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14화
똑똑-
자정이 지난 어느 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야심한 시각에 찾아올 이는 아무도 없을 텐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자 결국 여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똑똑-
때마침 또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여인은 몸을 흠칫 떨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집안은 무척이나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선뜻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녀는 벽을 만져가며 천천히 부모님의 침실로 향했다.
끼이익-
부모님의 침실에 도착한 그녀는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든 부모님을 조심스레 불러보았다.
“아빠, 엄마.”
그러나 낯에 있었던 농사일 때문인지 그녀의 부모님은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으으…… 대체 이 시간에 누구야.”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는 부모님을 한차례 원망스레 바라본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부모님의 침실을 벗어났다.
똑똑-
동시에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는 소리.
여인은 갈등했다.
문을 열어볼까?
아니면 그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모른 척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도와……주세요…….”
문 너머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여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덜컥-
그러곤 문에 설치된 빗장을 치워내곤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현관 앞에 있는 것은 도움을 구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시릴 듯 창백한 피부.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송곳니.
외형은 사람이었지만 여인은 본능적으로 눈앞에 있는 이가 괴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꺄…… 읍.”
여인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려는 순간 괴인이 여인의 입을 막았다.
“쉬이-”
순간 향긋한 냄새가 풍겨오는가 싶더니 서서히 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안…… 되는……데…….’
그것이 여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칼 프란츠 대공이 제도에 온다라…….”
간만에 아이린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여유를 만끽하던 발타자르는 갑작스레 찾아온 애슐리가 전해준 소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애슐리가 가져온 소문.
그것은 칼 프란츠 대공이 제도행을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대공가 측에서도 비상이 걸렸다던데. 각하께서 부리시는 암고양이가 이런 이야기는 안 해주던가요?”
애슐리가 테이블 위로 두 팔을 걸치고선 발타자르를 향해 몸을 숙였다. 덕분에 푹 파인 그녀의 가슴골이 훤히 보이며 발타자르를 유혹했지만, 발타자르는 거기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의 눈동자만을 응시하며 물었다.
“확실한 정보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애슐리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요. 대공 전하께서 정말 제도로 상경하실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공가에 그런 소문이 떠도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정보의 출처는?”
“가업 비밀이에요. 그보다 슬슬 공작가에도 안주인을 두셔야 할 것인데 혹시 염두에 두신 분이 계신가요? 최근 사교계에서 이 이야기가 단연 화제거든요.”
생긋- 웃으며 묻는 애슐리의 질문에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떠보는 짓은 하지 말라고 일전에 분명 경고했을 터인데.”
발타자르의 서늘한 음성에 애슐리가 흠칫 몸을 떨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귀부인들과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떠받들어지다 보니 자네의 처지를 망각했나 보군. 기억하게. 자네가 지금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이 누구 덕분인지. 또한, 자네의 목줄을 쥐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말일세.”
발타자르의 경고에 애슐리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죄송해요. 사실 정보의 출처는 대공비세요.”
“대공비가?”
대공비라.
발타자르는 그녀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도저히 그 칼 프란츠 대공의 짝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먼 상냥한 여인이었고, 그런 만큼 칼 프란츠 대공이 무척이나 총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칼 프란츠 대공 전하께서 제도로 향하는 이유가 공작 각하와 대공녀의 혼약을 추진하기 위해서니 공작 각하께서 염두에 두신 혼처가 있으신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혼약이라…….”
그리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도저히 자신이 누군가와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물론 귀족가에서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혼약을 맺는 것이 비일비재한 일이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현재 발타자르의 위치를 생각했을 때 쉬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가 어느 가문의 영애와 혼인을 하느냐에 따라 권력 구도가 또 한 번 크게 뒤바뀔 것일 테니 말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공비와 나름대로 친분을 쌓은 듯한데 왜 보고하지 않았는가?”
“그건…….”
애슐리가 선뜻 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자 발타자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대공비가 애슐리에게 이런 부탁을 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 친밀 관계를 쌓아두었다는 뜻이었는데 이것에 대해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은 그녀가 무척이나 괘씸했다.
“마지막 경고일세. 추후에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말을 모두 끝맺지 않았지만, 그의 말 속에 담긴 뜻을 깨달은 애슐리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본래라면 크게 문책해야겠지만 대공비와의 친분을 쌓았기에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이었다.
자고로 옛말에 이르기를 천하를 움직이는 것은 남자이지만 그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라고 했다.
칼 프란츠 대공이 애처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애슐리가 이대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대공비와의 친분을 쌓아 나간다면 이후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었다. 때문에, 이리 쉽게 애슐리를 용서한 것이었다.
“대공비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최대한 친분을 쌓아두게.”
발타자르의 말뜻을 이해한 애슐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허리 숙여 보이며 답했다.
“그럴게요. 용서해 주셔서 감사해요.”
* * *
이후 발타자르는 애슐리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후에야 그녀를 돌려보냈는데 그러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신시아가 발타자르를 찾아왔다.
이에 발타자르는 오늘은 아이린과 시간을 보내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곤 그녀에게 다음에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선 신시아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지시하신 대로 중부 전역의 영주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한곳이 유독 눈에 띄더라고요.”
집무실에 도착한 신시아가 서류를 한 장 건네며 말했다. 서류를 받아든 발타자르는 서류의 가장 상단에 적힌 글귀를 보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드라큐러스 백작령?”
드라큐러스 백작령.
중부의 대표적인 무가 중 하나로 중부 지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 영지였다.
“네. 보고서에도 적어두었지만 드라큐러스 백작은 전형적인 악덕 영주였어요. 반년 전까지만 해도 영지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영지 관리에는 나 몰라라 하던 인물이었죠. 당연히 영지의 치안은 개판이고 실종 사건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데다 아사하는 영지민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엉망인 영지였죠.”
여기까지는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중부의 영주들은 대부분이 악덕 영주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탐욕스러운 전 대신들의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들 역시 악덕 영주가 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황제파가 정권을 잡은 이후로는 그런 일들이 드물어졌지만 말이다.
“그 말은 지금은 달라졌다는 뜻인가?”
“네. 아래쪽을 보시면 나와 있지만, 반년 전부터 드라큐러스 백작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영주성에 사람의 출입을 일체 차단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율을 대폭 낮추고 병사와 기사들을 풀어 영지의 치안 유지에 힘쓰기 시작했죠. 덕분에 영지민들의 민심은 치솟기 시작하고 중부 지역에서 살기 좋은 영지로 손꼽히게 되었지만…… 이상하잖아요?”
신시아가 소파에 풀썩 주저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런 계기도 없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행동한다는 게 말이에요. 물론 나쁜 건 아닌데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죠.”
“확실히 그렇군.”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동물이 아니었다.
큰 계기가 있어도 변할까 말까 한 것이 사람인데 신시아의 말대로 아무런 계기도 없이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도 수상해서 좀 더 집중적으로 조사해 보니 드라큐러스 영지와 인접한 영지에는 실종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더라고요. 평소보다 조금 더 잦아진 정도라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요. 거기다 출입을 금지한 영주성에 새벽마다 마차가 들락거린다는 증언도 있었고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근래에 드라큐러스 백작을 본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영지민들만이 아니라 인근의 영주들 까지도요.”
이 정도면 의심해 볼 만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선 드라큐러스 백작이 벨레드와 손을 잡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조사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수고했네. 조사는 계속 진행하되 드라큐러스 영지에 좀 더 신경 써주게. 그리고 남부에 정보원들을 추가로 파견하게.”
발타자르의 말뜻을 알아챈 신시아가 물었다.
“남부에요? 칼 프란츠 대공가인가요? 아니면 메디치 공작가인가요?”
두 곳 중 어느 곳을 집중적으로 관찰할지에 대해 묻자 발타자르가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대공가일세.”
발타자르의 대답에 신시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너무 부려먹으시는 거 아니에요? 요즘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고요.”
그녀가 투정 부리듯 말하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원하는 것이라도 있는가? 가령 선물이라든가.”
발타자르의 말에 신시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중에 저희 애들이랑 같이 밥이나 먹어요.”
신시아의 말에 발타자르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시간을 내어 만나러 갈 참이었네. 아 참. 로젠은 잘 지내고 있는가? 듣기로는 나날이 실력이 일취월장한다던데.”
“아! 들으셨어요? 걔가 요즘요…….”
그렇게 발타자르와 신시아는 한동안 방랑자의 집 아이들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신시아가 떠나간 이후 발타자르는 드라큐러스 백작령에 누구를 투입할지를 두고 고민했다.
휘하의 인재들이 여럿 떠올랐지만 지금 당장 투입 시킬 만한 인재는 몇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고르고 고르던 끝에 발타자르는 이번 임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에리스 할데를 보내는 것이 좋겠군.”
드라큐러스 백작이 벨레드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현재 발타자르의 휘하 중에서 에리스 할데만 한 인물이 없었다.
마스터인 그라면 최악의 상황에 벨레드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제 한 몸 내뺄 정도는 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만 투입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를 보좌할 정보원 다수와 백작령 인근에 트리스탄과 그녀의 기수들을 대기시켜 둘 생각이었다.
만약 드라큐러스 백작이 벨레드와 손을 잡은 것이 확실해진다면 빠르게 드라큐러스 백작령을 몰아쳐야 할 테니 말이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는군.”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던 발타자르는 문득 이 말이 방금 전 신시아가 했던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