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30화
키에에엑-
쉬지 않고 내달린 끝에 가웨인은 한창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는 둔다림 백작성에 도착했다.
백작성은 마왕군의 맹렬한 공세에 얼마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였으나 다행히 아직 함락된 것은 아니었다.
반파되기는 했지만, 성문 역시 건재하고 성벽 위의 병사들은 마왕군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다.
전장을 살펴보니 여유를 부리는 것인지 마왕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만약 성이 함락되었다면 고생하여 달려온 것이 무용지물이 되었을 것인데, 아직은 버틸 여력이 남은 둔다림 백작성의 모습에 가웨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보고받은 것보다 규모가 큰걸?”
눈대중으로 파악되는 마왕군의 숫자는 40만.
애당초 파악했던 30만을 훌쩍 넘긴 숫자였다.
이는 오크들의 무지막지한 번식력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지만 오크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가웨인이 이를 알 리가 없었다.
‘혹시 서부에서 지원이 온 것일까?’
따라서 가웨인의 이러한 의심은 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장 어찌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적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깃발들을 설치하고 인근 일대를 뛰어다녀라. 또한, 한시도 쉬지 말고 함성을 내질러라. 놈들이 아군의 본대가 도착했다 착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예!”
가웨인의 지시에 지휘관들이 힘차게 대답하고는 백인대 단위로 흩어졌다.
드드드─
3만 필에 달하는 말이 사방으로 흩어져 뛰어다니기 시작하자 뿌연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들려오는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
마왕군 측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둔다림 백작성을 공략하던 마왕군이 우왕좌왕하더니 이내 개와 흡사한 외형의 마물을 탄 기수 일부가 숲 속을 향해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이는 어느 정도 기만책이 먹혀들었다는 증거였다.
탁 트인 개활지였다면 이런 기만책이 먹혀들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적의 모습을 파악하기 힘든 숲 속이었다.
마왕군 측에서는 정말로 지원군이 도착한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려웠고 자연히 적의 증원군이 도착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병력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달려오는 적의 기병대가 3만.
가웨인은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을 느꼈다.
기병 3만을 모두 동원한다면 지금 달려오고 있는 적의 기수들을 큰 피해 없이 쓸어버릴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적을 속이기 위한 노력들을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휘하 기병대 일부만을 이끌고서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이 경우 아군의 피해도 상당하겠지만 승리할 경우 적을 확실하게 속일 수 있었다.
“……남은 인원은 작전을 지속하고 1만은 날 따라와라! 적을 요격한다!”
가웨인은 후자를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로열 랭크의 경지였다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만 가웨인은 현재 마스터였다. 홀로 전장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적에 비해 아군의 숫자가 적다고 하나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가자!”
가웨인이 말을 몰아 다가오는 적의 기병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 뒤를 따라 기병 1만이 횡대로 길게 늘어서며 대형을 갖추었다.
“일 점 돌파 후 적의 후미를 공략한다!”
빠른 속도로 돌진하는 와중에도 기병들은 가웨인의 지시에 따라 횡대 대형에서 삼각형 모양의 대형으로 변형했다.
“차징 준비이-!”
가웨인의 외침에 1만에 달하는 기병들이 일제히 적을 향해 창날을 겨누는 장관이 펼쳐졌다.
두두두두-
순식간에 적의 기마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에 가웨인의 검에서 푸른 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길게 치솟았다.
꽈가가강-
가웨인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적의 선두가 무너져 내리고 뒤이어 달려오는 놈들을 향해 가웨인 측 기병대의 창이 작렬했다.
* * *
오크들과의 전투 직후 토벌대는 곧장 둔다림 백작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피해가 경미하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이었다면 적절한 휴식 시간을 가진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수송 마차의 존재로 인해 별도의 휴식 없이 곧장 출발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부상자는 이동 중에도 치료가 가능하고 또한, 불편하기는 해도 휴식과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이 속도라면 반나절 내로 도착할 수 있겠군요.”
평소에는 발타자르를 어려워하여 근처에 잘 오지 않던 울프가가 웬일인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딱 봐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할 말이 있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울프가가 순간 말하기를 주저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망설이나 싶어 그를 지그시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제 뒤통수를 거칠게 긁어대었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기가 무척 부끄럽습니다만.”
한참을 망설인 끝에 울프가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저희 대장 좀 어떻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트리스탄? 그녀가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발타자르가 묻자 울프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이에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트리스탄이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손길로 오크 대장의 수급을 쓰다듬고 있었다.
“각하께서 잡으신 그 오크 대장 있지 않습니까?”
“아아, 그 외눈의 오크?”
“예, 정찰을 나갔을 때 마주친 녀석인데 그놈이 하필이면 저희 대장을 도발해서는……. 대장이 그놈을 잡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코앞에서 놈을 놓치는 바람에 전투 직후 계속 저 상태입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고작 그런 것으로 저리 토라져 있는 것을 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겠네. 내가 해결할 테니 이만 자리로 돌아가게.”
발타자르가 울프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그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각하.”
* * *
“이 멍청한 놈아. 죽을 거면 내 손에 죽지 왜 겁도 없이 설치다가…….”
발타자르가 트리스탄에게 다가가니 그녀는 애달프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오크 대장의 수급을 쓰다듬고 있었다.
간혹 원망스럽다는 듯이 두 볼을 꼬집기도 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보았다면 밤잠을 설칠 정도로 음침한 모습이었다.
“트리스탄.”
“아…… 대장 오셨어요?”
발타자르의 부름에 고개를 들더니 이내 부끄럽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도 수급을 놓지 않는 것이 어지간히 아쉬운 듯했다.
“먼저 가서 둔다림 백작성의 상황을 보고 오지 않겠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발타자르가 이렇게 부드럽게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지휘관이 병사들의 사기를 꺾는 행동을 한다며 크게 꾸짖으며 호통쳤겠지.
하지만 트리스탄은 예외였다.
가웨인과 함께 오랜 시간 함께했던 동료였으며 발타자르에 대한 충성심 또한 투철했다.
물론 그런 이가 한둘은 아니지만, 그녀는 발타자르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확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그러니 호통보다는 이렇게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둔다림 백작성이요?”
뜻밖의 제안에 트리스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시큰둥해졌다. 가웨인의 임무가 마왕군이 둔다림 백작성을 함락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니만큼, 전장으로 향한다 한들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가웨인 경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이런, 오해했나 보군. 내가 부탁하려는 것은 말 그대로 정찰 임무일세. 상황이 긴급하다면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유기적인 전투를 병행하는 그런 정찰 임무 말일세.”
말이 정찰이지 사실상 별동대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는 단순히 트리스탄을 총애해서 하는 제안이 아니었다.
비록 트리스탄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전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상황에 따라 적절한 판단을 내릴 정도의 지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또한, 가웨인이 임무를 실패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물론 자네가 싫다면야…….”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발타자르가 다른 이에게 이 임무를 맡길까 싶었던 트리스탄이 황급히 소리쳤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오크 대장의 수급을 내던졌다.
“제가 꼭 하고 싶어요. 그 임무.”
트리스탄의 간절한 눈빛에 발타자르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이 임무는 자네가 맡는 것으로 하세.”
“감사합니다!”
트리스탄이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이내 제 휘하의 기병들을 이끌고 떠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못 말리겠군.”
* * *
그 시각.
칼 프란츠 대공령에는 혼약 협정을 위해 글루스가 사절단을 이끌고 도착해 있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소인은 발타자르 공작 각하를 모시고 있는 글루스 이덴시아라고 합니다.”
글루스가 예법을 갖추어 인사하자 그의 머리 위로 칼 프란츠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게.”
이에 글루스가 고개를 들자 그의 두 눈에 칼 프란츠의 모습이 비쳤다.
의자 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권태로워 보였다.
‘이자가 칼 프란츠 대공. 남부의 늑대인가.’
상대의 의중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심유한 두 눈동자가 글루스를 응시했다.
“그래. 발타자르 공작이 내 딸을 원한다고?”
“그렇습니다. 저희 공작 각하께서 그렇듯이 대공녀께서도 아직 정혼자가 없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긴 하지. 그놈의 검이 뭐라고. 혼기가 꽉 찬 나이면서도 매일같이 검에만 매달려 있으니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딸일세.”
말하며 칼 프란츠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말하는 것만 보면 제안을 거절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이쪽의 의중을 떠보려는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칼 프란츠의 입장에서 발타자르가만큼 매력적인 혼처는 없을 테니까.
“제국 전역을 뒤져도 이만한 짝은 찾을 수 없을 줄 압니다만, 혹시 달리 염두에 두신 혼처가 있는 것입니까?”
“아닐세. 나야 두 손 들고 환영할 제안이네만 문득 걱정이 들어서 말일세. 발타자르 공작 정도의 사위를 들이려면 적잖은 혼수품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한데 부끄럽게도 지금 대공가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 보니 선뜻 수락할 수가 없다네.”
칼 프란츠의 말에 글루스가 눈을 빛냈다.
원하는 것을 어서 말해보라는 뜻이 분명했다.
“그 혼수. 미리 받아도 되겠습니까?”
“달리 원하는 것이라도 있는가?”
“대공가 측에서 중남부 방면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마왕들을 몰아내 주셨으면 합니다.”
글루스의 말에 칼 프란츠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호오라. 온전히 서부에만 전력을 집중하겠다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글루스의 물음에 칼 프란츠가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군. 마음 같아서는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토벌대를 돕기 위해 부탁을 들어주고 싶네만 이쪽은 대수림에서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막아내기에도 벅찬 상황이라서 그건 힘들 것 같네.”
이 부탁을 들어준다면 공작가 측에서는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칼 프란츠의 말에 글루스는 문득 그가 너구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냥 부탁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군의 일부가 동부 방면 인근에 주둔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글루스의 물음에 일순간 칼 프란츠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글루스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다시 온화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네.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부에서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고 있다네. 하여 혹시나 그 여파가 남부에까지 미칠까 우려되어 군을 투입시켜 둔 상태라네. 물론 동부의 상황이 안정된다면 바로 남부 방어선으로 돌릴 걸세. 앞서 말했듯이 몬스터들을 막아내는 것도 힘겨우니 말일세.”
그럴 리가 없었다.
작정하고 동부에 개입하기 위해 군을 투입한 것이 뻔했지만 이를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툭 터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측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동부에 손을 뻗으시는 것을 묵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혼약은 그 계약의 증표로군?”
칼 프란츠의 직설적인 물음에 글루스가 순순히 수긍했다.
“그렇습니다.”
칼 프란츠가 글루스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글루스를 탐색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제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졸지에 딸자식을 정치도구로 이용하는 꼴이 되었구먼. 하하하.”
결정을 내린 듯 칼 프란츠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이에 글루스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 숙이며 말했다.
“양측 가문 모두 한동안 정신없이 바쁠 테니 약혼은 서약서를 주고받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답은 없었다.
하지만 칼 프란츠가 어떤 답을 내릴지는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