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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120화 (120/183)

공작이 회귀함 120화

“어서 오게, 공작.”

발타자르가 제도의 성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접하기가 무섭게 슈텔리앙 후작이 소수의 수행원을 대동한 채 마중을 나왔다.

혹여나 발타자르가 곧장 황궁으로 향하지 않고 저택에 칩거할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어찌 보면 호들갑을 떤다고 볼 수 있었지만, 현재 제국의 상황을 보자면 슈텔리앙 후작이 이런 행동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마왕들의 준동 이후 제국 전역에서 연신 중앙에 지원 요청을 보내왔지만, 중앙의 힘만으로는 당장 중부에서 난동을 부리는 마왕들을 상대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남부와 동부는 저들의 땅에서 날뛰는 마왕을 처리하는 데 급급하고, 서부는 중앙에 여력이 없어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기껏 점령한 서부가 마왕들의 손에 떨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슈텔리앙 후작, 아니, 중앙이 발타자르의 복귀를 애타게 기다린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현재 여유가 되면서 강력한 군을 보유한 것이 바로 발타자르이기 때문이었다.

“후작께서 이곳까진 무슨 일인가?”

슈텔리앙 후작이 직접 마중을 나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음에도 발타자르가 의뭉스레 물었다. 이에 후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하하. 황태자 전하께서 중신들을 소집하여 황궁으로 향하던 차에 공작께서 복귀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궁으로 가기 위해 부랴부랴 달려왔소이다.”

“그런가?”

발타자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것 참……. 황태자 전하께는 실로 송구스럽지만 지금 당장 궁으로 향하기는 힘들 것 같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오?”

후작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 경무청의 설립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아 그것을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다네. 아! 물론 현재 제국의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경무청의 설립 역시 제국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이지 않은가. 그러니 경무청의 설립을 뒤로 미루어둘 수도 없는 일인지라 무척 곤란하다네.”

그제야 슈텔리앙 후작이 발타자르의 진의를 깨달았다.

경무청의 설립 목적은 마왕의 토벌과 용사의 통제를 위한 것이었지만, 경무청에게 주어진 막대한 권한들은 자칫 귀족들의 목에 목줄을 채우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귀족들은 발타자르를 두려워하여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지지부진 시간을 끌고 있었다.

발타자르는 이것을 지적하며 입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발타자르가 입궁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 문제라면 이번 일을 해결하는 대로 내 도움을 드리겠소.”

후작이 발타자르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미안하군. 그리고 서부는 이제 총독부의 관할이 아니던가?”

말인즉 내 도움을 받고 싶다면 경무청의 설립 문제를 해결하고 오란 뜻이었다.

“이만 가보겠네. 황태자 전하께는 자네가 잘 말씀드려주게.”

발타자르가 말을 몰아 슈텔리앙 후작을 지나쳐갔다.

* * *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멀어져 가는 발타자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슈텔리앙 후작이 혀를 찼다.

몇몇 귀족들이 일을 꾸미는 것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후작은 모른 체했다.

경무청의 설립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경무청에 부여한 ‘징집권’이 문제였다.

비상시 경무청장의 판단에 따라 보고를 생략하고 해당 영지의 군을 징집,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것은 귀족들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었다.

징집권을 부여하는 본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이는 필연적으로 제국 귀족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묵인했다.

발타자르가 제아무리 제국 최고의 권력자라고 해도 귀족들의 여론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일정 선에서 타협하여 절충안을 내어놓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에 일어난 마왕들의 준동만 아니었다면 슈텔리앙 후작의 예상대로 일이 흘러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천운이 발타자르 공작의 손을 들어주었군.”

슈텔리앙 후작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뒷공작을 벌여 경무청 설립에 딴지를 걸었던 귀족들 대부분은 이번에 점령한 서부의 영지를 하사받은 이들이었다.

이대로라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저들의 영지가 마왕들의 수중에 떨어질 판이니 발타자르가 서둘러 마왕들을 물리쳐 줄 것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따라서 그들은 선택해야만 했다.

경무청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서든지.

아니면 이번에 하사받은 서부 영지를 포기하든지 말이다.

그들이 내놓을 답이야 뻔하긴 하지만.

“하아……. 황태자 전하께서 크게 진노하시겠군.”

물론 그전에 이 소식을 접한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분노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말이다.

* * *

“오라버니!”

저택으로 돌아오자 늘 그랬듯이 아이린이 달려와 품에 안겨들었다.

매번 있는 일이다 보니 이제는 저택에 돌아왔을 때 아이린이 안겨들지 않는다면 되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잘 있었느냐?”

“네! 오라버니도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

자연스레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남매간의 오붓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순간. 방해꾼이 나타났다.

아이린과 함께 발타자르의 마중을 나왔던 소녀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그에게 인사했다.

“에르제 프락시온이 발타자르 공작 각하를 뵈어요.”

하얗고 동글동글하다.

에르제 황녀의 첫인상이었다.

뽀얀 피부에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그녀는 아이린과는 다른 의미로 귀여웠다.

“반갑네. 에르제 황녀.”

발타자르가 아이린을 내려놓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면서 에르제의 뒤편에 서 있던 엘룬 자매를 바라보았다.

눈치가 빠른 엘이 발타자르의 눈동자에 담긴 의문을 읽어내곤 말했다.

“주인님께서 떠나신 날에 레티시아 님과 함께 방문하셨어요. 레티시아 님은 급한 일이 있으시다며 먼저 가셨지만요.”

에르제를 자신의 저택에 머물게 할 것을 제안한 그 날 바로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저어…… 제가 머무는 것이 폐가 된다면…….”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에르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말하면서도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황궁에서 어떤 생활을 보냈는지 알 만했다.

‘레티시아가 과보호를 할 만하군.’

당장 자신이라도 아이린이 저리 주변의 눈치를 본다면 품에 싸고돌 것이었다.

“아닐세.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으니 편히 쉬게.”

말하며 발타자르가 에르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흠칫-

이에 에르제가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보곤 발타자르가 속으로 아차 했다.

“이런. 미안하네. 린에게 해주는 것이 버릇이 되어 그만. 실례했네.”

발타자르가 황급히 사과하자 에르제가 괜찮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때, 아이린이 에르제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 거침없는 움직임을 보니 그동안 에르제와 제법 친해진 듯 보였다.

“황녀님. 저희 정원으로 가요. 저번에 못 보여드린 정령들을 보여드릴게요.”

“네! 좋아요!”

에르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자 아이린이 발타자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저녁에 뵈어요!”

그리 말하곤 아이린이 에르제와 함께 쪼르르 정원으로 달려갔다.

엘룬 자매 역시 발타자르에게 인사를 건넨 후 두 소녀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

언제나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좋다며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잠시간의 해후 이후 미련 없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니 심정이 복잡미묘해졌다.

“처음으로 생긴 친구이니 저리 들떠 계실 만도 하지요. 쓸쓸하십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

아주 조금.

쓸쓸했다.

“쓸쓸하셔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가씨께서도 이제 슬슬 장군께 졸업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가웨인이 발타자르의 속을 긁었다.

발타자르가 가웨인을 흘겨보자 그가 ‘이크!’하고 몸을 사리는 모양새를 하더니 빠른 걸음걸이로 도망쳤다.

“졸업이라…….”

언제까지고 품에 안고 살 수 없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게 찾아오기를.’

속으로 기도하며 도망치는 가웨인의 뒤를 쫓았다.

* * *

발타자르가 황태자의 부름에 불응했다는 소식이 의회에 전해지자 큰 동요가 일어났다.

“허허. 지금 서부가 마왕들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인데 고작 경무청의 일 때문에 의회에 불참하다니요.”

자비에고 주교의 사망 이후 그의 파벌을 흡수하여 크게 세를 일으킨 법부대신 퀴니우스 힐트만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는 경무청의 설립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크게 지적받을 만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경무청의 일 역시 제국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서부의 문제는 총독부가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농상공부대신 레물라스 메난이 발타자르를 두둔하며 나섰다. 이에 퀴니우스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부의 일은 제국의 일이 아니랍니까!”

퀴니우스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치자 레물라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누가 뭐랍니까. 전 그저 서부의 문제로 열린 의회에 발타자르 공작께서 불참하셨다고 불평할 일은 아니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게 그 소리지 않소!”

퀴니우스가 이리 흥분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마왕들의 준동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 이번에 그가 하사받은 서부의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왜 딴지를 걸어서는. 에잉.”

레물라스가 혀를 차자 퀴니우스가 그의 멱살을 잡을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뭐! 그게 나 혼자 좋다고 벌인 일이던가? 다들 같은 마음 아니었던가! 경무청이 설립되면 우리의 목에 목줄을 차게 되는 것인데 어느 귀족이 순순히 받아들이겠는가! 그리고 자네도 한 손 거들었지 않은가! 이제 와 발을 빼겠다는 말인가!”

“내가 언제 그랬소? 난 그저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좋다고 동조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며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이자 퀴니우스가 격분했다.

“너 이 새끼! 말 다 했냐!”

“허허. 법부대신이라는 자가 그리 체통이 없어서야.”

“뭐? 이 새끼야! 이리 안 와!”

퀴니우스가 자리를 박차며 레물라스를 향해 달려들려 하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그를 말렸다.

“퀴니우스 님. 진정하시지요.”

“자자, 이렇게 흥분하실 것이 아니라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들을 떨쳐내지 못한 퀴니우스가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장내가 진정된 듯하자 여태 침묵을 고수하던 슈텔리앙 후작이 입을 열었다.

“발타자르 공작의 뜻은 확고하네. 경무청이 설립되지 않는다면 결코, 도와주지 않을 걸세. 그렇다고 남부나 동부에 도움을 요청하자니 중앙의 체면은 둘째치고서라도……. 그들 역시 마왕들의 준동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니 섣불리 군을 지원해 주지 않을 걸세.”

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남부와 동부는 쉬이 지원해 줄 상황이 아니고, 설령 지원을 받더라도 그들이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올지 몰랐다.

반면 발타자르의 요구 조건은 하나였다.

경무청의 설립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

하지만 이것을 들어 줄 경우 경무청의 설립 이후가 문제였다.

“미리 말해두지만 서둘러 결정해야 할 걸세. 황태자 전하께서 이 일을 아셨다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번 일에 연관된 이들은 그분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일세.”

이것은 퀴니우스가 일을 벌이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했던 슈텔리앙 후작 역시 해당되는 말이었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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