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24화
황궁에 입궁한 발타자르는 무언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심각한 표정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관료들.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분명 무언가 일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가웨인. 에르제 황녀와 린을 부탁하네.”
아이린과 농담을 주고받던 가웨인이 발타자르의 눈빛을 보곤 표정을 굳히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의 어깨를 토닥이듯 두드린 발타자르가 아이린과 에르제에게 작별을 고하고선 분주한 걸음으로 황태자의 궁으로 향했다.
그렇게 걸어가기를 잠시.
복도의 반대편에서 발타자르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메이드들이 고개를 숙이며 길 양옆으로 비켜났다.
그런 그들을 발타자르가 지나쳐 가려는 순간 메이드 하나가 발타자르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를 받아 든 발타자르가 그것을 펼쳐보는 순간.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프리드리히 공작 사망 / 메디치 공작가 서부 진출]
메디치 공작가의 서부 진출은 제쳐 두고서라도 프리드리히 공작의 사망은 심각한 문제였다.
단순히 동부세력의 수장이 사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무슨 연유로 이렇게 급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동부는 한 치 앞도 모르는 혼란 속에 빠져들게 될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공작가의 후계 구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작가의 후계들은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또한, 대공자가 뛰어난 능력과 통솔력으로 가문 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현재 프리드리히 공작가를 떠받치는 두 봉신이 문제였다.
거대 해적 선단을 이끌던 해적 출신의 발바롯사 하이레딘 백작과 동부 토착 세력의 대표 격인 에드워드 블랙비어드 후작.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세력을 이끌고 있는 야심가들이었다.
프리드리히 공작의 생전에는 그의 강력한 통솔력으로 그들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가 급사한 이상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야망을 감추지 않고 프리드리히 공작가를 향해 이를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중앙이 움직일 여력이 있는 상황이었다면 이것은 기회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현재 중앙은 마왕들의 준동으로 쉬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동부의 내부 분열이 시작된다면 당장 동부에서 날뛰고 있는 마왕들과 맞물려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까지 치달을 확률이 높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급사한 것이지?’
회귀 전.
프리드리히 공작과 그가 이끄는 함대를 수몰시킨 포르네우스가 살아 있었다면 모를까 그는 진작에 목이 달아난 지 오래였다.
한데 그가 이렇게 갑작스레 사망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동부 귀족들의 짓인가? 아니면…….’
발타자르의 머릿속에 칼 프란츠 대공과 메디치 공작가가 떠올랐다.
이 절묘한 시기에 서부 진출을 시작한 메디치 공작가나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칼 프란츠 대공가나 의심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지만 그들이 동부를 손에 넣기 위해 수작질을 부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 벌어질 동부의 분열을 막아야만 했다.
‘어찌 되었든 동부의 분열은 막아야 한다.’
기껏 공을 들여 힘의 균형추를 기울여 놓았는데 이대로라면 균형추가 다시 균형을 찾아갈 확률이 높았다. 그건 정말 피해야만 할 일이었다.
‘바르바토스에게 빚을 지더라도 그녀를 움직여야겠군.’
그녀를 움직여 동북부 방면을 압박해 준다면 프리드리히 공작가는 숨통이 트일 것이고 직후 대대적으로 전쟁 물자를 지원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생각대로만 일이 풀린다면 프리드리히 공작가에게 큰 빚을 씌워둘 수도 있었다.
물론 세상일이 다 그렇듯 마냥 생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신시아에게 프리드리히 공작의 사망에 대해 조사하라 전하게.”
“그렇게 할게요.”
답하는 메이드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이에 이상함을 느낀 발타자르가 메이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시아.”
“이제야 알아차리신 거예요?”
메이드로 위장한 신시아가 방긋 웃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주변의 메이드들을 둘러보았다. 펑퍼짐한 옷 위로 드러나는 단련된 육체가 그들이 단순한 메이드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단체로 이직이라도 한 것인가?”
발타자르의 농담에 신시아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건 나중에 봐서요. 그보다 보고드릴 것이 있어요.”
“말하게.”
“남부 방어선에 투입되어있던 대공가의 병력이 동부 인근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이 호기를 놓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아요. 다행히 아직은 동부의 일에 개입할 명분이 없으니 동부 인근에 배치해 두기만 할 것 같지만요.”
신시아의 말에 발타자르가 코웃음을 쳤다.
칼 프란츠 대공은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이 호기를 마냥 지켜볼 멍청한 인물이 아니었다.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부에 개입을 시작하겠지.
발타자르는 이를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만약 칼 프란츠 대공이 동부를 손에 넣게 된다면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랐다. 현재의 대공이 어떤 의중을 품고 있던지 변수는 최대한 배제해야 했다.
“알겠네. 계속 수고해 주게.”
신시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발타자르는 서둘러 황태자의 궁으로 향했다.
* * *
“마침 잘 왔네.”
발타자르가 황태자의 궁에 도착하자 슈텔리앙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아르세우스가 그를 반겨주었다.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슈텔리앙 후작이 옆자리를 내어주며 묻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드리히 공작이 사망했다는 것 정도만 들었네. 어찌 된 일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답한 것은 아르세우스였다.
“우리가 들은 것도 거기까지일세. 프리드리히 공작이 사망하였으니 그의 장남을 차기 공작으로 인정하는 위임장을 보내 달라 청하더군. 한데 말일세. 내가 따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만간 동부에 내전이 벌어질 것 같더군.”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여기 슈텔리앙 후작은 당장 여유가 없으니 방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네만 내 생각은 다르다네. 좀처럼 없을 기회이네. 그러니 여유가 없더라도 이참에 동부에 빚을 씌워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제 생각도 황태자 전하와 같습니다.”
발타자르의 대답에 아르세우스의 안색이 대번에 환해졌다.
“하지만 공작 각하. 지금은 마왕들을 처리하는 것에 전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그들의 손에 무너진 영지만 수십입니다. 이대로 더 지켜만 보다간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슈텔리앙 후작이 부정의 뜻을 내비치자 아르세우스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동부에 아크 메이지를 한 명 지원해 주면 될 일 아니겠는가? 그 정도 여유는 되지 않나.”
“마왕의 토벌은 시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마왕이 한둘도 아닌 상황에서 그들을 상대할 전력인 아크 메이지를 동부에 투입한다면 그만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마왕의 수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병력을 지원해 주는 것은 어떻겠는가?”
“그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황태자 전하. 당장 눈앞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외면하는 것은 군주의 도리가 아닙니다. 분명 동부의 상황은 절호의 기회이지만 그보다는 마왕의 토벌이 우선입니다.”
슈텔리앙 후작의 완고한 태도에 아르세우스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의미 없는 논쟁만 이어질 것이 뻔해 보였다.
“황태자 전하. 제 생각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발타자르가 나서며 말하자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려 한다고 생각했던지 아르세우스가 반색하며 수락했다.
“오! 공작. 말해보게.”
“우선 동부에 개입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뤄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발타자르의 말에 아르세우스의 표정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어찌 그런가?”
“중앙에서 당장 동부에 개입한다고 해도 큰 이득을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후작의 말대로 중부와 서부에서 준동하는 마왕들을 토벌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동부에 개입하는 것은 분란이 본격화된 이후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면 공작의 생각은 동부에 개입하는 것은 찬성하되 당분간 지켜보자는 쪽인가?”
아르세우스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물론 지금 개입한다면 동부의 분열을 조기에 막아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서야 프리드리히 공작가의 목에 목줄을 걸기 힘들 것입니다.”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슈텔리앙 후작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분란이 시작되고 개입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지원이라고는 물자를 지원하는 것이 고작일 텐데 그 정도 지원으로 목줄을 거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슈텔리앙 후작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바르바토스를 움직여 북동부를 압박하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좋은 수였지만 사실 가능하다면 이 방법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은 마왕들이 대화가 통하는 존재가 아닌 타협이 불가능한 인류의 적이라는 인식을 각인시켜야 할 때였다.
그런데 발타자르가 바르바토스를 움직이자는 제안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마왕이 타협 가능한 존재라고 알려지게 될 것이고 이후 흘러갈 상황은 뻔했다.
서부와 중부에서 날뛰는 마왕들과 싸우기보다는 회유하고 타협하는 방향으로 여론이 기울 것이고 아무리 발타자르가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여론을 무시한 채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아니, 가능은 하겠지만 그것은 분란을 초래할 뿐이었다.
그건 결코,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단결하여 마신의 강림을 저지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현 상황에서는 바르바토스를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만약 프리드리히 공작가가 내분으로 무너지고 그들의 자리를 마왕 혹은 대공이 차지한다면 또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이럴 땐 시간이 촉박한 것이 원망스럽군.’
시간이 여유로웠다면 머리 아프게 지방의 세력들을 끌어안는 방법 뿐만 아니라 모조리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찌 되었든 결국, 선택해야만 했다.
마왕이 타협 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는 문제점을 안고 동부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동부가 마왕 혹은 대공에게 장악당해 균형추를 무너뜨리도록 방관할 것인가.
어느 쪽을 택하든 문제점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대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발타자르가 선뜻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기색만 내비치자 이것을 의아하게 여긴 슈텔리앙 후작이 물었다.
이에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기대감이 담긴 눈빛으로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발타자르가 결정을 내렸다.
“한 가지. 생각해 둔 방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