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22화
기사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선 퀴니우스는 냉랭한 기운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뭐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퀴니우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들을 제외한다면 그들의 신변에 위협으로 다가올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안감은 점점 그 몸집을 부풀려 나가며 퀴니우스의 목을 옥죄어 왔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소?”
비단 퀴니우스만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아닌 듯 레물라스가 귓속말로 말을 걸어왔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혹시 발타자르 공작이…….”
퀴니우스가 레물라스의 우려 섞인 목소리를 중간에 끊어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발타자르 공작의 권세가 아무리 드높다 한들 독단적으로 일을 벌이지는 못할 테니 말이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니오? 설령 돌아가려고 한들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도 않고.”
퀴니우스는 강제로라도 호위를 끌고 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물론 그렇게 했다가는 발타자르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되었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되어주었을 테니 말이다.
“설마 우리 몸에 위해를 가하기야 하겠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워낙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보니 혹시 몰랐다.
“자, 갑시다.”
그러나 막상 일이 닥쳐오지 않는 이상에야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본래 예정대로 움직일 수밖에.
* * *
발타자르는 오른팔에 턱을 괴고선 삐뚜름하게 앉아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두 대신을 바라보았다.
“그래. 자네들이 일의 주동자들인가?”
그의 서늘한 음성에 대신들이 선뜻 그렇다 대답하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여기까지 와서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맞나 보군.”
답은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저들이 주동자라는 것은 보고받아 알고 있었으니 확인 차원에서 물어본 것뿐이었다.
“자네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발타자르가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자 두 대신이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말했다.
“공작 각하의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저도 법부대신과 같은 뜻입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저들은 결코 자신들의 몸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리라 자신하는 것 같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저들을 따르는 귀족들과 관료들의 수가 적지 않은 데다 슈텔리앙 후작과 황제파 일부도 이번 일에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발타자르가 쉽게 손을 쓰기 힘든 상황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내 처분에 따르겠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발타자르의 물음에 두 대신이 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단 말이지.”
동시에 그의 입가에 냉기가 서렸다.
어차피 저들의 처우는 결정되어 있었다.
“선택지를 주지.”
말하며 발타자르가 품에서 단검을 툭 내던졌다.
이것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는 두 대신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순응하고 자결하거나, 저항하고 함께 죽게.”
정황상 저 ‘함께’라는 말은 퀴니우스나 레물라스를 칭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가족 혹은 가신들을 뜻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넋을 놓고 있다가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대로 목숨을 잃을 판국이었다. 하여, 퀴니우스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언성을 높였다.
“저희를 해하신다면 아무리 공작 각하시라고 해도 무사하시지는 못하실 겁니다!”
그러자 조금 정신이 또렷해졌다.
짧은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끝에 그가 한결 여유로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공작 각하께서 저희를 겁박하시는 명분은 제국의회를 통해 결정된 경무청의 설립을 방해한 것이 전부입니다. 물론 제국의회의 결정에 반하는 일을 한 것은 중죄이지만 그것이 문무백관의 으뜸인 대신들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는 아닙니다. 따라서! 제국 관료 전체를 적으로 돌리시려는 것이 아니시라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퀴니우스의 말대로 저들이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것이 목숨을 해칠 정도로 중죄는 아니었다.
요컨대 명분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무청의 일로 불만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명분 없이 중신을 둘이나 처형한다면 그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될 것이라 여긴 귀족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날 것이 뻔했고, 남부와 동부가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개입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제아무리 발타자르가 강력한 군세를 구축하고 있다고 해도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지 못하듯 결국 북부로 물러나야만 했을 것이었다.
“확실히. 이것이 내 독단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그대의 말대로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그것은 남부나 동부가 중앙에 개입할 만한 여유가 있었을 때나 성립되는 이야기였다.
현재 제국은 마왕들의 대대적인 준동으로 인해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한다고 한들 그것은 중부지역에 한정될 것이 뻔했다.
그마저도 사실 그다지 현실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서로를 밀고하며 제 살길을 찾아 내부 분열을 일으키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법부대신 퀴니우스 힐트만. 그리고 농상공부대신 레물라스 메난은 황명을 받들라.”
발타자르의 입에서 자신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몸을 흠칫거렸던 두 대신은 황명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공통된 생각을 떠올렸다.
‘발타자르 공작의 독단이 아닌 황태자까지 개입된 일이었구나!’라고 말이다.
두 대신이 망연자실한 가운데 그들의 죄목이 하나둘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그들이 벌인 일도, 그렇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판국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두 대신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좋은 생각이 없소?’
‘지금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하지만 그렇게 한들 달리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발타자르와 황태자가 작정하고 움직인 상황이니 지금은 목숨을 구걸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레물라스였다.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체면 따윈 내던진 채 땅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읍소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퀴니우스는 힐끗 발타자르의 안색을 살폈다.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
처음에는 그 역시 레물라스처럼 살려달라 애원할 생각이었지만 저 무감정한 얼굴을 보자 그런다고 마음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여 퀴니우스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설령 황태자 전하의 뜻이 함께하신다고 한들 저희의 파벌들은 물론이거니와 경무청의 설립에 부정적인 뜻을 품은 귀족들을 적으로 돌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들 역시 모두 내치실 생각이십니까?”
퀴니우스의 말에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말만 반복하는군. 할 말은 그것뿐인가?”
직접적으로 답하지는 않았지만 여차하면 반발하는 귀족들을 모두 쳐낼 것만 같은 기세에 퀴니우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들을 모두 내치신다면 국정이 마비될 것입니다!”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해두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서, 서부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조만간 수습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것일세.”
마왕들에 의해 서부가 점령당한다면 제국 전체가 마왕들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치밀한 여론 조작과 선동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부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빌 헬름 공작가의 잔재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을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작금의 서부는 빌 헬름 공작의 자제들이 벌인 추악한 만행들이 밝혀지며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마왕들이 날뛰며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이게 된다면.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제국 황실의 이름으로 그들을 구원하고 나선다면.
빌 헬름 공작가에 대한 믿음은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고 반대로 황실에 대한 믿음은 비할 데 없이 굳건해질 것이었다.
마왕에 대한 경각심을 키우고 황권을 강화시킨다.
이만한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미쳤구나! 공작, 그대는 실로 광인이다!”
발타자르의 의도를 깨달은 퀴니우스가 그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서부의 백성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다니! 그것이 위정자가 할 짓인가!”
그의 지적은 틀렸다.
발타자르는 서부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서부에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상황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궤변이었지만 그래도 사실이었다.
회귀 전의 흐름과 달리 강경파의 수장 아몬이 서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상 발타자르라고 해도 섣부르게 서부를 구원하겠다 나설 수는 없었다.
아몬과 그를 따르는 마왕들을 상대하려면 중부를 안정화하고 북부와 중부의 힘을 한데 모아야만 했다.
따라서 지금 당장은 서부에 손을 쓸 수 없으니 그 상황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냐!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 제국은 사분오열할 것이다! 네놈 때문에 그리될 것이다!”
발타자르가 소리치는 퀴니우스의 멱살을 잡아채 끌어당겼다.
“잘 들어라. 얼간이 같은 놈아.”
무척이나 낮은.
흡사 맹수가 위협하듯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들이 도래했고, 네놈들이 무시했던 위협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그의 기세에 압도당한 퀴니우스는 숨 한 번 내쉬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대비하려 했으나 제국을 좀먹는 네놈들 때문에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다.”
억눌려왔던 분노가 표출되었다.
발타자르의 눈동자에서 붉은 귀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니 감히 내 앞에서 제국을 위하는 척하지 마라.”
툭- 하고 쥐었던 멱살을 놓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던 퀴니우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띠었다.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살의였다.
두 대신이 숨을 집어삼켰다.
“네놈들 간신들을 모조리 축출해 내는 것이 그 시작이다.”
* * *
이날.
법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을 시작으로 수십에 달하는 귀족들의 목이 달아났다.
전 대신들의 역모 사건 때와 비견될 정도의 규모였다.
물론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몇몇 귀족들이 사로잡힌 귀족들의 사병들을 규합하여 저항하려 했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발타자르의 군대에 의해 무산으로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대규모 처형식으로 인해 한순간 국정이 마비될 뻔하기도 했지만, 황태자와 발타자르가 미리 안배해둔 이들이 재빠르게 빈자리를 채우며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화시켰다.
이 사건은 며칠 후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며 큰 파장을 일으켰으나 직접 나서서 항의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다음 차례가 분명한 중부의 귀족들마저도 말이다.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때문에, 제 발 저린 중부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제도로 달려가 자신의 죄를 고하니 그 행렬이 끝을 모르고 길게 이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