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19화
마신을 강림하기 위해 신과의 계약을 통해 넘어온 용사들이 각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여러 무리로 나뉘었듯이 마왕들 역시 여러 개의 파벌이 존재했다.
마왕 중 바르바토스 같은 몇몇 독불장군들을 제외하면 크게 세 개의 파벌로 나뉜다.
첫째는 강경파.
마족 우월주의자들의 집단으로, 자신들의 힘을 자만한 나머지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서열 7위 염옥의 아몬이 수장으로 있으며 세 개의 파벌 중 가장 많은 30인의 마왕이 강경파에 속해 있다.
둘째는 반대파.
자신들이 중간계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하여 마신의 강림을 반대하는 이들이 속한 집단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인간들에게 유화적이란 뜻은 아니다.
서열 6위 찬탈자 발레포르 수장으로 있으며 20인의 마왕이 속해 있다.
셋째는 온건파.
마신의 강림에 찬성하는 것은 강경파와 같지만, 힘만으로 일을 해결하려 드는 강경파를 무식한 종자들이라 비웃으며 모략을 선호하는 성향이 강하다.
서열 2위 불사왕 아가레스가 수장으로 있으며 세 파벌 중 가장 숫자가 적은 17인의 마왕이 속해 있다.
벨레드는 이 세 개의 파벌 중 온건파에 속해 있는 마왕이지만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왕들은 대부분 강경파의 마왕들이었다.
파벌의 성향에 걸맞게 두뇌 회전이 빠른 온건파의 마왕들과는 달리 강경파의 마왕들은 대부분 조금만 구슬리면 제 뜻대로 움직여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번에 준동한 마왕의 숫자는 총 열넷으로 벨레드에게 현혹된 강경파의 마왕 아홉과 분위기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움직인 마왕이 다섯이었다.
이는 강경파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로 발타자르가 제거한 마왕들까지 포함한다면 실제로는 강경파 전체가 움직였다고 봐도 좋았다.
* * *
드라큐러스 백작 성의 사태가 정리된 이후 수하들과 함께 제도로 복귀하는 발타자르에게 하루가 멀다고 전령이 찾아왔다.
제국 전역에서 마왕들이 대거 준동하였으니 서둘러 제도로 복귀하라는 황태자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대장, 빨리 제도로 복귀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트리스탄이 달려오는 전령을 가리키며 물었다.
황태자와 제국의회가 지금까지 보내온 전령만 수십이었다.
그러나 발타자르는 이를 그다지 대수롭지 않아 하며 최대한 빨리 돌아가겠다는 말만 반복해 보낼 뿐이었다.
“되었네.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할 진통이었으니 말일세.”
이번 사태는 겉으로 보기에는 제국의 안위가 뒤흔들릴 것만 같은 중대한 사태였다. 하나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일전에 있었던 붉은 십자가 혁명단의 봉기와 비교한다면 그리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마왕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마왕이 아니었다.
상위 서열의 마왕을 제외한다면 중위 서열의 마왕은 마스터급의 강자만으로도 충분히 제압 가능했고 그 아래 서열의 경우는 다수의 로열 랭크만으로도 제압이 가능했다.
이는 대대적으로 마스터들과 아크 메이지들을 투입한다면 빠른 시일 안에 충분히 진압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회귀 전의 제국이라면 모를까 현재의 제국은 그럴 역량이 충분했다.
더군다나 이번에 준동한 마왕들은 강경파에 속한 이들로 자신들의 힘만 믿고 날뛰는 놈들이니 상대하기가 수월한 녀석들이었다.
정말로 위협적인 것은 모습을 숨긴 채 자중지란을 조장하는 마왕들과 강력한 권능을 지닌 상위 서열의 마왕들이었다.
상위 서열의 마왕은 천재지변 그 자체이며, 배후에서 음모를 꾸미는 마왕들은 상대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우니 말이다.
“그래요?”
가웨인이었다면 이번 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열변을 토하며 발타자르를 재촉했겠지만, 트리스탄은 그저 의례적인 질문이었다는 듯이 더 이상 이것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발타자르의 모습을 보니 한동안 전투는 물 건너간 듯하여 아쉬워할 뿐이었다.
드라큐러스 백작 성에서 한바탕 전투가 벌어진 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리 전투에 목말라 하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 아쉬워 할 것 없네. 급하게 움직이지 않을 뿐이지 마냥 손 놓고 방관할 생각은 없으니까.”
발타자르의 말에 트리스탄이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기분이 좋아진 듯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트리스탄을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세인가…….”
마왕들이 대대적으로 준동했다고 해도 이번 일로 제국의 권력 구도가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제힘만 믿고 날뛰는 놈들이니 금방 정리가 될 테지.
진짜 싸움은 그 이후부터였다.
이번 사태로 뒤에서 방관하는 마왕들은 제국의 전력을 가늠할 테고 결과에 따라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리라.
그것에 대한 대비는 모두 끝내둔 상태였다.
그러니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준비가 아닌 난세를 헤쳐 나가는 일이었다.
* * *
발타자르의 부탁을 받고 프리드리히 공작이 이끄는 동부군과 큰 전쟁을 치렀던 바르바토스는 최근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선을 바라보았다.
“뭐. 이제 됐나.”
발타자르가 원했던 시간은 충분히 끌어준 듯하니 이제 슬슬 휴전협정을 체결해도 될 듯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프리드리히 공작 가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하자며 사자들을 보내오던 참이었으니 시기도 딱 적절했다.
“그럼 당분간은 잠이나 자야겠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던 그녀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마력이 느껴진 곳에 시선을 주자 그곳에는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마족이 그녀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르바토스 님. 저는 아가레스 님을 모시고 있는 딜버튼이라고 합니다.”
“아가레스? 그 뼈다귀?”
딜버튼은 자신이 섬기는 이를 뼈다귀라 칭하는 바르바토스의 언사에 일순간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곧 안색을 고치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바르바토스가 피식 웃었다.
“그 음흉한 노친네 애가 맞긴 맞네. 그래서. 날 찾아온 목적은?”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북부에 마왕은 바르바토스 님뿐입니다. 즉 북부에 고립된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이대로라면 바르바토스 님의 목을 노리고 인간 놈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겠지요. 물론 바르바토스 님께서 바알 님에 비견될 정도의 강자인 것은 알고 있으나 인간들은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그러니 온건파에 들어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딜버튼의 말에 바르바토스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선 물었다.
“그게 끝이야?”
“물론 아닙니다. 바르바토스 님께서 온건파에 들어오신다면 아랫것들에게 먹일 인간 노예와 가축들을 주기적으로 지원해 드릴 것입니다. 또한, 인간들이 쓰는 무구도 원하시는 만큼 공급해 드릴 것이며 만에 하나 바르바토스 님이 위험에 처한다면 대대적인 지원군을 보내드릴 것입니다.”
“그만한 물자가 움직이면 인간들의 눈길을 피하기는 힘들 텐데?”
바르바토스가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딜버튼이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바르바토스다.
무려 바르바토스였다.
마계에서도 독불장군으로 유명한 그녀를 파벌에 가입시킬 수만 있다면 이는 큰 공적을 쌓게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들뜰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저희가 직접 보내드리지는 않습니다. 괜히 인간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저희와 손을 잡은 인간이 있습니다. 그자의 휘하에 큰 상단이 있으니 그 상단을 이용해 보내드릴 것입니다.”
“그게 누군데?”
“아직 저희 파벌에 들어오신다는 확답을 주시지 않으셨기에 그것에 대해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딜버튼이 얼굴 가득 미안한 기색을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에 바르바토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당연한 거지 뭘. 그런데 맨입으로 그만한 지원을 해주는 것은 아닐 테고. 파벌에 가입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야?”
“발타자르의 견제입니다.”
딜버튼의 말에 바르바토스의 눈이 빛났다.
“……그래?”
순간 딜버튼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가 다급히 고개를 숙인 것은 본능이었다.
퍼엉-
방금 전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딜버튼이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머리가 터져 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바르바토스 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변덕이 일었는지 갑작스레 살수를 가한 바르바토스의 행동에 딜버튼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에 바르바토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아니, 뭐. 필요한 건 다 캐냈다 싶어서 말이야.”
그녀의 서늘한 음성에 딜버튼이 몸을 움찔거렸다.
“처음부터 파벌에 들어오실 생각이 없으셨군요.”
“잘 아네?”
답하며 바르바토스가 재차 공격할 기색을 내비치자 딜버튼이 황급히 소리쳤다.
“저, 절 해치면 아가레스 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겁니다!”
아가레스의 위세를 빌린 협박이었다.
하지만 하위 서열의 마왕이라면 모를까.
이런 협박은 바르바토스에게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야, 너 내가 마계에서 절망이라는 수식언보다 뭐로 유명했는지 알아?”
딜버튼은 답하는 것보다 도주하는 것을 택했다.
그가 다급히 이동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미친년이야. 미친년. 바알도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은 노친네를 무서워할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딜버튼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후드득─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에 흥건히 묻은 피를 찝찝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아이 씨, 피 묻었네.”
그녀가 손에 묻은 피를 대충 옷에 닦아내고는 제도가 있는 방향을 응시하며 히죽- 웃었다.
“발타자르. 너 꽤 미움받고 있구나?”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발타자르를 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좋은 건수가 생겼구나 싶은 그녀였다.
* * *
산천초목이 무성히 자라 녹음이 우거진 숲과 대비되게 검게 물든 죽음의 땅.
그 경계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사내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얼굴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가 빽빽이 자란 푸른 수해가 그의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제국의 용이여…….”
사내의 눈동자가 분노에 휩싸였다.
“내가 돌아오는 날. 네놈이 이룩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리라.”
그러곤 다시 등을 돌려 죽음의 땅에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수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시는 겁니까?”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은빛 풀 플레이트로 무장한 여기사가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넬리사 경? 여긴 어떻게……?”
“인외의 길입니다. 꼭 가셔야 하는 겁니까?”
만류하듯 여기사가 묻자 사내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형제들과 수하들의 복수는 해야 하니까.”
“굳이 이 길이 아니라도 다른 길이 있을 겁니다.”
여기사가 재차 사내를 만류해 보지만 사내의 결심은 확고했다.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가신들에게도, 그리고 먼 길을 함께해 준 백성들에게도 미안한 일이지만 내게 남은 선택은 이제 이것뿐이라네.”
사내가 여기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는 여기 남게. 그동안 수고했네.”
그리 말하곤 사내는 죽음의 땅을 향해 재차 걸음을 내디뎠다.
“따르겠습니다.”
여기사가 사내의 곁에 다가서며 말했다.
이에 사내가 여기사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 말대로 인외의 길일세. 명예도 긍지도 없는 길이란 말이네.”
만류하는 사내의 말에 여기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상관없습니다. 주군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여기사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군세가 결연한 표정으로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혼자만 이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했건만 수하들의 눈길은 피하지 못한듯했다.
“어떠한 길을 가시던 저희는 주군을 따를 것입니다.”
여기사가 무릎을 꿇으며 외치자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수만의 군세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그들의 외침에 대지가 뒤흔들렸다.
깜짝 놀란 새들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이에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못 말리겠군. 그래, 가자. 형제들의 복수를 위해.”
지축을 뒤흔들며 사내를 비롯한 수만의 군세가 죽음의 땅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