자명했다.

준비를 끝낸 마법사들은 그야말로 전장의 신 그 자체였으니.

“게 누구 없느냐.”

결정을 내린 발타자르가 제도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막사 앞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를 불렀다.

* * *

“황태자 전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야심한 시각.

아르세우스의 부름에 황궁으로 입궁한 슈텔리앙 후작이 아르세우스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 후작. 왔는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아르세우스는 슈텔리앙 후작의 방문에 보고 있던 서류를 들고선 티 테이블로 향했다.

“자자. 앉게.”

아르세우스가 자리를 권하며 앉자 슈텔리앙 후작 역시 아르세우스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늦은 시각에 불러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입니까?”

슈텔리앙 후작의 물음에 아르세우스가 손에 쥔 서류를 건넸다.

“전하. 이것은……?”

“보다시피 숙부께서 보낸 것일세.”

“으음…….”

아르세우스의 대답에 슈텔리앙 후작이 서둘러 서류를 살펴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약혼식이라…….”

서류에는 발타자르 공작과 칼 프란츠 대공의 여식의 약혼식을 황궁에서 진행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리 직접 움직이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숙부께서 발타자르 공작을 탐내시는 듯하네.”

“마냥 좋게 볼 수만은 없는 일이군요.”

발타자르 가에 안주인이 생긴다는 것은 분명 축하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 주인공이 칼 프란츠 대공의 여식이기에 그럴 수만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형식적인 약혼이었던 것을 공론화시려는 속셈이로군요.”

이 약혼에 대해서는 발타자르가 미리 언질을 주었기에 두 사람 모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이것은 중앙에서 마왕 토벌전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한,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약혼이었다.

한데 황궁에서 약혼식을 진행하겠다는 것은 이 약혼을 기정사실로 만들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우습게도 이 서신이 도착한 날 중남부 방면의 마왕과 대치하던 대공 가의 병력이 인근 요새로 철수했다고 하더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마왕의 토벌에서 발을 빼겠다는 뜻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그래서 마냥 이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다네.”

현재 중앙의 모든 전력은 서부로 향해 있었다.

제도의 수비에는 문제가 없지만, 중부 지역의 다른 영지들이 문제였다.

칼 프란츠 대공의 도움이 없다면 중남부 지방에서 마왕들이 날뛰는 것을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곤란하군요.”

“그래. 곤란하지.”

요구를 거절하자니 중남부 지방의 영지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고 요구를 수락하자니 발타자르 가와 칼 프란츠 대공가가 혈연관계를 황실에서 부추기는 꼴이 되었다.

만에 하나 칼 프란츠 대공의 의도대로 이 약혼이 진행된다면 대공 측에 손을 내미는 귀족들이 속출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 건은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될 문제 같습니다. 우선 발타자르 공작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그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슈텔리앙 후작의 말에 아르세우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각.

발타자르는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하기 위해 막사를 나서려 하고 있었다.

한데 때마침 가웨인이 발타자르의 막사를 찾아왔다.

“장군.”

“가웨인?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발타자르가 묻자 가웨인이 손에 쥔 와인 병을 흔들어 보였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 모습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어 보였다.

산책 대신 가웨인과 술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그리 생각한 발타자르가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지. 앉게.”

발타자르가 자리를 권하자 가웨인이 빈자리에 앉으며 가져온 잔에 와인을 따랐다.

잔이 붉은빛으로 물들자 가웨인이 잔을 건넸다.

“이제 경계 너머로 향하실 생각이십니까?”

가웨인이 묻자 그에게서 잔을 건네받던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본래 목적이 그것이었으니 말일세.”

발타자르의 대답에 가웨인이 발타자르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난번에 못다 한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야기였다.

발타자르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나는. 회귀를 경험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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