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29화
쿠웅- 쿠웅-
둔다림 백작성을 포위한 마왕군이 거세게 성문을 두드렸다.
성벽 위에는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마왕군의 기세가 어찌나 매서운지 당장에라도 함락될 것처럼 한없이 위태롭게만 보였다.
“금방 끝나겠군.”
제도 침공의 선봉장을 맡은 서열 19위 괴완공怪腕公 살레오스의 말에 각기 서열 64위의 플라우로스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인간 놈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헛수고일 뿐이지요.”
이에 질세라 서열 69위 데카라비아가 재빨리 아첨에 합세했다.
“아무렴요. 자자, 성을 점령하는 것은 아랫것들이 다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제가 참한 서큐버스들로 준비해 두었으니 질펀하게 노셔야지요. 헤헤.”
데카라비아의 말에 살레오스가 히죽 웃더니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깜빡했다는 듯이 물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토벌대의 전력을 파악한다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아도 오크놈들 10만을 보내 두었습니다요.”
“그래?”
“예. 만약 녀석들에게 패배한다면 귀찮게 신경 쓸 필요가 사라지는 것이고 설령 이기고 온다고 해도 전력이 온전치는 않을 것이니 쓸어버리는 것에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될 겁니다요. 헤헤.”
“그렇군.”
살레오스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기왕이면 이기고 왔으면 좋겠군. 그 발타자르라는 놈을 내 손으로 직접 찢어버리고 싶으니 말이야. 하하하하.”
호탕한 웃음과 함께 살레오스가 막사 안으로 들어갔고 곧 막사에서 음탕한 신음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트리스탄이 본대로 복귀함으로써 수만에 달하는 오크들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토벌군은 행군을 멈추고 진영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굳이 돌아가 고지를 선점할 필요도 없었다.
이곳은 전방의 숲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주변 일대가 탁 트인 개활지였다.
이는 대회전을 벌이기에 적합한 장소라는 뜻이었고, 대회전은 발타자르군의 장기 중 하나였다.
“서둘러라! 오크들이 오기 전에 준비를 끝마쳐야 한다!”
장교들이 병사들을 재촉하며 부산을 떨었다.
군의 전열에는 거대한 타워 쉴드와 창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마치 작은 성벽을 연상케 하며 방진을 이루었고, 후열에는 원거리 병과인 궁수와 마법사, 그리고 투석기가 대기했다.
또한, 군의 양익에 배치된 기병들은 적의 후미를 급습하기 위해 크게 선회하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준비를 끝마치는 데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고 모든 준비를 끝마친 토벌군은 새들이 날아오르는 숲을 응시했다.
오크들이 다가옴에 따라 놈들이 내지르는 괴성과 함께 땅이 미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저마다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영원과도 같은 기다림이 지나고.
숲속에서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크와아아악-
생전 처음 보는 흉악한 모습.
인간과는 확연히 다른 녹색 피부에 거대한 체구와 긴 송곳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공포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크르르르-
오크 무리의 선두.
다른 오크들보다 족히 두 배는 더 큰 우람한 체구의 오크가 누군가의 수급이 꽂힌 창을 들고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앞서 트리스탄에게 한쪽 눈을 잃었던 녀석이었다.
녀석은 트리스탄에게 그랬던 것처럼 토벌대의 진영 한복판을 향해 창을 내던졌는데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발타자르의 발치 앞에 내리꽂혔다.
“…….”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발타자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오크가 히죽 웃으며 거대한 도끼를 들어 올렸다.
오크 진영에서 땅을 뒤흔드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계에서 겁대가리를 상실하기로는 오크를 따라갈 종족이 없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트리스탄이 곁에 있었다면 당장 놈의 목을 따 오겠다며 난리를 쳤으리라.
“전군 발사 준비.”
[전군 발사 준비이이-!]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리며 지시하자 장교들이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
[불화살을 준비하라!]
[기름통에 불을 붙여라!]
장교들의 지시에 따라 횃불을 들고 대기하던 병사들이 궁수들의 발치 앞에 파인 도랑과 투석 바구니에 담겨있던 기름통에 불을 붙였다.
이에 발맞추어 궁수들이 활시위를 잡아당기며 불길에 휩싸인 화살을 장전하고 마법사들을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마법사가 뿜어내는 마력의 파동과 함께 전장을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가 이제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 소리쳤다.
그 순간.
하늘을 향해 불화살 한 발이 솟구치더니 오크들의 진영 한복판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떨어진 화살은 괴성을 내지르던 오크의 미간에 정확히 꽂히며 놈을 즉사시켰는데 이는 단순한 견제용이 아니라 선회하고 있는 기병들에게 오크들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클클클-
제 부하가 죽어 나갔음에도 대장 오크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미소가 만개한 얼굴로 수하의 시신을 향해 걸어갔다.
콰직-
단숨에 수하의 송곳니를 부숴 버린 대장 오크가 그것을 한입에 털어놓고는 으적으적 씹어대었다.
동시에 놈이 손에 쥔 거대한 도끼를 들어 올리자 함성이 터져 나오며 오크들이 일제히 진격을 시작했다.
“발사.”
발타자르의 지시와 함께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오크들을 향해 화살과 마법, 그리고 불길에 휩싸인 기름통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과가강-
하늘을 가득 메운 화살과 대지를 불바다로 만드는 기름병의 위력도 대단했지만 세 명의 아크메이지와 수백에 달하는 마법사가 펼치는 대대적인 폭격이 특히 압권이었다.
제 몸 하나 믿고선 변변한 무장도 없이 달려들던 오크들이 일거에 쓸려나갔다. 한순간에 수천에 달하는 오크들이 차가운 대지 위에 몸을 뉘었다.
그러나 오크들은 두려움이라곤 모르는지 달리는 속도가 줄어들기는커녕 두 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충격 대비!”
[충격 대비이이-!]
장교들의 지시와 함께 전열에 선 병사들이 곧 다가올 충돌에 대비하며 창을 쥔 손을 뒤로 당겼다.
“투창 발사!”
[발사아아-!]
오크들이 어느 정도 사정권 내로 도달하자 보병들이 준비하고 있던 창을 일제히 내던졌다.
퍼억-
투창에 적중당한 오크들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워낙 두꺼운 근육질로 이루어진 몸인지라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대다수가 투창에 몸이 꿰뚫리고도 태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재차 토벌대를 향해 달려나갔다.
“무식한 놈들.”
보병 장교 중 하나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중무장한 기사라고 해도 투창에 직격당하면 즉사를 피하기가 어려운데 놈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 보였다.
“오냐. 머리통에 구멍이 나도 멀쩡할지 두고 보자!”
곧이어 견제 사격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오크들이 방패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거나 몸을 내던지기 시작했고, 장교들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지시를 내렸다.
“찔러!”
[찔러어어어-!]
방패 사이로 창들이 솟구치며 본격적인 보병전이 시작되었다.
* * *
“각하. 겨울 전쟁 때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킬킬대며 전장을 바라보던 캐러독이 발타자르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놈들. 생김새만 다르다뿐이지 바이칸 녀석들과 판박이 아닙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캐러독을 흘겨보자 그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농담 조금 한 것 가지고 뭘 그리 정색하십니까?”
“헛소리나 계속할 거면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게.”
발타자르가 참전하려는 기색을 내비치자 캐러독이 눈을 빛냈다.
굳이 그가 나서지 않아도 토벌대의 압승으로 끝날 이 전투에 직접 나서려 하는 것은 전투를 보다 빨리 끝내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직접 손을 쓰시려고요?”
“그래야지. 이런 곳에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
“이렇게 서두르시는 것을 보니 아까 전의 그 소년이 퍽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캐러독의 말에 발타자르가 말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투의 말을 할 때면 무언가 불만이 있을 때였다.
전황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는데 대체 뭐가 불만인지가 의아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캐러독이 말을 몰아 다가왔다.
“각하께서 왜 더 위로 오르시지 않는지. 그것이 의문입니다. 충분히 그럴 역량과 세력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또 그 소리인가?”
발타자르가 피식 웃었다.
권력욕이 강한 그가 이런 불만을 품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전에 분명 말했지 않은가. 다가올 환란을 막기 위해서는 제국이 하나로 뭉칠 필요가 있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아닌 황실이 앞장설 필요가 있다고 말일세.”
“그렇게 말씀하신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자고로 권력이란…….”
캐러독과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자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리며 제지했다.
“되었네.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지금껏 그래왔듯이 날 따르면 되는 문제 아닌가. 내 결정은 확고하니 그냥 따르게. 아니면 뭔가. 더 이상 날 따르지 못하겠는가?”
발타자르가 캐러독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잠시간의 대치 끝에 캐러독이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 말은 잊어주십시오.”
“그러지.”
겨울 전쟁 당시였다면 당장 팔 하나를 부러뜨렸을 텐데 고작 말 몇 마디로 경고하는 것에 그쳐 버리자 캐러독의 눈동자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발타자르가 그에게 군의 지휘를 맡기곤 말을 몰아 전장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캐러독이 중얼거렸다.
“한동안 칼에 피를 묻히시지 않으셔서 그런가…….”
붉은 오러 블레이드가 전장을 강타하며 일격에 오크 수십이 비명횡사했다. 여전히 가공할 만한 무위를 선보이고 있지만, 이상하리만치 예전처럼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성격이 많이 둥글어지셨군.”
캐러독의 안광이 서늘한 빛을 띠었다.
* * *
전장에 난입한 발타자르는 그야말로 폭풍이었다.
오크들의 진영 한복판에서 날뛰는 발타자르의 모습은 양 떼 속에 뛰어든 맹수와도 같았다.
그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오크 수십이 속절없이 쓰러지며 사방으로 검은 피가 흩뿌려졌다.
무리의 대장인 녀석이 고작 로열 랭크 급이었으니 수만에 달하는 오크 중 감히 발타자르의 검을 받아낼 오크는 없었다.
만약 오크들의 통치자인 워로드가 있었다면 발타자르의 검을 받아 낼 수도 있었겠지만, 놈은 아몬의 수족으로 항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 아몬의 지시가 없는 이상에야 이 먼 곳에까지 올 일은 없었다.
물론 오크 로드가 있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오크들이 마냥 당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죽음을 도외시한 그들의 맹공은 무척이나 매서웠고 놈들에게 쓰러진 병사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오크 한 놈의 심장에 검을 쑤셔 박으며 발타자르가 숲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자그맣게 푸른빛이 보였다.
발타자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군타낙스 기사단이 일으키는 오러의 폭풍이 분명했다.
“왔군.”
오크들의 진영 후미에 일단의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갤러해드와 트리스탄이 이끄는 기병들이었다.
한 차례 선회하여 아군 진영에서 보낸 신호를 이정표 삼아 오크들의 후미를 장악한 그들은 망설임 없이 돌진을 감행해 왔다.
꽈아앙─
단 한 번의 충돌로 오크들의 진영이 빠른 속도로 와해되었다.
순식간에 앞뒤로 포위되었지만, 오크들은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용맹하게 싸움을 지속했다.
하지만 기울 대로 기운 전황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용맹하게 싸운들 이것을 뒤집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크들은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고 결국 남은 것은 오크 무리의 대장과 수백 남짓한 오크뿐이었다.
병사들에게 포위당한 오크들은 위협적으로 무기를 휘둘러대었지만, 처음과는 달리 섣부르게 달려드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켜! 비켜! 저놈은 내가 죽인다!”
울프가가 말릴 새도 없이 트리스탄이 다이어 울프의 등에서 뛰어오르더니 화살을 쏘았다.
피잉- 피잉-
눈 한 번 깜짝할 새에 십수 발의 화살이 쏘아지고 대장 오크의 곁에 서 있던 오크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동시에 트리스탄이 땅바닥을 구르며 녀석의 앞으로 착지하고는 화살 세 대를 활시위에 장전했다. 이 거리라면 이번에는 눈이 아닌 머리와 심장이 꿰뚫리리라.
그녀가 작심하고 화살을 쏘아 보내려는 순간.
붉은빛이 번쩍인다 싶더니 오크 대장의 목이 허공 위로 떠올랐다.
검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트리스탄의 몸을 적셨다.
“대장……?”
트리스탄이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목을 따 버리려고 했는데…….
그녀가 발타자르에게 무어라 항의하기도 전에 발타자르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대자아앙!”
트리스탄이 원망 어린 외침과 함께 갈 곳 잃은 분노를 사방으로 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