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34화
“조반니 메디치는 황명을 받들라.”
메디치가의 진영에 제도의 사자가 찾아왔다.
그들이 독단적으로 벌인 서부 탈환전을 중앙에서 정식으로 승인함과 동시에 그들을 제2 토벌대로 인정한다는 공문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서부 탈환전은 이대로라면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조반니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메디치가에서도 가문의 사활을 걸고 뛰어든 일이었다.
여차하면 중앙과의 마찰까지도 감수할 생각이던 그들에게 중앙의 이러한 결정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메디치 공작가의 조반니가 황명을 받듭니다.”
힘찬 외침과 함께 조반니가 제도의 사자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제도의 사자가 교지를 펼쳐 보였다.
“이 제국은 실로 위태롭기만 하도다. 이러한 시국에 의기를 내세우며 제국의 안녕을 위해 이바지하는 메디치가의 공로를 높게 치하하고자, 메디치가의 적법한 계승자, 조반니 메디치를 제2 토벌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사자의 말에 조반니가 두 눈을 빛냈다.
분명 사자는 조반니 자신을 메디치 가의 적법한 계승자라고 말하였다.
이는 곧 제도의 총의가 보르네오가 아닌 조반니에게 향하고 있음을 뜻했다.
‘되었다. 이것으로 보르네오의 파벌도 더는 훼방을 놓지 못하리라.’
서부 탈환전은 가문의 사활을 건 전쟁인 만큼 가문의 총력을 집결해야만 했다. 한데 이번 전쟁을 반대하는 보르네오와 그 일파들이 사사건건 훼방을 놓고 있으니 온전히 전쟁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도의 이러한 결정은 더 이상 보르네오가 수작질을 부리지 못하게 됨을 뜻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중앙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꼴이 될 테니까.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중앙에서 조반니의 손을 들어준 이유였다.
단순히 중앙 정계의 요직에 앉아 있는 메디치가의 인맥들이 손을 쓴 것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사실상 허수아비들일 뿐이니까.
‘정황을 보면 이 상황을 주도할 만한 인물은 발타자르 공작뿐인데…….’
하지만 발타자르는 지방의 힘이 세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주도한 일이라고 하기는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혹시 본가와 마왕들이 공멸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이렇다 할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조반니의 이러한 고민은 의외로 제도의 사자가 풀어주었다.
“황태자 전하께옵선 발타자르 공작의 위세가 여기서 더 커지는 것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물론 발타자르 공작께선 한 치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충신임이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신하가 군주보다 큰 권력을 가지는 것은 통치자로서 경계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사자의 말에 조반니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께선 내가 발타자르 공작을 견제하길 바라신다. 이 말인가?”
조반니의 물음에 사자가 작게 웃어 보였다.
“그분의 깊은 뜻을 제가 알 도리야 있겠습니까? 다만.”
“다만?”
“이것으로 전 대신들의 역모 사건 때의 빚을 갚았다고 전해달라 하시더군요. 또한, 앞으로 탈환할 서부 영지는 메디치가의 것이 될 것이란 말씀도요.”
말하며 사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조반니는 그제야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황태자가 슬슬 발타자르 공작과 결별할 준비를 하는 것이로구나!’
역모 사건 때의 빚이라 함은 대신들이 아닌 황태자의 손을 들어준 것을 말하는 게 분명했고 그 말인즉 이번 일을 주도한 것은 발타자르 공작이 아닌 황태자라는 뜻이었다.
탈환할 서부 영지의 통치권을 메디치가에 부여한다는 것은 힘을 키워 발타자르 공작을 견제하라는 뜻이 분명했다.
고민이 해결된 조반니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황실의 뜻을 받들어 반드시 마왕들을 몰아내고 서부를 제국의 품으로 돌려놓겠나이다.”
조반니는 확신했다.
운명의 흐름이.
자신을 향해 흐르고 있다는 것을.
* * *
“장군! 메디치 공작가가 대치 상황을 깨고 대대적인 공습을 개시했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제도에서 온 전보를 전해 들은 가웨인이 황급히 발타자르의 막사를 방문했다.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눈을 빛냈다.
교지가 내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인데 바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메디치 공작가에서도 어지간히 안달이 난 것이 분명했다.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그 콧대 높은 메디치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겠지.’
보르네오가 마왕과 밀약 관계를 맺은 일이 결정적이었다.
메디치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마왕 토벌에 임하도록 만든 후.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보르네오의 죄목을 들먹이며 그들을 압박한다면 그들의 의사야 어찌 되었건 프리드리히 공작가에 이어 메디치 공작가 또한 제국을 위하는 충신으로 변모할 것이다.
‘관건은 이번 전쟁의 승패가 결정짓겠군.’
이번 전쟁을 승리로 끝맺는다면.
이 제국은 강력한 통치자의 지휘 아래 하나로 단결하리라.
흡족한 마음에 발타자르가 미소를 짓자 그것을 지켜보던 가웨인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마침 바이칸들도 서부 접경지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으니 저희도 함께 움직여야지 않겠습니까?”
“아닐세. 조금 더 기다려야 하네.”
“어째서 그렇습니까? 움직이기에는 지금이 적기 아닙니까?”
가웨인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전략적인 판단으로 볼 때 다른 군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동시에 적을 압박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제물 삼아 마왕들의 전력을 깎아내려는 의도가 아니 고서야 발타자르의 이러한 대답은 가웨인에게 의아함만 줄 뿐이었다.
“토벌대의 목적이 서부에서 마왕들을 축출해 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세. 따라서 우리는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야 하고 메디치 공작가와 로키가 마왕들의 시선을 최대한 잡아끌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네.”
이번 토벌전의 목적이 서부의 마왕들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니.
가웨인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 목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종족들의 땅에 강림한 마왕일세.”
세계수를 좀먹고 있을 벌레들의 왕.
놈이 바로 이번 전쟁의 진짜 목표였다.
“장군의 말씀대로 이종족들의 영토에 마왕이 등장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문제가 아닙니까?”
가웨인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물었다.
그의 심정도 이해는 되었다.
한창 제국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뜬금없이 타국 땅에 등장한 마왕을 처치하겠다니.
그 의도가 어찌 되었건 세간의 시선은 이것을 고운 눈초리로 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현시점에서 제국의 안위에 가장 위협이 될 존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네.”
“전 장군의 뜻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설령 장군의 말씀이 사실이라고 해도 마왕 한둘 정도는 그들의 저력으로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지 않습니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랬겠지.”
“이종족 연합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세계수는 마왕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다네.”
“세계수가 말입니까?”
세계수라면 가웨인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세상이 끝이라 불리는 이종족들의 땅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거대한 신목神木.
존재만으로 땅에 비옥한 축복을 내리는 성스러운 나무.
그런 만큼 이종족들의 철저한 보호를 받는 것이 바로 세계수였다.
한데 그런 세계수가 마왕에게 침식당했다는 것은 그 강력한 힘을 지닌 이종족 연합이 손도 써보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을 뜻했다.
“이종족들은 분명 하나하나가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지만 그 힘의 근간은 세계수에게서 나오는 것일세. 제국에 위협이 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들의 땅에만 머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건…….”
가웨인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제국의 전성기.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던 제국의 대침공을 견뎌낸 것이 바로 이종족 연합이었다.
기상천외한 병기들과 강력한 마법사 전력.
제국에는 보기 드문 정령사들의 존재까지.
대륙의 패자인 제국이라고 해도 쉬이 볼 수 없는 힘을 지닌 그들이 저들의 땅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가웨인이 답하지 못하고 있자 발타자르가 대신 답을 내주었다.
“그들이 평화를 사랑해서? 아니면 분쟁을 싫어해서? 아닐세. 세계수에게서 일정 범위 이상 떨어지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일세. 그 세계수가 마왕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지금쯤 이종족 연합은 멸망의 기로에 서 있을 걸세.”
빌 헬름 공작가의 지원을 받고도 세계수를 탈환하는 것에 실패했던 이종족 연합이었다. 지금에 와서 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되었지 결코 호전되는 일은 없으리라.
“물론 그들이 멸망하건 말건 제국의 입장에서야 아무래도 좋겠지만 문제는 세계수를 잠식한 마왕의 존재일세.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세계수를 양분 삼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기를 것이 분명하네.”
벌레들의 왕이 부리는 수백만에 달하는 마충魔蟲들이 세계수의 힘을 양분 삼아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이 찾아올 것이었다.
이번 토벌전은 그것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몬을 비롯한 강경파의 마왕들은 사전 절차에 불과하단 뜻이기도 했다.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서부 마왕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실 것을 확신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네.”
발타자르의 대답에 가웨인이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응시하던 가웨인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결심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처음에는 단순히 뛰어난 식견과 지략을 겸비하셨기에 하시는 일마다 성공을 거듭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걸음.
가웨인이 다가왔다.
“하지만 수 세기 동안 그 어떠한 출입도 허용하지 않은 경계 너머의 땅에 대해 손바닥 보듯 알고 계시는 것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발타자르의 동공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장군께서는 미래를 알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 * *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혀왔다.
언젠간 주변에서 이러한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여, 다른 이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가웨인에게만큼은 진실을 이야기해 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제게는 말씀해 주실 수 없는 일입니까?”
말하는 가웨인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그렇다면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발타자르는 가웨인이 그랬듯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사실 말해줄 것은 얼마 없었다.
발타자르 본인도 자신이 어떤 이유로 회귀를 겪게 된 것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자신이 회귀하였다 이야기하려고 하니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발타자르는 답을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조금. 조금만 더 뒤에. 이번 서부 토벌전이 마무리되는 대로 자네에게 가장 먼저 말해주겠네. 그것으로 참아주면 안 되겠는가?”
간절함과 진심이 뒤섞인 그의 음성에 가웨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초조한 심정으로 바라보기를 잠시.
가웨인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고맙네.”
진심을 담은 인사에 가웨인이 말했다.
“기다리겠습니다.”
“때가 되면 다 말해주겠네. 반드시.”
발타자르가 가웨인의 두 손을 맞잡으며 말하자 가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