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15화
드라큐러스 백작령에 발타자르가의 사자가 방문했다.
수행 인원들을 모두 포함해도 고작 십수 명밖에 되지 않는 조촐한 규모였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실제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우선 백작성 안에는 수십의 정보원이 흩어져 영지민들을 상대로 정보를 조사하고 있었으며, 성의 인근에는 갤러해드와 트리스탄을 비롯하여 발타자르 휘하의 내로라 하는 무장들이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매복하며 물 샐 틈 없는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만약 드라큐러스 백작이 벨레드와 손을 잡은 것이 확실하다면 백작과 그의 봉신들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
* * *
“흐음, 묘하게 조용하네요.”
수행원들과 함께 드라큐러스 백작 성에 진입한 에리스 할데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성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성 인근 마을의 활기찼던 모습들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마치 인형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공작님의 예상이 맞는 것 같은데요?”
에리스의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손채영이 행인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말했다.
“채영 양. 공작님이 아니라 공작 각하예요.”
에리스가 호칭을 지적하며 정정해 주었다.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이 땅에서 생활하고 살아가는 이상 귀족에 대한 예법은 지켜야 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발타자르의 휘하에 들어간 상황이니 호칭 같은 최소한의 예법 정도는 익혀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공작님이나 공작 각하나 높여 부르는 말인데 무슨 차이예요?”
손채영이 보기에는 두 호칭이 별다를 것 없어 보였는데 에리스가 굳이 정정해 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에리스가 아이 달래듯 자상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채영 양이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겠지만 귀족의 예법이란 것이 이 사소한 차이로 결정되는 법이랍니다. 그리고 귀족들은 이 예법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지요. 이제 저희는 발타자르 공작 각하의 가신들이니 각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최소한의 예법이라도 지킬 필요가 있답니다. 이해되시나요?”
에리스의 설명이 있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살던 세상에서 서민으로 살아왔던 그녀였기에 귀족의 예법이란 것이 허례허식만 가득한 불필요한 것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이 세계에 왔으니 이 세계의 법을 따르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해했어요.”
그런 그녀에게 에리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저와 함께 예법 공부를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네. 좋아요.”
* * *
드라큐러스 백작의 집무실.
푸른 핏줄의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창백한 피부의 사내, 드라큐러스 백작이 수하의 보고를 받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발타자르 공작의 사절단이 방문했다고?”
“예. 방금 성문을 통과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잠시 후면 내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드라큐러스 백작이 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발타자르 공작과 자신은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었다.
한데 이리 갑작스레 사절단을 보냈다는 것은…….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군.”
이것 말고는 발타자르의 사절단이 그의 영지에 방문할 이유가 없었다.
“곤란하군.”
드라큐러스 백작이 힐끗 제 수하를 바라보았다.
수하의 얼굴도 드라큐러스 백작과 같이 피부가 무척이나 창백했다.
또한, 동공이 붉고 피부가 털 하나 없이 매끈했다.
뱀파이어의 권속인 뱀피르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이었다.
“숨기기는 어려울 듯하군.”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모두 죽여 버리는 수밖에.
물론 그런 짓을 벌인다면 약간의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발타자르와의 전면전은 피할 길이 없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약간의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조만간에 주인과 밀약을 맺은 마왕들이 제국 전역에서 발호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발타자르는 자신의 영지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게 될 테니까 말이다.
“발타자르 공작이 직접 찾아왔다더냐?”
“아닙니다. 그의 가신인 에리스라는 자가 사절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다행이었다.
발타자르가 직접 찾아왔다면 제법 곤란했을 것이지만 그의 가신이라면 아무리 강해 봐야 고작 로열 랭크일 것이었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충분히 제압하는 것이 가능했다.
“고작 로열 랭크 따위로는 결코 이 성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드라큐러스 백작이 스산한 웃음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이봐요. 대체 에르제는 언제 북부에 보내줄 건가요?”
이른 아침부터 발타자르를 찾아온 레티시아가 팔짱을 끼고선 삐딱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제 황녀를 북부에서 지낼 수 있게 조치해 주고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발타자르에게 신종한 그녀였다.
그러나 몇 달째 발타자르가 약속을 이행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자 결국 참다못해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안 그래도 부탁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 왔군.”
“이봐요!”
레티시아가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발타자르를 부르자 발타자르가 집무실 벽면에 걸려 있는 대륙 전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바로 드라큐러스 백작령으로 향하게. 그곳에 내 수하들이 있으니 그들과 합류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게.”
“지금 뭐 하자는 건가요? 약속을 지키지 않을 셈인가요?”
발타자르가 깍지낀 손에 턱을 괴고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지긋한 시선에 레티시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에르제 황녀가 제 자매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기죽어 있는 모습에 너무 화가 나 무턱대고 발타자르를 찾아와선 언성을 높였지만, 눈앞의 사내는 제국 최고 권력자였다.
자칫 그의 눈 밖에라도 나는 날에는 그녀는 물론이거니와 에르제의 안전도 보장하기 힘들었다. 이성이 돌아온 그녀가 자세를 바로 하곤 발타자르의 눈치를 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부려먹을 땐 부려먹더라도 최소한 약속은 지키셔야죠.”
“내 분명 북부의 정리가 끝나는 대로 보내주겠다고 말했을 터인데? 그리고 내가 에르제 황녀를 비호한다는 사실을 황궁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무엇이 문제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레티시아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답했다.
“매번 그 말만 하고선 차일피일 일정이 미뤄지니까 그렇죠. 그리고 공작 각하께서 에르제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 이후에 그걸 시기한 황녀들이 에르제를 괴롭히는 일이 더 잦아졌다고요. 걔들이 어찌나 영악한지 증거나 증인 하나 남기지 않고 괴롭히는데 진짜 진절머리가 날 정도예요.”
이건 발타자르가 어떻게 손을 써줄 수 없는 문제였다.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닌 이상에야 형제간의 다툼에 발타자르가 개입하는 것은 모양새가 무척이나 우스웠으니 말이다.
“그럼 이렇게 하지. 에르제 황녀가 북부로 향하기 전까지는 내 저택에서 지내는 것으로 말일세.”
그렇지 않아도 다른 귀족들과 사적인 교류를 갖지 않는 발타자르 때문에 아이린에게 친구가 없는 것 같아 신경 쓰이던 차였다.
에르제 황녀와 아이린의 나이대가 비슷하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면야…….”
레티시아는 이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숨 막히는 황궁보다야 이곳이 에르제에게는 훨씬 나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주변에서 발타자르와 에르제를 두고 염문설이 퍼지기는 하겠지만 그건 발타자르가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었다.
“고마워요.”
레티시아가 고개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말했다.
“뭐 하는가?”
“네?”
“말했잖는가. 드라큐러스 백작령으로 향하라고. 에르제 황녀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야지 않겠는가?”
말하며 발타자르가 미소 짓자 레티시아는 그 미소가 몹시도 얄밉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알겠어요.”
* * *
쿠웅-
내성에 들어서자마자 성문이 순식간에 닫혔다.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던 손채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정답인 것 같은데요.”
성벽과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나 안내를 하기 위해 마중 나왔다는 집사의 얼굴이 괴상하리만치 창백한 것을 보면 드라큐러스 백작이 벨레드와 손을 잡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손채영의 물음에 에리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생긋 미소 지었다. 그 꽃과 같은 청초한 미소에 손채영이 묘한 표정으로 에리스를 바라보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에리스 님이 남자라는 게 믿겨 지지가 않네요.”
그녀의 말에 에리스가 부끄럽다는 듯이 제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웃어 보였다.
“봐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저보다 더 여성스러우시잖아요.”
“음…… 그건 채영 양이 사내다우셔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에리스의 농담에 손채영의 눈매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이에 에리스가 그녀에게서 도망치듯 앞서 걸어가더니 말했다.
“자, 긴장이 풀리신 것 같으니 이만 갈까요? 백작께서 기다리시겠어요.”
그런 에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손채영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같이 가요!”
* * *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의 앞에 도착한 손채영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밀려오는 짙은 피비린내에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냄새가 짙었다.
제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가 응접실의 내부를 바라본 순간.
“욱…….”
구역질이 밀려왔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핏물들.
천장에는 쇠사슬에 묶인 여인들의 시체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응접실의 중앙.
높은 단상 위에서 자리 잡고 앉아 있던 드라큐러스 백작이 에리스와 일행들을 반겨주었다.
“뭣들 하는가. 어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선.”
드라큐러스 백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연 일단의 무리가 일행들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표정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뱀피르들이었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에리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일행들을 이끌었다.
“자, 여기서 이러는 것은 실례이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말하곤 에리스가 앞장서며 응접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에리스와 그 일행들이 응접실 내부로 진입하자 쿵- 하고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그래. 발타자르 공작께서 무슨 연유로 내게 사절단을 보낸 것인가?”
드라큐러스 백작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묻자 에리스가 주변을 둘러보는 듯한 행동을 취하더니 이내 되물었다.
“확인 차원에서 묻습니다만. 마왕과 손을 잡으신 건가요?”
“대충 짐작하고 온 것이 아니던가.”
말하며 드라큐러스 백작이 바로 옆에 매달려 있던 시체의 목을 뒤틀었다.
그러자 시체의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손에 들고 있던 잔으로 받아낸 드라큐러스 백작이 피가 흘러넘치는 잔을 내밀며 말했다.
“한잔하겠나?”
드라큐러스 백작의 권유에 에리스가 돌연 손에 쥔 지팡이를 내던졌다.
퍼억─
그 갑작스러운 일격에 드라큐러스 백작은 반응 한번 하지 못하고 심장이 꿰뚫렸다.
쨍그랑.
백작의 손에 쥐고 있던 잔이 떨어져 내리고 그가 입에서 검붉은 피를 토해내었다.
“이 비겁한…….”
백작이 노기 어린 눈동자로 에리스를 바라보자 그가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머나. 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