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36화
[어리석은 것들.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아몬이 토벌대를 굽어보며 말했다.
병사들은 그 거대한 존재의 모습에 몸을 떨었다.
단언컨대 그들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지의 존재였다.
그것이 주는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저게 마왕인가…….”
대지의 마탑주 브락서스 아브라함이 아몬을 바라보며 신음을 토해냈다.
젊었을 적 대륙 전역을 떠돌아다녔던 브락서스도 저렇게나 거대하고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는 처음이었다.
“우리가 마왕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구나.”
그동안 마왕과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기에 너무 마왕을 무시했던 것이 실책이었다.
단순히 느껴지는 힘만으로도 이 자리에 모인 마스터와 아크메이지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아몬 하나만으로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구시온과 시트리가 뒤이어 모습을 드러내자 브락서스의 뇌리로 ‘몰살’이라는 한 단어가 떠올랐다.
분명 수적 우위는 토벌대에 있었으나 초월자들의 싸움은 단순히 숫자 싸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브락서스가 판단하기로 이 싸움은 물러서야 함이 옳았다.
그러나 마왕들이 그것을 마냥 지켜보지만은 않을 터.
‘불확실한 승부수를 띄우느냐. 아니면 병사들의 희생으로 후일을 도모하느냐.’
고민은 깊었지만 결정은 빨랐다.
이 자리에 모인 전력은 제국의 전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것을 허무하게 잃게 된다면 이후 제국은 마왕들을 막아낼 수 없으리라.
‘최소한 고위 전력들이라도 최대한 온존하게 피신시켜야 한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기에 빠르게 결정을 내린 브락서스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허공에서 새파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브락서스의 전언을 품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다른 마탑주들 역시도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브락서스의 전언 마법이 도착하자마자 그의 부름에 응하며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 * *
파앗- 파앗-
브락서스의 주변으로 전이 마법이 발동되며 환한 빛무리와 함께 물의 마탑주 메디슨 로웰과 바람의 마탑주 데일리 존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상황이 긴박하니 긴말 않겠소. 최소 두 분이 이곳에 남아 저 마왕들을 막아야 할 것 같소이다.”
브락서스의 말에 두 마탑주가 신음성을 토해내었다.
그의 말은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 삼아 시간을 벌자는 이야기였으니 쉬이 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두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브락서스가 말했다.
“이 제안을 꺼낸 것이 저이니 한 자리는 제가 맡겠소이다. 남은 한 자리는 어느 분이 맡으시겠소?”
브락서스가 선뜻 자신이 남을 것을 선언하며 묻자 메디슨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남지요. 마법의 상성으로는 바람보단 물이 나을 테니 말입니다. 대지의 마탑주님과 제가 합공한다면 충분한 시간을 벌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메디슨의 말에 데일리는 안도감과 미안함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최대한 많은 이들을 살려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데일리의 말에 브락서스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부탁드리겠소. 특히 발타자르 공작은 반드시 몸을 피할 수 있도록 해야 하오. 그를 이곳에서 잃었다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찾아올 것이오.”
“물론입니다.”
그렇게 세 마탑주가 결정을 내린 그때.
토벌대의 총사령관.
발타자르가 말을 몰아 마법사들이 펼친 보호막을 벗어나고 있었다.
* * *
아몬.
오만하고 오만한.
그러나 마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강력한 힘을 가진 몇 안 되는 존재.
오직 마왕만이 지고한 존재라는 그의 사상에 매료된 수많은 마왕이 서열과 관계없이 그의 휘하로 들어가기를 자처하였으며, 그렇게 모인 마왕들로 최대 파벌의 자리에 오른 강경파의 수장.
회귀 전의 그는 제국, 용사, 이종족, 이 세 세력의 힘을 모두 합치고 난 후에야 물리칠 수 있었던 강력한 적이었다.
당시에는 이종족들이 빌 헬름 공작의 도움을 받아 벌레 군주를 물리치고 세계수를 탈환할 수 있었기에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발타자르가 주도한 서부 침공으로 인해 빌 헬름 공작가는 세계수 탈환에 대대적인 지원을 하기가 어려웠고, 이는 결국 세계수 탈환 실패를 불러왔다.
또한, 용사들은 토벌대에 참전했다고는 하나 제국 내전이 발발하지 않은 탓에 힘을 모두 회복하지 못하여 큰 전력이 되지 못하는 상황.
따라서 제국의 힘만으로 아몬을 물리쳐야만 했고 이는 무모함에 가까운 일이었다.
발타자르가 크라운 하트를 얻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푸르르-
푸른 장막을 벗어나 새까맣게 그을린 대지 위로 발을 들인 전마가 목을 옥죄어 오는 열기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발타자르가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마나를 불어넣자 언제 숨이 막혀 왔냐는 듯이 안정된 호흡과 함께 거침없이 아몬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아몬이 그런 발타자르를 내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네 녀석이 발타자르더냐?]
아몬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말을 멈춰 세우더니 아몬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그렇네만.”
발타자르의 대답에 아몬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동시에 주변에 내리깔린 열기가 더욱 강렬해졌다.
[아랫것들을 몇 쓰러뜨렸다고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아몬의 성난 외침에 땅과 하늘이 뒤흔들렸다.
그럼에도 발타자르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선 조용히 비비안을 불렀다.
“비비안.”
그의 부름에 허공에서 기포가 생겨나더니 이내 비비안이 모습을 드러내며 발타자르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불렀어요? 어머, 여기는 왜 이렇게 뜨겁담.”
작은 투정과 함께 비비안이 손을 내젓자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대가 뿌연 수증기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정령?]
아몬은 수증기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비비안을 빤히 응시했다.
[최소 최상급, 아니, 정령왕이로구나. 하나, 보좌하는 이가 없으니 전대의 정령왕이겠군.]
단박에 비비안의 실체를 꿰뚫어 본 아몬이 허리를 굽혔다.
다가온 아몬을 바라보며 비비안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으로 물의 창이 생성되더니 아몬의 눈동자를 향해 겨누어졌다.
“미안하지만 얼굴 좀 치워주시겠어요? 너무 부담스럽네요.”
그녀의 경고에도 아몬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를 흘겨보기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비비안과 발타자르를 번갈아 바라보던 아몬이 돌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 그렇구나! 오러 하트의 소유자가 분명한데 정령왕과의 계약까지 맺은 것이 이상하다 싶었더니…….]
아몬은 웃음을 뚝 그치곤 번뜩이는 안광으로 발타자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네놈. 용의 일족이었구나.]
아몬이 굽혔던 허리를 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용의 일족?”
발타자르가 되물었지만, 아몬은 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두 주먹을 쿵 하고 맞부딪쳤다.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 몸을 쓰러뜨려 보거라. 그대가 용의 일족인 만큼 전력을 다해 상대해 줄 터이니.]
아몬의 몸을 뒤덮은 화염이 크기를 불려 나갔다.
비비안의 힘으로도 억누르지 못할 열기가 일대에 짙게 내리깔렸다.
[그대는 충분히 그러할 자격이 있음이니라.]
동시에, 아몬의 거대한 주먹이 발타자르를 향해 휘둘러졌다.
* * *
신화 속의 전투가 이러할까?
격돌하는 것만으로도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갈라졌다.
주변엔 연신 충격파가 휘몰아쳤고, 양측 진영 모두 그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감히 두 존재의 싸움에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은 탓이었다.
“계획을…… 변경해야겠구려.”
목숨을 걸고서라도 퇴각을 하려 했던 브락서스가 신중한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았다.
토벌대의 모든 전력을 동원한다 하여도 쓰러뜨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아몬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한 줄기 희망이 엿보였다.
“저 싸움에 끼어드실 생각이십니까?”
메디슨이 묻자 브락서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끼어든들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되려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렇다면 지켜만 보실 생각이십니까?”
브락서스가 재차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다른 이들이 저 싸움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
브락서스의 눈동자가 살라잔 후작 성 위에 떠오른 두 마왕을 주시했다.
* * *
쿠구구궁-
몰아치는 화염의 파도.
그것을 향해 발타자르의 오러 블레이드가 휘둘러졌다.
단숨에 불의 파도가 갈라지며 대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강하군.’
아몬의 일격을 쳐낸 발타자르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옅게 떨리는 손.
이것만으로도 아몬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하지 못할 정도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비비안. 부탁하네.”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비비안이 허공에 물웅덩이를 만들어내었다.
그것으로 아몬의 머리까지 도달할 길이 만들어졌다.
투웅- 투웅-
물웅덩이를 발판 삼아 발타자르가 허공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뛰어오른 그가 순식간에 아몬의 머리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날렵하군.]
아몬이 주먹을 내지르자 대기가 비명을 내질렀다.
화염에 휘감긴 그의 주먹이 다가오자 발타자르가 다시 한번 도약했다.
탓-
그것으로 아몬의 주먹을 피해낸 발타자르가 그의 팔을 따라 재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몬의 팔을 휘감고 있는 불길이 그런 발타자르를 집어삼킬 듯 요동쳤지만, 그것만으로는 발타자르의 질주를 막을 수 없었다.
“받아라.”
검이 아몬의 머리통을 베어버릴 기세로 휘둘러졌다.
터엉-
일격에 적중당한 아몬의 머리가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아몬이 천천히 제 턱을 쓰다듬더니 즐겁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고작 이 정도로는 이 몸에 어떠한 상처도 낼 수 없음이니라!]
말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강렬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오러를 이용해 몸을 보호하던 발타자르는 이것만으로는 저 열기를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곤 재빠르게 아몬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알!”
떨어져 내리는 발타자르의 몸을 비비안이 재빠르게 안아 들며 아몬과 거리를 벌렸다.
그 순간.
발타자르의 몸을 짓이겨 버릴 듯 아몬의 두 주먹이 휘둘러졌다.
쿠웅-
간발의 차이로 아몬의 일격을 피해냈지만, 그 충격파에 휘말려 지면을 향해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추격하듯 화염의 창들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지면에 충돌하거나 화염의 창에 적중당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만 같았다. 그도 아니면 둘 모두이거나.
추락하는 속도를 멈출 수가 없으니 차선책으로 쏟아지는 화염의 창들이라도 막아보겠다는 일념 아래 비비안이 푸른 빛을 뿜어냈다. 순식간에 물의 장막이 그녀와 발타자르의 몸을 감쌌다.
쿠웅-
지면과 충돌하며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화염의 창들이 발타자르와 비비안이 추락한 곳을 향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과과광-
흙먼지와 수증기가 주변 일대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아무런 기운도 감지되지 않자 아몬이 흥이 식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기대를 한 것인가? 용의 일족이 고작 이 정도로 쓰러지다니…….]
실망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아몬이 두 주먹을 맞잡으며 들어 올렸다.
[그대가 이 땅에 존재했다는 흔적을 지워주마. 이것이 용의 일족에게 보낼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니라.]
맞잡은 두 주먹이 발타자르가 추락했던 곳을 내려치려던 순간이었다.
수증기 속에서 발타자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순식간에 아몬의 머리 바로 옆에 도달한 발타자르.
그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아몬의 두 눈동자가 환희로 물들었다. 발타자르의 어깨가 뒤로 당겨지며 검신을 타고 오러 블레이드가 폭풍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한번 막아보게나.”
검이 아몬의 관자놀이를 노리고 찔러졌다.
동시에 붉은 폭풍이 아몬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콰앙-
일격에 적중당한 아몬의 거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더니 이내 대지 위에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