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21화
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타오르는 불길.
도망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를 쫓는 마물들까지.
인세에 지옥이 펼쳐졌다.
“불태워라!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라! 이 땅에 새로운 시작을 알려라!”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불의 거인이 팔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거센 불길이 솟구치고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광경을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지휘관이 곁에 있던 기사에게 소리쳤다.
“서둘러 제도에 연락해라. 마왕이 나타났다고!”
지휘관은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불의 거인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상황은 실로 절망적이었다.
어림잡아도 수만은 족히 넘을 것만 같은 마물들.
반면 성의 병사들은 모두 합쳐 3천이 채 되지 않았다.
최대한 버텨보기는 하겠지만 저들을 상대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그때, 제도에 통신을 보내기 위해 떠나갔던 기사가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지휘관이 묻자 기사가 낭패감이 어린 얼굴로 답했다.
“통신구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기사의 말에 지휘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구나.”
성벽을 물 샐 틈 없이 포위한 마물들 때문에 전령을 보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괜히 전령을 보내겠답시고 성문을 열었다가는 단박에 마물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성이 함락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전령을 보낸다고 해도 과연 전령이 살아서 제도로 향할 수 있을지마저도 미지수였다.
“슈미트라시여…….”
지휘관이 애달픈 목소리로 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의 부름에 답한 것은 신이 아닌 마왕이었다.
“인간들이여! 새로운 시대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라!”
강경파의 수장.
서열 7위.
염옥의 아몬이 내지른 주먹이 성벽을 강타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그래서. 지금 바로 의회에 참석하라는 말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군기가 바짝 든 사내가 힘차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사내는 제국의회에서 보낸 전령으로, 발타자르가 의회에 참석하기를 바란다는 전언을 전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그렇군. 잘 알겠으니 이만 가 보게.”
“옛! 그러면 언제쯤 도착하신다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전령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의회에는 참석하지 않을 걸세.”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발타자르의 불참 선언에 전령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발타자르 가로 향하기 전 의회의 지체 높은 귀족들에게 만약 발타자르가 불참한다면 변방의 한직으로 발령 날 것이란 경고와 함께 반드시 발타자르의 참석 소식을 받아오라며 신신당부를 받았던 그였다.
그런데 만약 이대로 발타자르의 불참 소식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그들의 경고대로 한직으로 발령 날 것이 뻔했다.
전령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불참하시는 연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순간 발타자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전령은 아차 싶었다.
눈앞의 사내가 누구이던가.
차기 황제로 점쳐지는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가장 총애하는 인물이자 제국 최고의 권력자로 그 위명을 떨치는 발타자르 공작이었다.
한낱 전령 따위가 그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큰 무례나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겠지만, 한직으로 발령 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무례를 범해 버렸다.
“저…… 그, 그것이…….”
전령이 두려움에 몸을 떨며 발타자르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도 화가 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불참하는 이유라…….”
발타자르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전령의 초조한 눈동자가 발타자르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툭-
이윽고 발타자르의 손가락이 정지했다.
이에 전령의 눈동자가 천천히 발타자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기가 내려앉은 얼굴.
순간 전령은 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직접 찾아오라 전하게.”
“……예?”
저도 모르게 되물은 전령이 스스로를 질책했다.
같은 실수를 또 범하다니!
멍청해도 이리 멍청할 수가 있을까!
전령이 몸을 움츠리며 슬쩍 발타자르를 바라보자 그가 축객령을 내렸다.
“그리 전하면 알 걸세. 이만 가 보게.”
“옛! 바로 전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고 제대로 대답한 전령이 허둥지둥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직접 찾아오라 했다고?”
“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의장에서 발타자르의 참석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귀족들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불참 소식을 전해온 전령의 보고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정황상 누구를 지목하여 한 말인지는 뻔했다.
이번 경무청의 설립에 딴지를 걸었던 이들을 지목하는 것이 분명했다.
“크흠.”
레물라스가 헛기침을 하더니 퀴니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하십니까. 어서 공작 각하를 모셔오지 않고서.”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건가?”
“아시지 않습니까?”
최대한 침착하게 반박해 보려 했지만, 속을 긁어대는 레물라스의 능글맞은 모습에 결국 퀴니우스의 분통이 터졌다.
쾅-!
거칠게 테이블을 내려친 퀴니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레물라스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따지고 보면 네놈도 공범이 아니냐! 그렇다면 나만 갈 것이 아니라 네놈도 함께해야지!”
“글쎄,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말 조금 보탠 것 가지고 트집 잡지 말아주시겠습니까?”
“레물라스으으!”
명색이 최고위 관료라는 작자들이 저리 한심한 모습만 내비치자 슈텔리앙 후작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 대신들보다 더 엉망이군.’
차라리 전 대신들이 저들보다 나았다.
그들은 적어도 그 탐욕만큼이나 능력이라도 있었으니까.
‘차라리 무리해서라도 제대로 된 이들을 앉혔어야 했어.’
전 대신들의 사망 이후 공석으로 인해 자칫 정국에 큰 혼란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당시 가장 권력이 컸던 이들이 대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방관했던 것이 실수였다. 이제 와 후회해 봐야 이미 늦어버렸지만.
탕탕-
슈텔리앙 후작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란을 진정시켰다.
“다들 진정하게. 그리고 법부대신께서는 지금 바로 공작 각하를 모시러 가게.”
후작의 말에 퀴니우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레물라스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내무대신님! 어째서 저만…….”
“농상공부대신도 함께할 것이니 그리 억울해하지 말게.”
그 말에 레물라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자네들 두 사람이 이번 일에 관련된 이들의 대표자 아니던가. 그러니 군말 말고 다녀오게.”
이렇게 말하는 슈텔리앙 후작 역시 본래는 저들과 함께 발타자르의 저택으로 향해야 했지만 지금 그는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잠시 후면 도착할 황태자의 진노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서두르게. 자칫하다간 발타자르 공작 각하는 물론 황태자 전하의 진노까지 함께 받아내야 할 테니 말일세.”
후작의 말에 두 대신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전 대신들이 정국을 장악한 이후 제국의 관료들은 그들에게 물들어 그 뿌리부터 썩어버렸다.
이들을 한 번에 모두 솎아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제국이 흔들릴 테니까.
따라서 이것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 발타자르는 방관했다.
제국의 안위 외에는 관심이 없는 우직한 충신을 연기하며 큰일이 아니고는 제국 국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황태자의 신임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전 대신들의 그늘에 숨어 있던 간신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들인 덕분에 발타자르의 의도대로 전 대신들의 사망 이후 숨죽이며 사태를 관망하던 간신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석이 된 대신들의 자리를 그들이 차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비어 있는 관직에 제 사람들을 채우며 차근차근 정국을 다시 휘어잡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발타자르는 여전히 방관했다.
때를 기다린 것이다.
그들이 제 주제를 모르고 자신에게까지 손을 뻗을 때까지.
그리고 이제 기다렸던 순간이 다가왔다.
“가웨인.”
“예, 장군.”
“병사들은 모두 준비가 되었는가?”
“예, 지시하신 대로 명부에 적힌 귀족들의 저택 인근에서 대기 중입니다. 또한, 각 성문에도 저희 사람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빠져나갈 틈은 없습니다.”
가웨인의 대답에 발타자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한데 제도에서 허가 없이 무력 행위를 벌여도 되는 것입니까? 자칫 정적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지 염려됩니다만.”
가웨인의 우려 섞인 물음에 발타자르가 문제없다는 듯이 답했다.
“괜찮네. 이미 황태자 전하와는 이야기가 끝난 사안일세.”
이에 가웨인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거칠 것이 없겠군요. 특히 트리스탄 경이 기뻐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가웨인의 농담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어 보였다.
* * *
레물라스와 퀴니우스가 발타자르의 저택에 도착한 것은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노을로 인해 세상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풍경은 마치 두 사람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했다.
“먼저 가시지요.”
“아닐세. 자네가 먼저 가시게.”
저택 앞에 도착하고서도 두 사람은 서로 먼저 갈 것을 권하며 다투었다.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의 다툼은 결국 나란히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후우. 자, 가세.”
긴장되는 듯 길게 심호흡을 한 퀴니우스가 한걸음 걸어 나가며 말하자 레물라스가 그와 발맞추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두 사람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저택을 지키던 군타낙스 기사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우리가 누구인 줄 모르느냐?”
퀴니우스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묻자 그들의 앞을 막아섰던 기사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따라오십시오.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두 대신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그들이 이끌고 온 호위들 역시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군타낙스 기사들이 호위들을 제지했다.
“호위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기사의 말에 퀴니우스가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크흠. 내 호위들인데도 함께하지 못한단 말이냐?”
“각하의 명이십니다.”
기사의 말에 퀴니우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불쾌했지만 발타자르에게 용서를 구하러 온 상황에서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만나길 기대하지.”
퀴니우스가 서슬 퍼런 경고를 남기고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가 그런 퀴니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제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제 발로 걸어가는군.’
물론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