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25화
파아앗-
푸른 빛무리와 함께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미녀와 차가운 인상의 사내.
레티시아와 발타자르였다.
“여기인가요?”
지면에 착지한 레티시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숲 속 그 어디에도 마왕의 거처로 추정되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굳이 골라야 한다면 저기 보이는 자그마한 동굴 정도였다.
하지만 저런 곳에 마왕과 그 수하들이 살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정말 이곳이 맞아요? 아무리 봐도 마왕이 살 만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요.”
“제대로 찾아온 것 맞네.”
발타자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동굴의 입구에서 공간이 뒤틀리더니 그 속에서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우인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우-!”
거친 콧김을 내뿜은 녀석이 이내 발타자르를 향해 덤벼들려는 듯이 달려왔다.
이에 레티시아가 황급히 마법을 발현하려 하자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제지했다.
그러는 사이 우인족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쿠웅-
우인족이 앞발을 구르며 멈춰섰다.
땅이 들썩이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마나를 휘감은 손을 휘저어 흙먼지를 날려 보냈다.
“이렇게 요란을 떨 필요가 있는 것인가? 스페디악.”
발타자르의 타박에 우인족, 스페디악의 눈꼬리가 휘었다.
“발타자르. 바르바토스 님께서 기다리신다. 무우-”
그 능글맞은 모습에 발타자르가 스페디악의 오금을 후려쳤다.
단박에 그의 무릎이 구부려지더니 곧 땅 위에 무릎을 꿇었다.
“무웃! 또 보지 못했다!”
스페디악이 원통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레티시아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예요?”
그녀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스페디악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몸은 바르바토스 님의 자랑스러운 선봉장 스페디악 님이시다! 무우! 이 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도 좋다. 무우!”
“네에…… 그거 영광이네요.”
레티시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말하자 그걸로도 좋은지 스페디악이 히죽- 웃었다.
“스페디악. 이럴 시간이 있는가? 바르바토스가 기다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깜빡했다 무우! 어서 가자 발타자르!”
허둥지둥 동굴을 향해 앞서가는 스페디악의 행동에 레티시아가 얼이 빠진 얼굴로 물었다.
“뭐가 저렇게 멍청해요?”
“무시하지 말게. 저렇게 보여도 로열 랭크 서넛은 웃으며 상대할 만한 강자니까.”
“그래요?”
확실히.
겉모습만 보면 강해 보이긴 강해 보이는데…….
“뭐 하고 있나 무우? 어서 가자 무우.”
스페디악이 뒤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역시 멍청하게만 보였다.
레티시아는 마왕군이 다 저런 녀석들뿐이라면 그렇게까지 위협이 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자넨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저도 같이 갈래요.”
레티시아가 선뜻 동행을 자처했다.
이곳에서 발타자르가 돌아올 때까지 마냥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그를 따라가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왕의 거처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발타자르가 힐끗 그녀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비위는 좋은 편인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레티시아가 얼떨결에 답했다.
“나쁘지는 않은 편이에요. 그런데 그건 왜요?”
“따라가 보면 알 걸세.”
불친절한 설명에 레티시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발타자르와 함께 스페디악의 뒤를 따라갔다.
* * *
“우욱-”
레티시아가 헛구역질을 했다.
비위가 좋냐는 발타자르의 질문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눈을 질끈 감았던 그녀가 조심스레 실눈을 떴다.
인간의 사체가 갈고리에 꿰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우욱-”
재차 구역질이 올라왔다.
가뜩이나 사방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로 머리가 어질거리던 차에 저런 역한 모습까지 보게 되니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이건 단순히 비위가 좋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대체 언제 도착…… 우욱, 해요?”
“곧 도착하니. 조금만 더 참게.”
파리한 안색의 레티시아를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저런 반응이 당연했다.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요동치는 벽.
바닥에 흥건히 고인 핏물.
천장에 내걸린 시체들.
그런 시체들을 간식거리처럼 주워 먹는 마물들까지.
실로 역겹기 그지없는 모습들이었다.
“무우! 여기다!”
한참을 걸어간 끝에 거대한 석문 앞에 도착한 스페디악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석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동시에 비추어지는 풍경.
천장에 빽빽하게 박혀 있는 발광석들이 방안을 환하게 밝혀주고 그 아래 붉은 융단과 커튼으로 치장된 화려한 침상이 보였다.
침상의 주변으로는 해골 몇 개가 바닥을 굴러다녔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방이었다.
역겹기 그지없는 방 바깥과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역겨웠다.
“이게 누구야!”
방의 한가운데.
침상 위에 누워있던 바르바토스가 벌떡 일어나더니 한달음에 다가왔다.
그녀가 발타자르의 팔을 팡팡-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발타자르! 이게 얼마 만이지? 너무 무심한 거 아니야? 종종 찾아오라고.”
“바르바토스. 잘 지냈는가?”
“나야 뭐 잘 지냈지. 덕분에 피 맛도 좀 보고 제대로 요양 생활을 보냈어. 그러는 너는? 요즘 제국 전역이 시끄럽던데 이렇게 와도 괜찮은 거야?”
바르바토스가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살갑게 발타자르를 대했다.
레티시아가 그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계속 이렇게 세워둘 참인가?”
“아! 미안, 미안.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들떠 버렸네. 자자. 이리로 와.”
바르바토스가 발타자르의 손을 덥석 붙잡더니 자그마한 티테이블로 그를 안내했다. 이에 레티시아가 자연스레 따라가려는데 바르바토스가 싸늘한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랫것은 거기서 얌전하게 서 있어야지?”
순간 레티시아는 목에 칼날이 들이밀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이 막혀오기 시작하고 동시에 육식동물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몸이 바짝 경직되었다.
“적당히 하게.”
발타자르가 바르바토스의 기운을 쳐내며 말하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장난이야, 장난. 자자, 앉으라구.”
의자에 걸터앉으며 자리를 권하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레티시아를 힐끗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이내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서. 제국의 공작 각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무거운 걸음을 하신 이유는?”
깍지 낀 손에 턱을 괴며 바르바토스가 물었다.
이에 발타자르가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동부를 재침공해 주었으면 하네.”
“동부를?”
“그렇네. 정확히는 블랙비어드 후작령을 압박해 주었으면 하네만.”
바르바토스는 발타자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인지를 추론해 내고는 눈을 빛냈다.
“동부에 무슨 변고가 생겼구나. 가령…… 동부의 지배자인 프리드리히 공작이 사망했다던가?”
“정확하네.”
발타자르의 대답에 바르바토스가 테이블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동부와의 전쟁 때 프리드리히 공작과 몇 번 싸워보았던 바르바토스는 그를 직접 죽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으으…… 진작에 내 손으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한참을 아쉬워하던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뱀과 같은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을 내뿜으며 발타자르를 응시했다.
“뭐, 좋아. 부탁은 들어줄게. 하지만 발타자르. 명심해. 적당히 상대해 주는 것은 지난번이 끝이야. 이번에는 이쪽에서도 전력으로 치고 나갈 거야.”
어차피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지난번 전투 때 프리드리히 공작이 이끄는 동부군에게 그녀의 수족 중 하나가 사망했으니 그 복수를 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덤으로 손실된 마물들도 보충하고 말이지.
“뜻대로 하게.”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자 바르바토스가 배시시 웃었다.
“우리 애들이 좋아하겠네.”
웃고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제법 살벌했다.
“좋아. 뜻하지 않게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선물을 하나 줄게.”
“선물?”
“응. 선물. 남쪽 숲에서 산림욕이나 하던 우리 노친네랑 손을 잡은 인간이 있는 것 같아.”
남쪽 숲이라 하면 대수림을 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곳에 자리 잡은 마왕은 단 하나.
“불사왕 아가레스를 말하는 것인가?”
직접 이름을 거론하지도 그렇다고 연관 지을 만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아가레스의 이름이 거론되자 바르바토스가 눈을 빛냈다.
“맞아. 지난번에 아가레스 영감이 보낸 사자가 날 찾아와선 파벌에 들어오라며 이것저것 제시하더란 말이지? 내가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요점만 말하게.”
발타자르의 타박에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재미없네. 사실 나도 정확히 누구랑 손을 잡은 건지는 몰라. 내가 들은 거라곤 노친네랑 손을 잡은 인간이 큰 상단을 이끌고 있다는 것뿐이야. 다만 이건 확언할 수 있어. 급을 따지기 좋아하는 노친네 성격을 생각해 볼 때 그 상단이라는 것이 제국 5대 상단 중 하나일 거야.”
순간 발타자르는 남부 방어선에 투입되었던 대공가의 병력이 동부 인근으로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떠올랐다.
‘칼 프란츠 대공인가?’
정황만 놓고 보자면 합당한 의심이었다.
몬스터들의 대이동으로 남부 방어선이 몇 차례 위기를 맞이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한데 아무리 세력을 키울 기회가 왔다고 해도 남부 방어선에 투입된 병력을 줄인다는 것은 절로 의심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족을 극도로 혐오하는 칼 프란츠 대공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아가레스와 손을 잡아서가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기회를 쟁취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아니라면 메디치일 수도 있겠지.’
제국의 옥좌에 지대한 관심을 내비쳤던 조반니 메디치일 가능성도 있었다. 메디치 가문 역시 제국 5대 상단을 보유한 가문이니까.
‘모르겠군. 아직은 정보가 부족해.’
아직은 둘 중 누구라고 단정 짓기 어려웠다.
예상외로 제3의 인물이 아가레스와 손을 잡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가레스가 대륙 5대 상단 중 하나와 손을 잡았다는 정보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소득이었다.
“그렇군. 정보 고맙네.”
감사의 인사를 전한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좀 놀다 가지?”
바르바토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수시로 몸을 들썩이는 것이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더 있다간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공사다망한 몸인지라.”
발타자르의 단호한 거절에 바르바토스가 미련 없이 그를 보내주었다.
어차피 먹지도 못할 것.
괜히 눈앞에 있으면 속만 쓰릴 뿐이니까.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대충 손을 흔들어 준 그녀가 침상 위에 몸을 내던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레티시아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반색하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는 거죠? 빨리 가요.”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 빌어먹을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돌아가는 대로 한동안 에르제 옆에 꼭 붙어 있을 거야.’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광경을 볼 줄 알았다면 절대 발타자르를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자자. 가요, 어서.”
재촉하지만 선뜻 앞장설 용기가 없던 그녀는 슬그머니 발타자르의 등 뒤에 바짝 붙었다. 그런 그녀를 발타자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그녀가 뻔뻔한 얼굴로 턱짓했다.
“안 갈 거예요?”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