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09화
이 뜻밖의 재회에 발타자르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반가우면서도 달갑지 않은 그런 모순적인 감정이 발타자르의 몸을 옥죄었다.
레니우스 프락시온.
시녀 출신인 8황후의 소생으로 13 황자인 그는 황위 계승권과는 한참 동떨어진 인물로 이렇다 할 지지자도 그렇다고 권세 있는 외척도 없었다.
하여 진작에 황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황제에게 간청하여 칼 프란츠 대공 휘하의 브라티슬라바 페흐트라에게 검을 사사받을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게 된다.
이후 브라티슬라바 페흐트라에게 검을 배우며 제국 내전이 발발할 때까지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황제의 사망 이후 각지의 권력자들이 저마다 지지하는 황족들을 내세우며 제국 내전을 일으키자 칼 프란츠 대공의 지지를 받으며 내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당시 그 어떠한 파벌에도 가담하지 않고 비프로스트 요새에 틀어박혀 있던 발타자르를 만나게 되고…….
‘발타자르. 자네의 복수를 이룰 수 있게 도와주겠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제가 저하를 지지하길 원하시는 것입니까?’
‘아닐세. 자네는 그저 지금껏 해 왔던 대로 북부를 지켜주기만 하게.’
잊혀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의 파벌에 가담하여 제국 내전에 참전하기를 종용하는 다른 황족들과 달리 굳건히 제국의 북방을 지켜달라는 것 외에는 달리 요구하는 것이 없던 레니우스의 모습에 반해 발타자르는 그를 지지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복수를 이루어 주겠다는 제안에 혹한 점도 있었지만 레니우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황족들과 달리 그가 진심으로 제국을 위한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본래 레니우스는 그저 발타자르가 다른 파벌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발타자르가 오해하여 레니우스의 파벌에 가담했으니 얻어걸린 기분이었으리라.
만약 당시 발타자르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레니우스의 파벌에 가담하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된 때는 이미 레니우스가 제국 내전에서 승리하여 황위에 오르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고집불통이지만 그래도 제 사람들만큼은 살뜰히 챙기던.
수많은 전선을 함께해왔으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제는 기억의 파편 속에만 존재하는 나의 황제.
회귀한 이후로 수백 번도 넘게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럼에도 답은 하나였다.
그는 실패한 황제였다.
무너지는 제국을 지켜내지도.
그렇다고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지도 못했다.
그의 고집으로 허망하게 잃은 기회들을 생각한다면 그를 다시 황위에 앉힐 수는 없었다.
따라서.
발타자르는 결심했다.
필요하다면 그의 숨통을 제 손으로 끊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황위에 오르는 일이 없도록 만들겠다고 말이다.
* * *
“공작, 공작. 괜찮습니까?”
인사 이후 발타자르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만 있자 레니우스가 걱정을 담은 얼굴로 조심스레 발타자르를 불렀다.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난 발타자르가 정신을 차리곤 레니우스를 향해 고개 숙여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던지라.”
“혹시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그보다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발타자르의 물음에 레니우스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딱히 용건이라기보다는 그저 공작과 한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레니우스가 눈을 빛내며 발타자르를 응시했다.
그것은 발타자르가 익히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선망과 동경.
“그렇습니까.”
레니우스가 왜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껄끄러운 만남을 끝내고 싶었던 발타자르가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위대한 철의 의지를 잇는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 아르세우스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황태자의 등장에 하급 귀족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대귀족들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이에 황태자가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화답하고는 이내 누군가를 찾는 듯 연회장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연회장의 한쪽에서 레니우스와 함께 있는 발타자르를 발견하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걸음걸이로 곧장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황태자의 눈동자에서 짙은 경계심을 읽어낸 레니우스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형님께서 공작을 찾으시는 듯하니 아쉽지만, 대화는 나중으로 미뤄야겠습니다.”
언제 또 발타자르와 독대할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기에 아쉬움이 무척이나 컸지만,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칼 프란츠 대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온 제도였다. 괜히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레니우스는 얼굴에서 아쉬움을 지워내고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며 황태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 * *
“오셨습니까, 전하.”
“형님, 오랜만입니다.”
발타자르와 레니우스가 각기 황태자를 향해 고개 숙여 보이며 그를 맞이하자 황태자가 레니우스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레니우스. 잘 지냈느냐?”
“예, 형님.”
“그런데 검에만 미쳐 사는 줄 알았던 네가 제도에는 어쩐 일이더냐?”
명백한 비꼼이었다.
제국 국정이 대신들에게 휘둘릴 때도.
황실이 대신들의 야욕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도.
레니우스는 수련을 핑계로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던 녀석이 이제 좀 황실의 입김이 세졌다 싶은 찰나에 이렇게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황태자가 못마땅해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잠시 어머니를 뵈러 왔습니다. 불효하게도 얼굴을 내비친 지 너무 오래되어서 말입니다.”
레니우스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황태자가 혀를 찼다.
“쯧, 알겠다. 조만간 시간을 낼 테니 그때 식사라도 한번 하자꾸나.”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이에 레니우스가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재차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공작, 다음에 뵙겠습니다.”
레니우스가 황태자와 발타자르에게 각기 인사말을 건네곤 떠나가자 황태자가 그 뒷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응시했다.
혹시 레니우스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발타자르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레니우스가 사라질 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황태자가 이내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네, 공작. 너무 오래간만에 재회한 동생인지라 생각이 많아졌군. 그보다 어찌 이 연회의 주인공이 이런 구석진 곳에 있는 것인가?”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지라.”
발타자르의 대답에 황태자가 껄껄거리며 크게 웃었다.
“그래도 그렇지. 저기서 공작에게 말 한번 걸어보려 눈치만 보고 있는 영애들이 안쓰럽지도 않은가?”
“…….”
발타자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되었는지 황태자가 더욱 크게 소리 내며 웃었다. 덕분에 연회장의 모든 이목이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웃던 황태자가 돌연 뚝 웃음을 그치더니 물었다.
“그렇다면 술은 좋아하는가?”
황태자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거 다행이군.”
말하며 황태자가 근처의 테이블에 놓여 있던 와인을 한 병 들고 오더니 말했다.
“그럼 술이나 한잔하세.”
* * *
황태자는 의외로 주당이었다.
와인을 몇 병이나 비워냈음에도 얼굴에 취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가 발타자르의 빈 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물었다.
“그래. 레니우스가 뭐라고 하던가?”
지나가다 묻는 투였지만 목소리에는 은연중 레니우스에 대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별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저 저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황태자의 눈동자에 스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필시 레니우스가 발타자르를 회유하려 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과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나쁘지 않은 모습이었다.
본디 군주란 항시 주변을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법이니까.
“전하. 서부를 평정함으로써 중앙의 통치권이 강화되었으니 이제는 후계 구도를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은 생각에서만 머물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오늘 레니우스를 만나면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아르세우스의 황권에 위협이 될 만한 황족들을 모두 축축해 내기로 말이다.
물론 그에 따른 반발이 극심하겠지만 서부를 장악한 지금.
중앙의 결정에 반기를 들 세력은 전무했다.
또한, 지금은 야만적인 풍습이라며 사라졌지만 오랜 세월 이어져온 황가의 전통을 다시 부활시킨다면 귀족들과 황족들의 반발을 최소한으로 억누를 수 있을 것이었다.
발타자르의 제안에 황태자가 눈을 빛내었다.
“후계 구도를?”
“예. 물론 황태자 전하께서 권좌에 오르시는 것에 이견은 없겠지만 현재 전하의 형제들께선 권자에 앉겠다는 욕심에 각지로 흩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자칫 각지의 권력자들의 탐욕을 자극한다면 또다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옵니다.”
형제들이 자신을 누르고 황위에 오르려 한다는 것쯤은 황태자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봐야 대세는 이미 황태자에게로 기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더 이상 압박하기보다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 황태자의 관대함을 알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슈텔리앙 후작의 조언이 있었기에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발타자르의 말을 듣게 되니 또 생각이 달라졌다.
생각해 보니 그들에게 아량을 베푼다 한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길 바라며 언제고 권좌를 뺏어갈 기회만 노리고 있을 이들이었다.
후환의 싹은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각 지방의 권력자들에게 붙어 있는 그들에게 손을 쓰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로부터 이 철의 제국 프락시온의 황좌는 황족들의 피로 쌓아 올려진 자리였습니다. 오롯이 황제만이 이 광활한 제국을 다스릴 지고한 존재로 군림할 수 있었기에 강력한 통치권을 자랑할 수 있었지요. 때문에, 최초의 선제후들은 그 전통을 야만적인 풍습이라 매도하며 사장 시키고 심지어 황제의 적법한 권리인 후계 선출에 입김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발타자르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었다.
선제후가 등장하고 그들이 황제 선출권을 가지게 된 계기는 프락시온 황실이 향락과 사치에 빠져 점점 국정을 도외시하고 가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제국이 무너지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던 최초의 선제후들은 선제후라는 직책을 만들고 황제 선출권을 나눠 가지며 어떻게든 제국을 지탱하려 했다.
물론 황실의 입장에서야 그것은 한없이 불충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여 제안 드리는 바입니다. 사장되었던 황실의 전통을 부활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발타자르의 제안에 황태자는 귀가 솔깃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망설이는 기색을 내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한들 그들에게 직접 손을 쓰기는 어려운 상황 아닌가.”
“왜 직접 손을 쓰시려 생각하십니까?”
“달리 방법이 있는가?”
황태자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 숙여 보이며 답했다.
“서부마저 중앙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 지금.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중앙의 지시를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지금껏 누려온 권력을 유지하고자 바짝 엎드리고 충견처럼 보이기 위해 애를 쓸 것입니다.”
황태자의 눈동자에 서서히 욕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대신들에게 억눌려왔던 황태자의 비원悲願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비원.
그것은 이 철의 제국이 다시금 그 찬란했던 영광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니 각지의 대영주들에게 공문을 내리소서. 새로운 하늘을 꿈꾸는 그들을 잡아들이고 그들의 피로 권좌를 물들이소서. 그리하시어 제국의 유일무이한 절대 황제가 되시옵소서.”
발타자르가 황태자의 욕망을 부추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