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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133화 (133/183)

공작이 회귀함 133화

‘네가 바로 가문의 희망이다.’

내 조부께서 늘 입에 달고 사시던 말씀이셨다.

제국과 그 역사를 함께한 이 위대한 가문은 그 유구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잡종의 피가 섞이지 않은 제국 유일의 순혈 가문이었다.

따라서 천것의 피가 섞인 잡종임에도 장남이라는 이유로 떠받들어지는 저 오만방자한 조반니가 아닌, 고귀한 혈통을 계승한 나, 보르네오 메디치가 바로 가문의 희망이며, 미래였다.

그러니 가문의 중신들은 나를 지지하고 나를 차기 가주의 자리에 올려야 함이 마땅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데달라스 백작이…… 조반니를 지지하는 성명을 공표했다고?”

메디치 가의 오랜 봉신 가문 중 하나인 데달라스 백작가가 내가 제시한 부귀영화를 걷어차고 조반니의 편으로 돌아섰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더냐?”

내 의문에 대한 답을 델레루앙 남작이 해결해 주었다.

“이번에 조반니 파벌 측에서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서부 탈환전의 선봉에 데달라스 백작을 세우기로 했다더군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정말로 고작 저 이유 때문에 그 완고하던 노인네가 조반니의 손을 들어주었단 말인가? 대체 그 가망 없는 전쟁이 무엇이기에!

현재 서부가 어떤 상황이던가?

중앙의 징벌 아래 오랜 세월 서부의 패자로 군림했던 빌 헬름 공작가가 허무하게 무너져내리고 통치자를 잃어버린 허허로운 땅이었다.

비록 서부의 땅이 비옥한 황금의 땅이라고는 하나, 그곳은 현재 동화 속에서나 전해지는 마왕이 무려 십수 명이나 등장한 죽음의 땅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저 강력한 힘을 지닌 발타자르 공작이 주도하는 중앙에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그 땅을.

고작 위기는 기회라는 조반니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탐내는 꼬락서니라니.

천한 핏줄다운 발상이 어처구니없었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말에 현혹된 가문의 봉신들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선조들께서 이룩한 이 위대한 가문이.

자칫 몰락의 길로 향할지도 모를 행보를 나는 수수방관 할 수 없었다.

“외조부님께 부탁드린 일은 어찌 진행되고 있는가?”

“그 건이라면 무리 없이 착실하게 진행 중에 있습니다. 혹여나 꼬리가 잡히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서부 인근의 영지에서 군수품을 처리하고 있으며 만약의 경우 이 일은 오직 황금상단주의 독단으로 벌인 것으로 협의해 두었습니다.”

“외조부님께서 큰 결단을 내리셨군.”

델레루앙 남작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이것으로 최악의 경우 내가 연루되는 일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네. 중앙에서도 슬슬 움직이려는 기미가 보이니.”

“물론입니다.”

“그래. 내 자네만 믿고 있겠네.”

델레루앙 남작의 다부진 대답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빌어먹을 잡종 놈. 네놈이 판 무덤에 빠져 잠들어라.”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다가올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조반니가 비명횡사하고.

이 위대한 가문이.

정당한 순리대로 내 것이 되는 그 순간을.

* * *

“자자! 마시자! 마셔!”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한바탕 축제가 벌어졌다.

엄밀히 따지자면 전쟁은 이제 막 시작한 것이었고, 따라서 지금은 전시 중이기에 군법상 술을 마시는 것은 엄중히 통제해야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면 이렇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없을 것이란 지휘관들의 요청을 발타자르가 승인함으로 열린 합법적인 축제였다.

“옛날 생각나네요.”

둔다림 백작성의 성벽 위에서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병사들을 지켜보던 발타자르에게 가웨인이 다가왔다.

그런 그의 손에는 와인 한 병과 술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거 좋지.”

발타자르가 흔쾌히 수락하자 가웨인이 그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 후 빈 잔에 붉은 와인을 채워주었다.

“초전을 압승으로 끝맺어서 그런지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드높네요. 거기다 처음의 불안감은 모두 사라졌고요.”

가웨인의 말대로 처음 토벌대의 병사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번 토벌전은 단순히 인간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 아닌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마왕이 그 상대였다.

일평생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병사들은 은연중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고 그것은 발타자르 군에 소속된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야만족 출신의 병사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전투가 삶 그 자체인 이들이었으니까.)

그렇게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병사들은 이번 초전에서 압승을 거뒀다. 마왕이나 그들 휘하의 마물들은 더 이상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번 토벌전 역시 지금까지 그래왔듯 승리로 끝맺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반길 만한 상황이었다.

사기란 병사 개개인이 자신의 힘을 온전히 모두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니까.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병사들이 너무 자만하지 않도록 잘 조율하게.”

“알겠습니다. 일선 지휘관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가웨인의 대답에 발타자르가 잔을 내밀었다.

쨍-

잔과 잔이 부딪치며 청아한 소리를 내었다.

두 사내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와인을 마셨다.

“그건 그렇고. 마스터에 오르고 나서 첫 전투였는데 소감이 어떤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던 가웨인이 답했다.

“주변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니 위협에 빠르게 반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되니 한결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주변만 눈에 들어오던 것이 이제는 전장의 흐름을 볼 수 있게 되더군요. 굳이 표현하자면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눈을 빛냈다.

전장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재능에 가까웠다.

보아하니 이번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서 지휘관의 재능이 함께 개화된 듯했다.

“어떤가. 자네가 원한다면 제3 토벌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해 주겠네. 이참에 승작을 노려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시죠.”

가웨인의 단호한 대답에 발타자르가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장군 곁에는 제가 없으면 안 되니까요.”

발타자르는 부정할 수 없었다.

* * *

둔다림 백작성에서 3일간의 휴식을 취한 토벌대는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점령 지역에는 병력을 주둔시켜 두지 않은 덕에 토벌대의 행보는 순탄하기만 했다.

그렇게 이동하기를 3일.

중부와 서부의 접경 지역인 발라타스 남작령에 도착한 토벌대는 그곳에서 임시 숙영지를 꾸리고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 * *

“아가씨. 지금이라도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이린의 전속 시녀이며 동시에 중급 정령사이기도 한 엘이 마차 밖의 풍경을 구경하는 아이린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왜요?”

아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에 평소라면 아이린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어 보일 엘이었지만 지금은 잔뜩 경직된 얼굴을 풀지 않고 있었다.

“주인님도 계시지 않는데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 걱정되어요.”

“괜찮아요. 지난번에 갔을 때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걸요? 다들 친절하셨어요.”

엘은 당장에라도 ‘그거야 주인님께서 함께 가셨으니 그런 것이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잔뜩 들떠 있는 아이린의 모습에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가웨인이 평하길 황궁은 뱀의 소굴이라고 하였다.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그곳에 순박하기만 한 아이린이 발을 들일 생각을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시녀.

주인인 아이린의 결정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었다.

“언니. 걱정하지 말아요. 에르제 황녀님을 모시러 가는 것뿐이니 큰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예요.”

룬이 걱정하는 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위로했다.

“으응, 그래. 그렇겠지?”

엘이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이 보이고 그 너머에.

황궁을 감싸는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 * *

“아이린 영애!”

아이린이 에르제의 거처인 별궁에 도착하자 단숨에 아이린의 앞으로 다가온 에르제가 두 손을 맞잡으며 활짝 웃어 보였다.

“굳이 오시지 않으셔도 되었는데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심 아이린이 황궁까지 마중 온 것이 기뻤는지 토실한 에르제의 두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황궁에서 볼 일은 이제 끝나셨어요?”

“네! 다 끝났어요.”

“그럼 돌아갈까요?”

황궁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는 아이린에게 에르제가 고개를 저어 보이며 말했다.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요. 영애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요.”

“그게 어디인데요?”

아이린이 호기심이 담긴 눈동자로 에르제를 바라보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검지로 제 입을 막았다.

“비밀이에요! 가 보면 영애도 깜짝 놀라실걸요?”

에르제의 호언장담에 아이린도 슬슬 흥미가 동했다.

“그럼. 거기만 보고 가요.”

“네!”

두 소녀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불청객이 찾아왔다.

“천박하게 이게 무슨 소란이니?”

쭉 째진 날카로운 눈매.

손부채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등장하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에 미소가 만개하던 에르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 언니…….”

2황녀.

벨라의 등장에 에르제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그것을 지켜보던 아이린이 에르제의 앞으로 나서며 벨라에게 인사했다.

“벨라 황녀님을 뵈어요.”

아이린의 예의 바른 인사에 벨라가 눈꼬리를 곱게 휘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반가워요. 아이린 영애, 맞지요? 황궁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에르제 황녀님을 마중 왔어요.”

아이린의 말에 벨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요즘 에르제와 친하게 지내신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요?”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벨라의 말에도 아이린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네!”

“그래요……. 그래도 너무 저 아이와 어울리진 마세요. 멍청함이 옮을지도 모르거든요.”

명백히 에르제를 비하하는 그 말에도 에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볼 뿐이었다.

“괜찮아요. 제가 어울릴 사람은 제가 선택할 테니까요.”

아이린의 말에 벨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어머. 전 아이린 영애를 걱정해서 드린 말씀이랍니다?”

“괜찮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제 일에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아이린이 단호하게 말하자 벨라가 얼굴을 가리던 부채를 탁- 소리가 나게 접었다.

“기껏 걱정해서 충고해 드렸더니. 아무리 발타자르가의 영애라고 하셔도 너무 무례하시네요. 발타자르 공작 각하께서 황족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시지 않으셨나 보죠?”

벨라 황녀가 조소하며 말하자 아이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신시아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쪼그려 앉아 제 정강이를 감싸는 벨라 황녀를 내려다보며 아이린이 말했다.

“우리 오라버니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시면 황녀님이라도 참지 않을 거예요!”

아이린의 다부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맙소사.”

아이린이 친 사고에 신시아는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이것을 발타자르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노발대발할지 눈에 선했다.

어떻게 이 일을 무마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응? 저 사람은…….’

* * *

통신구를 통해 신시아로부터 아이린이 황궁에서 겪었던 일을 전해 들은 발타자르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감쌌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신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를 닮아서 그런지 무척이나 당찬 여장부시던데요?]

“그래서 그걸 보고만 있었나?”

발타자르가 책망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에 신시아가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제가 나설 것도 없이 슈텔리앙 후작님이 나타나서 중재해 주셨는걸요, 뭘.]

그녀의 말에 발타자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 적절하게 슈텔리앙 후작이 등장하여 상황을 무마시켜 준 것은 다행이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벨라 황녀같이 황궁에서 구를 대로 구른 황녀의 경우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사갈 같은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이와 분쟁이 생겼으니 아이린이 아무리 발타자르의 하나뿐인 혈육이라고 해도 복수를 하겠다며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특히나 벨라 황녀가 시비를 걸었다고 해도 먼저 손을 쓴 쪽은 아이린이니 이는 자칫 황족 시해 죄가 성립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지금 당장이야 발타자르의 위세가 두려워서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발타자르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인다면 이 문제를 꺼내 들며 그를 압박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벨라 황녀를 쳐내야겠군. 멀리 변방으로 유배 보내는 것도 좋겠지.’

발타자르의 눈빛이 서늘한 빛을 띠자 그것을 눈치챈 신시아가 재빨리 말했다.

[후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마침 황궁 내에 아저씨께 불만을 품고 있는 이들의 꼬리를 잡았으니까요. 조금 더 조사해서 벨라 황녀와 엮어버릴게요.]

‘무슨 잡초도 아니고 캐내도 캐내도 끝없이 기어 나오니 원.’

중얼거리는 신시아에게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것들은 내버려 두게. 나중에 따로 쓸데가 있으니까.”

[쓸데요?]

신시아가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발타자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기 전에 내부 정리를 한 번 더 감행할 걸세.”

그것은 발타자르의 수하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에 발타자르에게 이것에 대해 언질을 받은 적이 있던 신시아가 작게 몸을 떨었다.

[으으……. 진짜, 사람이 너무 무섭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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