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08화
전쟁이 끝이 났다.
이종족 연합의 힘마저 빌려와 총력을 쏟아부었던 전투에서 대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의형제였던 두 마스터를 한순간에 잃게 되자 빌 헬름 공작은 제 수하들을 이끌고 이종족의 땅으로 도망쳤다.
혹자가 보기에는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은 아니냐고 지적할 수 있겠지만 사실 무척이나 현명한 판단이었다.
더 이상 빌 헬름 공작 측에는 밀려드는 연합군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동부와 남부가 개입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기약 없는 기다림일 뿐이었다.
따라서 빌 헬름 공작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성을 잃을 만한 상황이었음에도 자신의 터전을 뒤로하고 후일을 기약한다는 선택은 무척 현명했다.
또한, 그가 도망 길에 올랐을 때 빌 헬름 공작령의 영지민 대다수가 그를 따라갔다고 하니 그가 돌아왔을 때 서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놓쳤는가.”
발타자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벌어질까 염려되어 바이칸들과 발 빠른 기병들을 투입하여 퇴로를 차단했건만 결국 놓치고야 말았다.
빌 헬름 공작과 그의 수하들이 이종족들의 땅으로 넘어갔으니 이종족들과 전쟁이라도 벌이지 않는 이상에야 더 이상 그를 쫓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빌 헬름 공작만이라도 잡아보려 했지만, 일반 백성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한뜻으로 빌 헬름 공작을 지키려 하는 통에…… 각하의 지시를 수행하지 못한 저를 죽여주십시오.”
아그라베인이 두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아그라베인을 일으켜 세웠다.
“되었네. 자네 잘못이 아니니 그만 일어나게.”
“각하!”
아그라베인이 눈물 젖은 눈동자로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적잖이 감동한 듯 울먹거리는 그의 모습이 부담스러워진 발타자르가 그를 내버려 두고선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전쟁에서는 패배했군.’
회귀 이후 처음으로 겪게 된 패배였다.
황제파야 중앙의 통치권 강화와 자신들의 세를 확장하기 위해 승인한 전쟁이었지만 발타자르는 달랐다. 이번 서부 전쟁은 애당초 빌 헬름 공작을 잡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그런데 그 빌 헬름 공작을 놓쳤으니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전쟁에서는 패배한 격이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조치했던 것인가?’
퇴로는 완벽히 차단했었다.
전략적으로는 빈틈이 없는 완벽한 포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빌 헬름 공작을 놓친 것은 그에 대한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을 간과했기 때문이리라.
‘어쩔 수 없지. 판을 새로 짜는 수밖에.’
빌 헬름 공작을 놓친 것은 뼈아픈 실책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아쉬워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빌 헬름 공작의 세력의 핵심인 두 마스터들을 사살한 것이었다.
그들이 없는 이상 후에 빌 헬름 공작이 돌아온다고 해도 쉬이 서부를 탈환할 수는 없으리라.
‘이종족들이 가세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상관이 없었다.
만약 이종족들을 등에 업고 서부 탈환을 노린다면 그것은 북부와 중앙만의 문제가 아닌 제국 전체의 문제로 불거질 테니 말이다.
‘우선 빌 헬름 공작의 신망을 꺾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군.’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빌 헬름 공작이야 몸에 때 하나 묻지 않은 청렴결백한 인간이지만 그의 자식들 역시 그렇지는 않았다.
차남은 육욕에 빠져 제 별장에 주지육림을 차렸고 돈에 대한 욕심이 남다른 삼남은 제 아비의 눈을 피해 이종족을 밀거래하는 것으로 부를 축적했다.
또한, 삼녀는 밤마다 전도유망한 기사들을 끌어들일 정도로 음탕했으며 이제 10살이 되는 오 녀는 미에 대한 자격지심이 강해 자신보다 예쁜 여인이 눈에 띄면 몰래 사람을 보내 겁탈하고 죽였다.
이처럼 자식 농사가 엉망임에도 빌 헬름 공작은 그 사실을 몰랐다.
왜?
그의 의형제들인 싱커 에스파로사와 그람린 감프가 그들을 감싸고 돌았으니까.
그들의 눈치를 보다 보니 대부분의 봉신들은 감히 빌 헬름 공작의 자식들의 만행에 대해 고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충언을 올릴 만한 이들은 혹여나 빌 헬름 공작의 평판이 떨어질까 염려하여 쉬쉬하고 그들이 친 사고의 뒷수습을 하면서까지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나쁘지 않은 처사였다.
어차피 공작 위를 물려받을 장남은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기는 하지만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법 없이 성실한 인물이었으니 그 외의 자식들이 사고를 칠수록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현명한 처사는 아니었지만.
“아그라베인.”
“예. 각하.”
여전히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아그라베인이 답했다.
빨갛게 충혈된 그 모습을 보니 머리가 아팠다.
충성심이 강한 것은 좋지만 저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 지시할 것이 있네만.”
“맡겨만 주십시오! 이번에는 실패하는 일 없이 완벽하게 수행하겠습니다!”
이번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듯이 아그라베인이 집무실이 떠나가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에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목소리는 좀 줄이도록 하고.”
“예, 각하.”
해맑게 웃으며 답하는 그를 보자 두통이 밀려왔다.
“첩보원들을 붙여줄 테니 그들과 함께 움직이며 빌 헬름 공작의 자제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오게. 이득이 될 만한 것은 그것이 정보든, 증거든 가리지 않고 모두.”
“알겠습니다. 각하.”
아그라베인은 되묻는 법이 없었다.
그저 반드시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보이겠다는 열의를 불태울 뿐이었다.
“반드시 완수해 보이겠습니다!”
“……수고하게. 그리고 다음에 볼 때는 목소리를 좀 줄일 수 있도록 하고.”
“죄송합니다! 각하!”
재차 우렁찬 목소리로 답하는 아그라베인의 행동에 머리가 아파 왔다.
* * *
그로부터 한 달 후.
발타자르를 비롯하여 서부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제도로 귀환했다.
성대한 전승식이 열렸다.
거리에는 시민들이 뛰쳐 거센 환호성을 보내었다.
여인들은 바구니에 담아둔 꽃잎을 뿌렸으며 아이들은 행진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제 부모의 어깨 위에 오르거나 앞 열로 나가기 위해 바둥거렸다.
“소란스럽군.”
발타자르가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적당히 손을 흔들어주며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가웨인이 말을 몰아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다 필요한 과정 아니겠습니까? 근래에 흉흉한 일들만 가득하다가 이렇게 기뻐할 만한 일이 생겼으니 격한 환호를 보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죠. 중앙에서도 이 기회에 분위기를 쇄신하려 부추긴 것도 있을 테고요.”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제법 즐기는 눈치로군.”
발타자르가 가웨인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의 품에는 꽃이 한 아름 안겨 있었으며 그가 타고 있는 말의 목에도 마찬가지로 꽃 화관이 몇 겹에 걸쳐 걸려 있었다.
“당연하지요.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습니까?”
가웨인의 너스레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실컷 즐겨두게. 얼마 후면 또 정신없이 바빠질 테니.”
그렇게 두 사내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황궁의 성문 앞에 도착했다.
황궁 앞에는 황족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관료들을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발타자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한 청년이었다.
“이런.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셨군요.”
“그렇군.”
황태자가 직접 마중을 나왔음에도 발타자르는 영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워낙 소란스럽고 번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어서 오게, 공작! 수고가 많았네.”
슈텔리앙 후작을 비롯해 오랜 세월 황태자를 지지해 준 이들이 즐비해 있었지만, 황태자가 가장 먼저 다가간 것은 발타자르의 앞이었다.
황태자가 얼마나 발타자르를 총애하는지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전하.”
발타자르가 말에서 내려와 황태자를 향해 고개 숙여 보였다.
그러자 황태자가 발타자르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수고했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전하.”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발타자르를 따듯한 눈빛으로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슈텔리앙 후작에게로 다가갔다.
“황태자 전하께서 장군을 무척 총애하시는군요.”
어느새 말에서 내려온 가웨인이 발타자르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떠십니까? 총애받으시는 기분은.”
가웨인의 농담에 발타자르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나 할 거면 따라오지 말고 린에게 가 보게.”
“아가씨께요? 아가씨는 저보다는 장군께서 오시는 것을 더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그냥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함께 가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물론 린이 자네보다 나를 더 기다리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아무래도 날이 저물어야 저택으로 갈 수 있을 테니 그동안 자네가 가서 달래주고 있으란 말이었네.”
유독 ‘자네보다’라는 말을 강조하는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간만에 연회를 좀 즐겨보려 했더니. 너무하십니다.”
“그래서 싫은가? 난 자넬 생각해서 한 말이었네만 자네가 싫다면야 트리스탄만 보내는 수밖에.”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연회에 참석하게 되면 발타자르의 최측근으로 잘 알려진 그에게 숱한 영애들과 귀족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고 그것은 몹시도 피곤한 일이었다.
당연히 빠질 수 있다면 빠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누가 싫다고 했습니까? 가야죠. 당연히 가야죠. 아가씨께서 절 무척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가웨인이 발타자르가 그랬듯이 유독 ‘절’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데 어느새 황태자가 그에게로 돌아왔다.
“미안하네. 고생하고 온 사람을 너무 세워두었군. 자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그리 말하곤 황태자가 앞서 걸어가기 시작하자 발타자르가 가웨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따로 얘기하세.”
동생, 아이린과 관계된 일이면 유독 유치해지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가웨인이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물론 그러는 가웨인 역시 유치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 * *
황궁에 입궁하자 성대한 연회가 개최되었다.
서부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귀족들을 보니 발타자르의 짐작대로 저택으로 돌아가려면 날이 저물어야 할 듯싶었다.
전후 처리에 대한 논의는 내일 하겠다고 황태자가 미리 못 박아둔지라 더 이상 황궁에 볼일은 없었지만, 이 연회의 주인공 중 하나이다 보니 연회가 개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쉽게 자리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루하군.”
빈 와인 잔을 매만지던 발타자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갤러해드를 방패 삼아 내세우며 접근하지 말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니 감히 다가오는 이는 없었지만, 언제고 틈만 생기면 다가오겠다는 듯이 호시탐탐 이쪽을 곁눈질하는 눈동자가 수십 쌍이었다.
정말이지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개중에 눈에 띄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애슐리였다.
이제는 백작이 된 그녀는 회귀 전의 발타자르가 알던 그녀의 모습대로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만 봐도 그녀의 주변에는 숱한 귀족 자제들이 한 번이라도 그녀에게 말을 걸기 위해 안달을 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하고 있군.’
발타자르가 만족스러워하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애슐리가 작게 눈인사를 해오자 발타자르도 마주 눈인사를 건네었다.
그러자 애슐리의 주변에 있던 영애들이 그 모습을 목격하곤 호들갑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인지는 듣지 않아도 능히 짐작이 되었다.
‘쯧. 이상한 추문이 돌겠군. 괜히 더 엮이기 전에 황태자가 돌아오면 적당히 상대해 주다가 돌아가겠어.’
속으로 혀를 차며 언제 황태자가 올까 기다리던 발타자르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많이 지루하신가 봅니다.”
어느 용감한 녀석이 말을 걸어오나 싶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본 순간. 발타자르는 잠시 말을 잊었다.
화려한 백금발에 전체적으로 고집 있어 보이는 외모.
발타자르가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어찌 모르겠는가.
회귀 전의 그가 수십 년에 걸쳐 충성했던 이를.
최후의 순간까지 그 고집을 꺾지 않았던 고집불통을.
오랜만입니다. 폐하.
턱 끝까지 치밀은 이 말을 간신히 참아내며 발타자르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닙니다. 레니우스 황자 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