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06화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슈텔리앙 후작은 이쯤에서 전쟁을 종결짓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발타자르의 완고한 태도와 황제파의 귀족들 다수가 전쟁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인지라 결국 전쟁을 이어가는 것을 승인했다.
이후 연합군은 서부군을 향해 대대적인 공습을 개시하였지만 빌 헬름 공작가가 참전한 서부군은 더 이상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미염공 싱커 에스파로사를 필두로 여러 뛰어난 무장들이 전선에서 활약하기 시작하니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 * *
“젠장! 신궁 제나라스 스콧! 또 그놈이요!”
전장을 주시하던 귀족 하나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제 검을 내팽개쳤다. 그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서부군의 맹장들 중 하나.
신궁神弓 제나라스 스콧.
그가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교묘하게 마법사들만 골라 저격을 해대니 마법사들이 전선에 나설 수 없게 되다 보니 전투가 지지부진해진 탓이었다.
그를 잡기 위해 기사들을 대거 투입해 보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귀신같이 눈치채곤 병사들을 방패 삼고 도망쳐 버리기일 수이니 그를 잡기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물론 레티시아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지난번에 무리해서 마법을 발현한 탓에 요양중이었다.
“발타자르 공작. 대책이 있소?”
분통을 터뜨리는 귀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슈텔리앙 후작이 묻자 팔짱을 끼고 전술 지도를 내려다보던 발타자르가 트리스탄을 불렀다.
“트리스탄.”
“네, 대장.”
“상대해 보겠나?”
발타자르의 물음에 트리스탄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세요. 오늘 내로 놈의 목을 따 올게요!”
안 그래도 놈과의 일전을 고대하던 트리스탄이었다.
그러던 차에 발타자르가 직접 놈을 지목해 주니 더없이 반가운 그녀였다.
무척이나 자신만만한 그녀의 태도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고는 슈텔리앙 후작에게 말했다.
“그렇다는군.”
이에 슈텔리앙 후작이 트리스탄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성인 데다 바이칸 출신임을 드러내는 푸른 나비 문신을 한 그녀가 썩 미덥지 않았다. 그것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발타자르가 말했다.
“믿어보게. 그녀는 내 수하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니까.”
“공작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트리스탄이 발타자르와 시선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어 보였다. 강한 믿음이 담긴 발타자르의 말이 제법 기뻤던 눈치였다.
“그럼 그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세. 그리고 후방의 그람린 감프 말인데…….”
“그자라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아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테니 말이야.”
“도착하다니? 누가 말이오?”
슈텔리앙 후작의 물음에도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전술 지도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 * *
아우우우─
은백색의 갈기를 흩날리며 숲속을 질주하던 다이어 울프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집채만 한 바위 위에 오르더니 긴 울음소리를 토해내었다.
그러자 잠시 후 다이어 울프의 울음소리에 반응한 듯 숲 속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정신없이 울려 퍼졌다. 마치 숲 자체가 우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 기묘한 모습이 한동안 이어진 끝에 숲 속에서 사내 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 명은 헐벗은 옷차림에 짐승의 가죽 털을 걸치고 있었는데 온몸이 붉은 문신으로 가득했고, 다른 한 명은 그와 상반되게 푸른 머리칼에 황금빛 포효하는 용이 음각된 은빛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다.
“이봐. 여기에 그 고블린인가 뭔가 하는 놈이 이곳으로 오는 게 확실한 거야?”
붉은 문신의 사내.
우트가르트 로키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듯 묻자 그와 나란히 걷던 아그라베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고블린이 아니라 그람린입니다. 그리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맞다니까요. 저희 각하께서 놈들을 이리로 유인한다고 하셨으니 반드시 이곳으로 올 겁니다.”
발타자르와 합류하기 위해 서부로 향하던 아그라베인은 로키를 돌로레스 남작령으로 안내하라는 발타자르의 지시에 곧장 말머리를 돌려 바이칸의 진영으로 향했다.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달린 끝에 바이칸의 진영에 도착했지만, 발타자르의 전령이라는 말에도 로키는 아그라베인을 만나주지 않았다.
아니.
만나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만나려면 바이칸 부족의 대전사를 이겨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그가 신처럼 여기는 발타자르가 내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그라베인은 맨주먹으로 바이칸 부족의 대전사를 때려눕히는 기염을 토해내었다.
이후 아그라베인과 대면을 하게 된 로키는 발타자르의 전언을 전해 들었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아그라베인을 따라 돌로레스 남작령에 도착하여 그람린 감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것 참.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나 지루할 줄이야.”
로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길게 하품을 했다.
그때였다.
바위 위에 올라있던 다이어 울프가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더니 이내 바위에서 내려와 로키에게로 달려왔다.
“음? 뭐야, 펜리르. 뭔가 발견한 거야?”
로키의 물음에 다이어 울프, 펜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로키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등에 멘 양손 도끼를 들어 올리더니 소리쳤다.
“전쟁이다!”
로키의 외침에 숲이 진동했다.
[와아아아─!!]
[전쟁이다아─!!]
수천의 바이칸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지축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그라베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놈들.”
적들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보통인데 적을 발견하자마자 자신들이 매복해 있다 떠벌리다니, 바이칸이란 놈들은 정말 미친놈들이었다.
* * *
빌 헬름 공작의 책사 슬로덴 클루앙의 계책대로 연합군의 후방을 들쑤시고 다니던 그람린 감프는 연합군의 보급대가 크게 우회하여 돌로레스 남작령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전해 듣고는 곧장 병력을 이끌고 그리로 향했다.
“연합군 놈들은 정말이지 학습 능력이 없나 보군.”
저 멀리 보이는 연합군의 보급대를 발견한 그람린 감프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보급대가 가까워지자 그람린은 그의 애검인 갈라틴을 뽑아 들었다. 갈라틴의 검신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전군!”
그람린이 막 돌격이라는 단어를 외치려는 순간.
좌측 숲속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아─!!]
이에 그람린이 황급히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다이어 울프를 탄 바이칸들이 그람린의 부대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야만족? 저들이 어떻게 이곳에…….”
바이칸들이 서부에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이야기는 그람린도 전해 들었었다.
하지만 그들은 클루드 백작령을 점령한 직후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해 들었는데 어째서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의문이었다.
“진형을 갖춰라!”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람린이 재빠르게 지시를 내리곤 말머리를 틀어 달려오는 바이칸들을 바라보았다.
수는 대략 5천 정도.
아군에 비해 수가 많기는 했지만 그람린은 걱정하지 않았다.
우선 자신부터가 마스터급의 강자인 데다 그의 부대에는 스스로를 용사라 칭하는 강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바이칸들이 아무리 수가 많아 봐야 자신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전군 돌격!”
그람린의 지시가 떨어지고 그의 부대가 일제히 달려오는 바이칸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 * *
콰아앙─
거대한 양날 도끼와 롱소드가 맞부딪쳤다.
두 병장기가 맞부딪치자 거친 폭음과 함께 주변 일대에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네놈이 그 고블린인가 뭔가 하는 놈이로구나!”
단 한 번의 격돌로도 충분히 상대의 전력을 감지해 낸 로키가 양날 도끼를 어깨에 걸치며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그람린의 표정은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달려드는 부나방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쳐보니 상대는 자신과 동급의 강자였다.
“야만족 따위가 마스터급의 강자라고?”
도저히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변방에서 짐승 따위나 잡아먹고 사는 야만족이 자신과 동급이라니!
“덤벼라! 고블린! 이 로키가 상대해주마!”
로키의 양날 도끼에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그람린 역시 갈라틴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했다.
“고블린이 아니라 그람린이다! 이 천박한 야만족 놈아!”
선공을 가한 것은 그람린이었다.
오러 블레이드에 휩싸인 갈라틴이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휘둘러졌다.
콰앙- 콰앙-
로키는 그 거대한 양날 도끼를 휘두른다는 것이 믿겨 지지 않을 정도로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며 그람린과 공방을 주고받았다.
주변에 흙먼지가 일어나 두 사내를 집어삼켰다.
흙먼지 속에서 간헐적으로 폭음이 들려왔다.
그렇게 싸워대기를 잠시.
이윽고 흙먼지가 걷히고 두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피투성이의 로키와 달리 그람린은 뺨에 입은 상처만 제외하면 멀쩡한 모습이었다.
“흐흐…….”
돌연 로키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좋아 웃는 것이냐?”
“그대와 같은 강자를 만났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로키가 재차 그람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콰앙-
격돌을 할 때마다 로키의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동시에 동토의 한철로 제작된 로키의 양날 도끼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놈도 끝이다.’
그람린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마스터 간의 대결이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에 비해 이번 싸움은 이례적으로 제법 길었지만, 그것도 슬슬 끝이 보였다.
“죽어라! 야만족!”
그람린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갈라틴이 찬란한 서광과 함께 휘둘러졌다.
이에 로키가 양날 도끼를 맞서 휘둘러 보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분쇄되었다.
갈라틴이 도끼를 베고 이어서 로키의 몸을 반으로 두 동강 낼 기세로 휘둘러졌다. 이대로라면 로키는 그람린의 일격을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스걱─
이변은 그 순간 발생했다.
이미 자신의 도끼가 버티지 못할 것이라 직감한 로키는 도끼와 함께 자신의 왼팔을 내주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따라서 행동은 빨랐다.
갈라틴과 자신의 도끼가 맞부딪치는 순간 로키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고 그 단순한 동작으로 인해 갈라틴은 로키의 몸을 두 동강 내는 대신 그의 팔을 잘라내었다.
푸화하학─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팔이야 다시 붙이면 되지.”
로키의 주먹이 그람린의 턱을 올려 쳤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일격이었다.
쾅-
철갑 투구가 일그러지고.
그람린의 턱뼈가 으스러졌으며.
종내에는 그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풀썩─
로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처 부위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정신을 잃을 만도 하건만.
그보다 승리에 대한 쾌감이 더 컸던 탓일까?
로키의 입가에는 시원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 * *
한편.
연합군과 서부군 진영에서도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다.
드넓은 평원을 무대로 양측의 대군이 맞부딪치며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밀고 밀리는 공방이 오고 가는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존재들이 있었다.
황금빛 갑주를 입고 전장을 질주하는 무리들.
그들은 빌 헬름 공작의 검이라 불리는 황금 독수리 기사단이었다.
황금 독수리 기사단은 그야말로 양 떼 속에 파고든 늑대처럼 거침없이 연합군의 보병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들이 날뛰는 것을 보다 못한 한 기사단이 그들을 막기 위해 출격했지만, 격돌 한 번에 곤죽이 되어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누였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병사들이 절망하며 황금 독수리 기사단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하던 그 순간.
연합군 진영에서 검은 인형이 솟구쳤다.
동시에 전장을 집어삼키는 강렬한 기운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황금 독수리 기사단이 그를 발견하곤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붉은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치고.
휘둘러지는 검이 순식간에 황금 독수리 기사단을 집어삼켰다.
꽈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