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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111화 (111/183)

공작이 회귀함 111화

짤랑-

어두운 밤거리.

종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진다.

이윽고 짙게 드리운 어둠 사이로 백색의 사제복을 두 사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치 성지를 순례하듯 그들은 걸음걸이 하나에도 경건함이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빛을 발하는 깃발.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태양이 새겨진 그 깃발로 이들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제국 최대 종파를 자랑하는 슈미트라 교단의 사제들이었다.

신전을 벗어나 그들이 향한 곳은 발타자르 가의 저택이었다. 발타자르 가의 저택은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지내는 곳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무척이나 소박했다.

“작네요.”

두 사제 중 한 명이 발타자르의 저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가요?”

이에 다른 한 명이 묻자 처음 말을 꺼낸 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소문대로 무척 검소한 성격이신가 봐요.”

두 사제가 발타자르 가의 저택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발타자르 가의 저택 앞에 도달했다.

“멈추십시오.”

슈미트라 교단의 사제들이 발타자르 가의 저택을 향해 다가오자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가 검집째로 검을 내밀며 그들을 제지했다.

“소속과 신분을 밝히십시오.”

이에 두 사제 중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 사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슈미트라 교단의 추기경이 발타자르 공작 각하를 뵙고자 한다고 말씀을 좀 전해주시겠어요?”

사제의 말에 발타자르 가의 저택을 경비하던 기사가 사제의 행색을 훑어보았다.

자신을 슈미트라 교단의 추기경이라고 소개했지만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대와 손에 쥐고 있는 저울 달린 십자가 모양의 지팡이를 제외하면 다른 사제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하여 기사가 확인 차원에서 사제의 물음을 묻자 사제가 꽃처럼 청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에리스. 에리스 할데라고 한답니다.”

* * *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칭얼대는 아이린을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재우고 난 후에야 가웨인, 갤러해드와 함께 와인을 마시던 발타자르에게 군타낙스 기사 하나가 찾아 왔다.

“각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예, 슈미트라 교단의 에리스 할데 추기경이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리스 할데라…….”

선악의 선별자.

에리스 할데.

부정과 부패로 찌든 슈미트라 교단에서 몇 안 되는 사제다운 사제로, 회귀 전에는 자비에고 주교에게 바른말만 고하다가 결국 그의 눈 밖에 나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밀려드는 마왕군을 저지하라는 무모한 임무에 투입되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맡은 임무가 대부분 전국 각지를 떠도는 것이 대부분인 데다 자비에고 주교가 비장의 한수로 감춰두었기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에리스 할데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슈미트라 교단의 숨겨진 실력자였다.

“혹시 자비에고 주교의 복수를 위해 찾아온 것일까요?”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다면 크루세이더들을 대거 이끌고 왔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대체 왜 이 야심한 시각에 찾아온 것일까요?”

“글쎄…… 그건 대화를 나눠봐야 알겠지.”

그리 말하곤 발타자르가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

“정원으로 데려오게. 그곳에서 대화를 나눌 테니.”

* * *

발타자르와 함께 정원에서 슈미트라 교단의 사제들을 기다리던 가웨인이 저 멀리 군타낙스 기사단원의 안내를 받으며 정원으로 다가오는 에리스 할데를 발견하곤 넋을 놓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검은 안대로 가려 눈동자는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는 백금발과 백옥처럼 뽀얀 피부, 가냘픈 턱선과 목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외모였다.

가웨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발타자르가 그를 바라보니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발타자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긴. 오해할 만도 했다.

여성스러운 이름도 이름이지만 어지간한 미인은 빛이 바랠 정도로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저 외견은 뭇 사내들의 방심을 뒤흔들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런 매력적인 여성의 외견을 하고 있지만, 에리스 힐데는 남자였다. 첫눈에 반한 눈치인 가웨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무슨 얼빠진 소리를 하는 것인가. 에리스 힐데는 사내일세.”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에리스 힐데가 다가오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던 가웨인이 발타자르의 말에 표정이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가 돌아가며 발타자르와 시선을 마주한 가웨인의 눈동자는 몹시도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내…… 라고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가웨인이 되물었다.

장미처럼 붉은 입술.

우유를 부은 듯 새하얀 피부.

가녀린 곡선.

어딜 보아도 가냘픈 여성의 모습이었다.

“농담이시죠?”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가웨인이 애달픈 목소리로 묻자 발타자르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답했다.

“내가 왜 이런 시답잖은 것으로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겐가?”

“…….”

가웨인은 다시 한번 에리스 힐데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아름다운 저 여인이 사실은 사내라니.

“맙소사. 슈미트라시여…….”

가웨인은 믿지도 않는 슈미트라의 이름을 부르며 부디 이 상황이 꿈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 *

에리스 힐데가 사내라는 사실에 가웨인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그가 발타자르의 앞에 도착했다.

“공작 각하를 뵈어요.”

여성스러운 말투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청아한 목소리로 에리스 힐데가 인사했다. 이에 가웨인이 재차 확인하듯 발타자르를 바라보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는 가웨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발타자르가 에리스 힐데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반갑네. 발타자르 공작일세.”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미소 지으며 인사하는 에리스 힐데의 모습에 발타자르가 속으로 크게 웃었다.

‘가웨인이 오해할 만하군.’

자신 역시 회귀 전의 기억이 아니었다면 이 사내가 여인이라고 착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로 에리스 힐데는 아름다웠으며, 여성스러웠다.

꽃으로 비유하자면…….

그래. 물망초일까?

“이 야심한 시각에 사제들과 함께 내 저택을 방문한 연유가 무엇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에리스가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듯한데 앉아서 얘기해도 될까요?”

안대로 눈을 가렸음에도 의자가 있는 곳을 정확히 가리키는 그 모습에 발타자르가 눈을 빛내었다.

방금 전 희미하게 느껴진 마력의 파동으로 보아 마력으로 주변 사물을 인지하는 듯했다.

‘마력을 다루는 것이 수준급이군.’

발타자르가 자리를 권했다.

“앉게.”

“감사합니다.”

에리스가 펑퍼짐한 사제복을 살짝 들어 올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명문 귀족 가문의 여식 못지않게 기품이 넘쳐 흘렀다.

‘아니, 여식이 아니라 자제인가?’

속으로 실없는 농담을 하며 발타자르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에리스 역시 발타자르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말해보게. 아! 미리 말해두지만, 이야기에 따라서 이 야심한 시각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와 무례를 범한 것에 대해 죄를 물을지 말지를 결정할 걸세.”

발타자르의 경고에 에리스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그러곤 따라온 사제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채영 양.”

이에 사제 중 하나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발타자르는 다가오는 사제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하기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저런 독특한 이름은 용사들이 아니고서야 이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이름이니까.

“용사로군.”

발타자르의 말에 에리스가 손뼉을 치며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알아차리시는군요?”

그러나 발타자르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다가온 사제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에 갈색을 띠는 눈동자.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본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손채영 양이에요.”

“안녕하세요.”

에리스가 손채영이라고 소개한 여인이 발타자르를 향해 고개 숙여 보이며 인사했다.

“공작 각하께서도 짐작하셨다시피 용사이고, 동시에 성녀시죠.”

“성녀라면 슈미트라의?”

“네.”

발타자르는 그제야 왜 자신이 손채영을 알아보지 못했는지를 깨달았다.

슈미트라의 성녀.

달리 비운의 성녀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압도적인 신성력을 발휘하여 당시 제도를 침공한 마왕군을 무찌르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느낀 자비에고 주교가 그녀를 배신함으로써 마왕에게 포로로 잡혀 유린당하고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성녀를 내게 소개한 이유가 무엇이오?”

발타자르의 물음에 에리스가 손채영을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신탁을 받았어요.”

“신탁?”

“네. 슈미트라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만간 제도 인근에 강력한 마왕이 등장할 것이라 하셨어요.”

발타자르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서열 13위.

창백한 선혈의 왕자 벨레드.

회귀 전 중앙의 밤을 지배했던 뱀파이어들의 군주였다.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과 제 피를 먹이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힘을 지닌 상위 뱀파이어를 만드는 능력으로 인해 그는 마왕 중에서도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편에 속했다.

“그러니까 그 마왕을 물리치는 것에 도움을 달라?”

발타자르의 물음에 손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네. 내가 도와준다고 치세. 그렇다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네?”

“마왕을 치려면 막대한 물자와 병사가 필요하지. 한데, 마왕이 등장하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네 말만 믿고 그것들을 동원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물며 내게 아무런 이득도 없는 상황이니 더더욱 그렇지.”

“아니, 뭐 이런…….”

손채영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소문에는 전설에나 등장할 법한 자기희생적인 영웅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이는 모습을 보니 제 이득에 눈이 먼 이가 아닌가!

“에리스, 이만 가요.”

실망감이 가득한 얼굴로 손채영이 에리스의 팔목을 잡아채며 떠나려고 하자 에리스가 그녀를 제지했다.

성녀가 슈미트라의 신탁을 점지받은 이후 에리스는 신탁을 다른 추기경들에게 전하며 마왕의 토벌을 위해 크루세이더들을 동원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지만, 자비에고 주교의 사망 이후 몸을 사리기에 급급한 추기경들은 교단에 그럴 여력이 없다며 일언 지하에 거절당했다.

하여 제도에서 나름 힘깨나 쓴다는 귀족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일언 지하에 거절을 당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바로 발타자르였다. 따라서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에리스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자네들일세.”

발타자르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게 신종하게. 그리만 한다면 마왕을 물리치는 일을 도와주지.”

벨레드가 어느 정도 세력의 몸집을 키워 낸 상태라면 그를 처리하는 데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따라서 조만간 시간을 내어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던 차에 마스터와 성녀라는 인재들이 제 발로 굴러와 벨레드를 물리치는 것을 도와달라 요청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이용해 그들을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되려 더 이상했다.

“그 말씀은 슈미트라 교단을 아래에 두시겠다는 뜻인가요?”

에리스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조소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썩을 대로 썩어빠진 교단을 내가 뭐가 아쉬워서 탐내겠는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마스터급의 강자인 자네와.”

발타자르가 손가락으로 에리스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이내 손가락을 움직여 손채영을 가리켰다.

“강력한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제인 자네일세. 자, 어떻게 하겠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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