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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110화 (110/183)

공작이 회귀함 110화

결국, 황태자는 결정을 뒤로 미루었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확신했다.

오랜 세월 대신들에게 억눌려온 황태자였다.

때문에, 그 누구보다 절대 왕권의 부활을 꿈꾸었을 테고 그것이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잡을 수 있을 만큼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망설일지언정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발타자르 공작.”

다급히 달려온 듯한 슈텔리앙 후작이 숨을 헐떡이며 이제 막 연회장을 벗어난 발타자르를 불러세웠다.

“잠시만 내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겠소?”

슈텔리앙 후작의 말에 발타자르가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옅게 떨리는 눈동자가 그의 복잡한 심경을 내비치고 있었다.

‘황태자와의 대화를 전해 들었나 보군.’

그것이 아니고서야 그가 발타자르를 불러세울 이유가 없었다.

‘잘되었어.’

어차피 내일 있을 회의 전에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찾아가는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지.”

* * *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빈 회의장으로 향했다.

발타자르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슈텔리앙 후작을 응시했다.

“그래. 날 불러세운 연유가 무엇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슈텔리앙 후작이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황태자 전하께 각지로 흩어진 황족들을 축출하자 건의하셨다고 들었소.”

짐작대로였다.

하기야 황태자가 이런 문제를 논의할 사람은 슈텔리앙 후작 말고는 없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네만.”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슈텔리앙 후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런 것이오?”

“무얼 말인가?”

짐짓 질문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발타자르가 되묻자 슈텔리앙 후작이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서부 전쟁이 끝난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소. 당분간은 내실을 다져야 할 때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어찌하여 분란을 자초하는 일을 벌이려는 것이오? 이것이 자칫 내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일임을 정녕 모른단 말이오!”

슈텔리앙 후작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안 그래도 중앙에서 서부를 집어삼킨 것으로 인해 동부와 남부가 극도로 경계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족들을 대거 축출하려 든다면, 당장 목숨이 내걸린 황족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발버둥을 칠 것이고 그들을 지지하던 권력자들 역시 마냥 손 놓고 방관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슈텔리앙 후작의 말대로 최악의 상황에는 제국 내전으로 치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후작.”

“말씀하시오.”

발타자르가 깍지를 끼고는 슈텔리앙 후작을 응시했다.

“각지로 흩어진 황족들은 모두 황좌에 앉기를 염원하는 이들일세. 그들이 속내에 품은 욕망을 쉬이 단념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황태자 전하께서 옥좌에 오르신다면 그분들께서도 단념하실 수밖에 없을 것이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슈텔리앙 후작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발타자르가 소리 내어 웃었다.

텅 빈 회의장에 발타자르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메아리쳤다.

자연스레 슈텔리앙 후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발타자르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후작.”

발타자르가 돌연 웃음을 뚝 그치더니 슈텔리앙 후작을 불렀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슈텔리앙 후작은 몸을 움찔거렸다.

몹시도 서늘한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슈텔리앙 후작은 마치 몸이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후작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황족들을 곁에서 지켜봐왔음에도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군. 그것이 아니라면 황족들에 대한 미련을 저버리지 못한 것인가.”

“공작!”

슈텔리앙 후작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감히 제국의 황실을 모욕하려는 것인가!”

“모욕? 사실을 말하는 것이 어찌 모욕인가.”

“알레한드로 발타자르!”

쾅-!

슈텔리앙 후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보았군. 어찌 이런 작자를 충신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한탄하듯 소리치는 슈텔리앙 후작을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말했다.

“앉게.”

“되었네! 더 이상 자네와 할 말은 없네!”

슈텔리앙 후작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회의장을 벗어나려던 순간. 소름 끼치는 기운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앉으라고 했네.”

“발타자르! 감히 날 위협하는 것이냐!”

슈텔리앙 후작이 성난 기색으로 소리치자 발타자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그를 짓눌렀다.

“갈 때 가더라도 내 말은 다 듣고 가게.”

강요에 가까운 권유였다.

슈텔리앙 후작과 발타자르가 서로를 응시하며 대치했다.

결국, 항복한 것은 슈텔리앙 후작이었다.

발타자르가 놓아주지 않는 이상에야 본인의 의지로는 회의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슈텔리앙 후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불충한 말이지만 더 이상 위대한 혈통은 존재하지 않네. 지속된 평화에 황족들은 향락과 사치에 물들어 나약해지고 어리석어졌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껏 누려온 것들을 이어가는 것이지, 이 제국이 아닐세. 따라서.”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천천히 슈텔리앙 후작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결코 제국의 옥좌를 포기하지 않을 걸세.”

슈텔리앙 후작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어차피 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으니 발타자르는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지금 당장이야 대세가 이쪽으로 기울었으니 당분간은 숨죽이고 사태를 관망하겠지만 그들은 황태자 전하께서 옥좌에 오르는 것을 결코 지켜보지만은 않을 걸세. 언제고 틈이 보인다면 망설이지 않고 황태자 전하의 목을 물어뜯어 그 자리를 쟁취하려 들겠지. 그들에게는 그것을 가능케 할 군웅들이 함께하고 있으니까 말일세.”

이윽고 슈텔리앙 후작의 곁에 도달한 발타자르가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았다.

“내가 황태자 전하께 드린 제안 때문에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했는가? 오히려 그 반대일세. 내전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들을 축출하려는 것일세.”

오랜 세월 대신들에게 억눌려온 황태자는 신하가 군주보다 더 큰 힘을 가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뼈저리게 경험한 이였다.

따라서 그가 황제가 된다면 황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의 세력을 줄이기 위한 법안들을 줄줄이 공표할 것이었다.

권력의 흐름에 민감한 그들이 이를 모를리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귀족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황태자가 옥좌에 오르는 것을 저지하려 들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권력자들과 황제가 되고자 하는 황족들의 욕망이 맞물려 제국 내전을 초래할지도 몰랐다.

발타자르는 이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황위 계승권자들을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없다면 각지의 선제후들과 대영주들에게 내전을 일으킬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오롯이 황태자 전하만이 유일한 계승권자가 될 것이고 각지의 군웅들은 쉬이 삿된 마음을 품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북부와 중앙의 결속은 굳건하며 서부는 굴복하였다.

남부와 동부는 몬스터와 마왕의 준동으로 그 세가 크게 위축되었으니 지금이 적기였다.

지금이라면 처음에는 거부할지도 모르나 결국 권력자들은 제 스스로 황위 계승권자들을 내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내 말이 허황된 소리라 생각하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시종일관 침묵을 고수하던 슈텔리앙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찌 신하 된 자로서 황족의 피를 볼 수 있단 말이오.”

“하면, 이 제국이 사분오열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음에도 손 놓고 방관하자는 말인가?”

“함께 고심한다면 좀 더 나은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소.”

슈텔리앙 후작의 말에 발타자르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에게 시간이 있었다면 그런 선택도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후작. 그대도 눈과 귀가 있으니 보고 듣지 않았는가. 간다르바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고 각지에 마왕들이 준동하고 있네. 우리에게 시간이 없단 뜻이지. 따라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제국을 단결시키고 다가올 환란에 대비해야 하네.”

곧 거대한 이변이 발생할 것은 슈텔리앙 후작도 직감하고 있었다.

제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이변들. 마왕의 등장.

이런 큰 사건들이 단순히 우연으로 동시에 일어날 리가 없었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물어보게.”

“공작께선 어찌하여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것이오?”

슈텔리앙 후작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고작 그것이 궁금했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황태자 전하보다 뛰어난 능력과 배경을 가진 황족들이 여럿 있음에도 내가 왜 굳이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줄 아는가?”

발타자르가 허리를 펴고 테이블에 걸터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단순히 장자이기 때문에? 아니면 능력도 없이 욕심만 많기 때문에? 다 아닐세. 보다 큰 권력과 보다 많은 향락을 원하는 다른 부패한 황족들과 달리 황태자 전하의 욕심은 이 제국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네.”

어느 정도 거짓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이는 발타자르의 본심이었다.

굳이 황태자가 아니더라도 이용하기 쉬운 황족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럼에도 발타자르가 황태자를 선택한 것은 이처럼 황태자의 제국을 위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답이 되었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슈텔리앙 후작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하루. 하루만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말하는 슈텔리앙 후작의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명심하게.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것을. 각지의 선제후들과 대영주들은 여기서 더 중앙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수수방관하지 않을 걸세. 따라서 일을 도모하자면 지금뿐일세.”

축 늘어진 슈텔리앙 후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발타자르가 말했다.

“잘 생각해 보게. 무엇이 이 제국을 위하는 길인지.”

그 말을 끝으로 발타자르는 갤러해드와 함께 회의장을 벗어났다.

* * *

발타자르가 저택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을 훌쩍 넘긴 야심한 시각이었음에도 오매불망 애타게 발타자르를 기다리던 아이린이 그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겨들었다.

“오라버니!”

아이린을 번쩍 안아 든 발타자르는 이전보다 제법 묵직해진 무게에 흡족한 표정으로 아이린의 뺨을 쓰다듬었다.

“잘 있었느냐?”

발타자르의 물음에 아이린이 대답 대신 그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더니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구석구석 꼼꼼히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는 그 모습에 발타자르는 문득 실소가 새어 나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게냐?”

발타자르가 재차 질문을 던지자 아이린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다친 곳은 없나 살펴보고 있어요.”

“그래. 살펴보니 어때 보이더냐?”

아이린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 보이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러곤 발타자르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목과 뺨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쌓였던 피로가 풀리는 것만 같았다.

“날이 쌀쌀하니 이만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말하며 발타자르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 온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마신의 강림을 저지해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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