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12화
다음 날.
제국의회가 개최되었다.
내무대신 안티오플 슈텔리앙 후작을 필두로 이번에 새로이 개편된 일곱 대신을 비롯해 제도에 머물고 있던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들과 관료들이 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황궁으로 향했다.
회의장은 원형의 계단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입구 맞은편의 상석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슈텔리앙 후작을 비롯한 황제파의 귀족들이, 우측에는 지금은 사망한 전(前) 외무대신 자비에고 주교의 일파들을 비롯한 중립을 표방하는 귀족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제국의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귀족들은 저마다 친분이 있는 이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 단연 화제가 되는 것은 이번에 종결된 서부 전쟁의 논공행상이었다.
누가 얼마만큼의 공적을 세웠다던가, 혹은 누가 어느 영지를 하사받을 것이 가장 유력하다던가 등의 이야기로 소란스러웠다.
“제국의 북부를 수호하는 3군 총사령관이시며 북부의 통치자, 발타자르 공작 각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때.
발타자르가 제 휘하의 지휘관들을 거느린 채 회의장에 입장하자 소란스럽던 회의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또각- 또각-
적막이 내려앉은 회의장에 일사불란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발타자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펑퍼짐한 관복을 입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장교복에 털 달린 망토를 두른 그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단박에 집중되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타자르는 곧장 상석으로 향하더니 이내 우측편의 빈자리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서 오시오. 발타자르 공작.”
“황태자 전하께서는?”
“아직이오.”
밤새 고민이 길었던지, 대답하는 슈텔리앙 후작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덕분에 밤새도록 고민했소.”
슈텔리앙 후작의 엄살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목소리에 힘이 있는 것이 결단을 내린 듯했다.
“그래서 결정은 내렸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슈텔리앙 후작은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렸소.”
“그런가?”
발타자르는 더 묻지 않았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하지 않으시오?”
“어련히 심사숙고해서 잘 결정했겠지.”
그 말에 슈텔리앙 후작이 끄응- 하고 신음성을 내었다.
밤새도록 고심하게 만든 것이 괘씸하여 조금 골려줄까 싶었는데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는 모습으로 보아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대비책은 마련해 둔 것이오?”
“총독부와 경무청의 신설에 대한 안건을 발의할 걸세.”
발타자르의 대답에 슈텔리앙 후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총독부라면 서부의 통제를 위한 것일 테니 별다른 반발이 없을 테지만 경무청의 경우 얘기가 달랐다.
만약 경무청에 영지의 치안에 대해 간섭할 권한이 주어진다면 귀족들이 거센 반발을 일으킬 터였다.
물론 그 덕분에 황위 계승권자들의 소집에 대한 것은 잊혀지겠지만 말이다.
“총독부는 그렇다 치고 경무청이라 함은?”
“용사들과 마왕들을 대비하기 위한 것일세. 또한, 권력층들이 마왕과 손을 잡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
마왕의 유혹은 선뜻 뿌리치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인 것이었다.
회귀 전에도 몇몇 대영주들과 중소 귀족들이 마왕의 유혹에 넘어가 그들과 손을 잡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외적으로는 마왕들로, 내적으로는 마왕과 손을 잡은 변절자들로 인해 제국은 크게 진통을 앓았었다.
경무청의 설립은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하나 귀족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 분명하오만…….”
영지에 관한 전권은 오로지 해당 영지의 영주에게만 있었다.
한데 그것에 개입할 수 있는 경무청이 설립되면 귀족들은 자신들의 온당한 권리를 침범받는다고 여길 것이고 거세게 반발할 것이 자명했다.
슈텔리앙 후작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문제점을 제기하자 발타자르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거부한다면 도태되는 수밖에.”
반발한다면 힘으로 찍어누르겠다는 말이었다.
슈텔리앙 후작은 혹시 발타자르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꺼낸 안건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어젯밤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발타자르에게선 어떠한 욕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온전히 제국의 미래를 위하는 그 모습은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마냥 믿을 수는 없었다.
권력의 습성이 그러하듯 권력을 손에 쥔 이는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발타자르가 지금까지 보여온 모습과 행적들로 판단했을 때 지금의 그는 믿어도 좋을 듯싶었다.
“큰 힘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한 손 거들어 주겠소.”
그렇기에 슈텔리앙 후작은 선뜻 발타자르를 돕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고맙네.”
발타자르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슈텔리앙 후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작이 제도에 입성한 이후로 피가 마를 날이 없구려.”
그렇게 슈텔리앙 후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발타자르의 눈에 시종의 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보였다.
흠흠- 하고 잠시 목을 가다듬는 것이 황태자가 도착한 듯싶었다.
발타자르의 짐작대로 잠시 후 회의장 문이 열리더니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위대한 철의 의지를 잇는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 아르세우스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제국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황실기사단을 거느린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회의장에 입장했다.
* * *
본격적인 제국의회가 개최되었다.
여러 가지 안건들이 나왔지만 대부분 서부 전쟁의 논공행상에 대한 것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이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회의를 이끌어 가야 할 황태자가 아무런 말 없이 멍하니 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자, 귀족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앞다투어 손을 들며 발언권을 얻는 데 혈안이었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 끝에 발언권을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라고는 자신이 지지하는 이가 더 많은 공적을 쌓았다며 자랑하는 것에 불과한 말뿐이었다.
회의장은 소란스러워지고 귀족들의 언성이 높아져 가기 시작한 그때.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막 자신의 공적에 대해 어필하던 귀족이 그 모습을 발견하곤 힐끔힐끔 눈치를 보기 시작하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물고선 자리에 앉았다.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의 중심으로 향하자 생각에 잠겨있던 황태자가 고개를 들고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타자르는 태연한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윽고 회의장의 중심에 도착한 발타자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딱 세 가지 안건만 발의하겠네.”
회의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논공행상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귀족들은 발타자르가 꺼낼 안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첫째. 서부에 총독부를 설립한다. 서부 총독부의 설립 목적은 서부에 깊숙이 자리 잡은 빌 헬름 공작가의 잔재를 뿌리 뽑고 서부를 온전히 통제하기 위함이며, 총독은 서부에 한정하여 행정의 모든 정무를 총괄. 내무대신을 경유하여 제국의 통치권자에게 상주, 재가를 받을 권리를 부여한다.”
좌중이 술렁였다.
이것은 제국 내에 하나의 국가를 건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안건이 통과된다면 앞으로 제국 내의 권력 구도가 크게 개편될 것이 자명했다. 귀족들은 이것이 자신들에게 어떤 이득을 안겨줄지에 대해 손익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둘째. 각 지방으로 흩어진 황위 계승권자들을 제도로 소환한다.”
말하며 발타자르가 황태자를 바라보자 황태자는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는 것에 이변은 없겠지만 혹시 모를 불상사가 발생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일세.”
따로 부연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발타자르가 언급한 혹시 모를 불상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개중에는 발타자르의 이러한 발언에 동조하듯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까지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안건이 발의될 때까지 아무런 반박이 없었고 이제 가장 문제가 될 세 번째 안건이 발타자르의 입을 통해 발의되었다.
“셋째. 경무청을 신설한다. 경무청은 제국 내에 거주하는 용사들의 통제와 포섭. 그리고 마왕과 그 잔당들에 대한 색출과 섬멸을 맡는다. 경무청은 독자적인 무력부대를 보유하며 제국 영토 전역의 출입 권한을 가진다. 또한, 비상시 경무청장의 판단에 따라 보고를 생략하고 해당 영지의 군을 징집,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대부분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안건이야 자신들에게 크게 해가 되지 않는다지만 마지막 세 번째 안건은 달랐다. 자신들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며 목에 목줄을 거는 것이었다.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리며 소란스러운 좌중을 진정시켰다.
“다들 알다시피 모두가 비웃으며 헛소리라 치부했던 오스왈드 간다르바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네. 마왕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스스로를 용사라 주장하는 이들이 제국을 무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지.”
발타자르의 말대로 제국 전역에서 심상찮은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고 있었다.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던 마왕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용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강력한 힘을 내보이며 제국의 영토를 제집 안방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녔다.
이는 대부분이 무시했던 오스왈드 간다르바의 예언대로였다. 그 말인즉. 이 땅에 마신이 강림할 것이란 예언 역시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제국은 하나로 단결하여 다가올 환란에 대비해야만 하네. 이를 위해서라면 본 공작은 어떠한 일도 감수할 생각이라네. 그것이 설령 이 제국을 피로 물들이는 것이라고 해도 말일세.”
이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황태자와 슈텔리앙 후작이 침묵하며 은연중 발타자르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이때 선뜻 나서서 반박할 용기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짝짝-
발타자르의 발언이 끝나자 회의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황태자가 손뼉을 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 또 안건을 발의할 사람이 있는가?”
황태자의 물음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에 황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없는 것 같군. 더 나올 안건은 없는 것 같으니 회의는 이쯤하고 발타자르 공작이 발의한 안건에 대해 표결을 시작하지.”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 * *
제국의회가 끝이 나고 회의장을 떠나려는 발타자르를 누군가 불러세웠다.
“공작!”
슈텔리앙 후작이었다.
“혹시 생각해 둔 인선이 있소?”
생각해 둔 인선이란 총독과 경무청장을 말함이었다.
슈텔리앙 후작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그를 힐끔 바라보더니 답했다.
“총독은 후작께서 알아서 하시게. 다만 경무청장은 내 따로 점지해 둔 이가 있으니 그를 추천할 생각이네. 물론 황태자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지만 말일세.”
“그렇다면 조만간 황태자 전하와 함께 셋이서 식사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소?”
슈텔리앙 후작의 제안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당분간 제도를 떠나야 해서 그건 좀 힘들겠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혹시 근래에 슈미트라 교단의 추기경을 만난 적이 있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슈텔리앙 후작은 그가 왜 당분간 제도를 떠난다고 하는지에 대해서 눈치챘다.
“그 제도 인근에 등장할 것이란 마왕 때문이오? 설마 그 말이 사실이었단 말이오? 하지만 개인적으로 조사해 본 결과 어떠한 이상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소만.”
슈텔리앙 후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발타자르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되었네. 이 건은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다만 잠시 몇 달간 자리를 비워야 할듯하니 통과된 안건들은 내무대신께서 잘 처리해 주리라 믿겠네.”
발타자르의 말에 슈텔리앙 후작은 그를 믿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맡겨 주시오.”
“황태자 전하께 대신 잘 말씀드려 주게. 그럼 이만 가보겠네. 수고하게.”
발타자르가 작게 웃으며 재차 그의 어깨를 두드리곤 제 수하들을 이끌고 회의장을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