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27화
“허억, 허억…….”
가웨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턱 끝으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 지옥 같은 대련이 시작된 지도 벌써 5일째였다.
그동안 세 마스터는 돌아가며 가웨인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어찌나 독하게 몰아붙이는지 며칠 전에는 사지 중 하나가 잘려 나간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 직후 손채영이 바로 치료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녀가 없었다면 불구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확실히 가능성이 보이네요.”
오늘 가웨인의 대련 상대를 맡은 에리스가 짧게 평했다.
그동안 대련을 통해 지켜본 가웨인은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금방 지쳐 나가떨어질 훈련 일정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성실하게 따라왔다.
거기에 재능까지 받쳐주니 가파르진 않아도 꾸준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한계까지 몰아치는 대련을 한다고 마스터에 오를 수 있었다면 그 많은 로열 랭크들이 벽을 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에리스가 이렇게 가능성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웨인의 손에 쥔 7대 신검의 존재 때문이었다.
오러 블레이드에 대적할 수 있는 7대 신검 가라틴 덕분에 가웨인은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한 대련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대련을 통해 직접 오러 블레이드와 맞부딪치며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조건과 상황이 어우러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 우리 잠시 휴식할 겸 이론 수업을 해볼까요?”
“좋습니다.”
에리스의 제안에 가웨인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한계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던 참에 휴식이라니.
이보다 반가울 수는 없었다.
휴식이 결정되자 가웨인이 검을 내려놓고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리스가 방긋 웃었다.
좋은 자세였다.
자리에 앉거나 드러누워 휴식을 취한다면 당장은 편하겠으나 그 이후가 더 힘들어질 것을 알고 하는 행동이 분명했다.
“가웨인 경. 로열 랭크와 마스터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에리스의 물음에 가웨인은 잠시 고민했다.
차이라…….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질문이었다.
“그야…… 오러 블레이드의 발현 여부가 아니겠습니까?”
가웨인의 대답에 에리스가 손뼉을 짝- 하고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다면 오러 블레이드는 무엇일까요?”
“마나. 그 자체입니다.”
가웨인이 즉답했다.
발타자르의 곁에서 수없이 보아온 것이기에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래요! 맞아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극도로 압축된 마나지요. 자! 그럼 두 번째 질문. 단순히 마나를 압축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오러 블레이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나요?”
가웨인의 물음에 에리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틀렸어요. 단순히 압축하는 것만으로는 오러 소드보다 조금 더 단단하기만 할 뿐이지 오러 블레이드 특유의 이적과도 같은 예기는 기대할 수 없어요.”
말과 동시에 에리스의 창에서 순백의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기억하세요. 압축과 진동.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오러 블레이드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압축과 진동…….”
에리스의 오러 블레이드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가웨인이 돌연 자리에 풀썩 주저앉더니 눈을 감았다.
“어머?”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에리스가 눈을 빛냈다.
그가 휴식과 함께 이론 수업을 진행한 것은 앞으로 남은 일정을 위해 휴식을 취하고 그동안 체득한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데 이것이 정답이었던 듯 가웨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강렬하게 내뿜어지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이 반복될수록 마나의 밀도는 높아지고 크기는 작아졌다.
좋은 징조였다.
어쩌면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각하께서 좋아하시겠네요.”
에리스가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섰다.
그러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들에게 지시하여 그 누구도 연무장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 * *
“으음…….”
가웨인이 눈을 뜬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대련을 시작한 이후 한시도 비명을 지르지 않은 적이 없던 몸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운했다.
“이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던 가웨인의 눈에 회색빛을 띠는 허물 같은 것이 보였다.
“이제 깨어났어요?”
가웨인이 눈을 뜰 때까지 곁을 지켜주었던 에리스가 웃으며 다가왔다.
“에리스 님. 대체 이건 무엇입니까?”
가웨인이 허물을 가리키며 묻자 에리스가 창대로 허물을 툭 쳤다.
그러자 허물이 힘없이 바스러졌다.
“가웨인 경의 몸에서 나온 불순물들이에요.”
“불순물…… 말입니까?”
“네. 신체가 재구성되면서 체내의 불순물들이 모두 분출된 흔적이죠. 느껴지시지 않나요? 몸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에리스의 말에 가웨인이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몸의 상태는 최상이었다.
마나 하트의 크기는 이전보다 작아졌지만, 그것이 품은 마나의 힘은 이전과 비할 바가 되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다.
“…….”
가웨인이 본능적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웅─
검이 공명했다.
동시에.
마스터의 상징.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드디어…….”
가웨인이 넋을 놓고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날카로운 예기를 뽐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축하해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을.”
에리스의 축하에 가웨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내팽개쳤다.
그리고 주먹 쥔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환호에 가까운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 해냈다아아!”
예상했던 7일의 시간보다 하루를 앞당긴 6일째가 되던 날.
가웨인이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 * *
“그거 다행이군.”
가웨인이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보고를 받은 발타자르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조금 더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마스터라는 막강한 전력을 추가로 확보하게 되었으니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이걸로 초전은 압승이 확실하겠네요.”
집무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사과를 먹고 있던 신시아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빌 헬름 공작의 기록을 제치고 가장 많은 마스터를 보유하게 된 기분이 어떠세요?”
“글쎄…….”
“생각보다 반응이 뜨뜻미지근하시네요?”
의외라는 듯이 묻는 신시아를 힐끔 바라본 발타자르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마냥 좋다고 볼 일은 아니니까.”
발타자르의 표정에서 작은 그늘과 고민을 발견한 신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발타자르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곤 책상을 쿵- 소리가 나게 집으며 그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요? 가웨인 아저씨가 마스터가 되었으니 이제 아저씨 진영에는 마스터가 총 넷에 아크 메이지가 하나, 아니, 불의 마탑주까지 더한다면 둘인데 이 정도면 단일 세력으로는 제국 최강이잖아요. 이제 감히 아저씨의 말을 거스를 이가 없을 텐데 뭐가 걱정이신데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그녀의 이마를 검지로 밀어내며 말했다.
“현재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나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것도 있지만 황권 강화를 위해서는 내 존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라네. 또한, 추후 정국이 안정된다면 날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발타자르의 힘은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에는 황권이 온전히 그 힘을 되찾을 경우, 큰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라 여겨졌다.
하지만 이번에 토벌전을 준비하며 드러난 발타자르의 힘은 설령 황권이 제힘을 모두 되찾는다고 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막강했다.
바르바토스와의 동맹.
발타자르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레티시아.
북부 최대의 난적이었던 바이칸들의 압도적인 지지.
수면 위로 드러난 발타자르의 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지금이야 황권 강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터라 발타자르를 견제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한데 여기서 칼 프란츠 대공가와의 혼약이 추진되고 가웨인이 마스터에 오른 것이 알려진다면 황태자에게 내가 위험하다는 인식이 심어질 수도 있네. 물론, 당장이야 내 지지 없이는 지금의 세력을 유지할 수 없으니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겠지.”
자칫 잘못 해 발타자르와의 관계가 틀어졌다간 이전의 황제들이 그랬듯이 꼭두각시놀음을 하게 될 것을 뻔히 알고 있는 황태자가 그런 무리수를 둘 리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리된 이후. 정국이 안정된 이후에도 황태자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까? 신하가 군주보다 큰 힘을 가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몸소 겪은 그 황태자가?”
이것은 믿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배자의 습성은 피지배자가 자신보다 큰 힘을 가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황태자보다 잘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황태자에게 있어 일종의 트라우마였으니까.
겉으로는 부정해도 본능적으로 발타자르를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었다.
“……설마 황태자가 아저씨를 내치려고 하겠어요?”
신시아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권력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움켜쥐는 것일세.”
이것은 제국의 초대 황제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그는 개국 공신들을 축출함으로써 강력한 절대 황권을 구축하며 철의 제국 프락시온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제국의 옛 영광을 재현시키려는 황태자가 초대 황제의 입버릇 속에 담긴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뭐가 문제예요?”
팔짱을 끼고 고심하던 신시아가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까짓것 그냥 아저씨가 다 해 먹으면 되잖아요.”
역모죄로 엮여도 할 말이 없는 불순한 발상이었지만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신시아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어차피 이 제국의 황실은 가망이 없어요. 그들이 배출한 역대 황제들이 그걸 증명해 주잖아요. 황태자라고 다를 것 같아요? 아저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즉에 목이 달아났을 사람이에요. 지금이야 아저씨가 있어서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한 덕분에 잊혀지고 있지만, 그 사람은 욕심만 많고 무능해요. 황좌에 오른다면 제국을 망칠 인물이죠. 지금이야 황실이라는 명패가 필요해서 이런다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지금까지 한 발언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정말 위험했다.
물론 둘만의 대화이기에 이것이 밖으로 퍼져 나갈 일은 없겠지만 이런 생각을 속에 품고 지내다가는 자칫 중요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만 하게. 그리고 그 생각은 당분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게.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할 일이고 지금은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발타자르의 말에 신시아가 눈을 빛냈다.
부정하지 않았고 답을 뒤로 미루었다.
이것은 발타자르가 속내에…….
‘아니, 아니지. 이건 아저씨 말대로 지금은 머릿속에서 지워야지. 혹시라도 실수하면 안 되니까.’
신시아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래. 지금은…….’
발타자르의 속내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신시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