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04화
둥- 둥- 둥-
묘한 침묵과 함께 언제까지고 영원할 것만 같은 대치 상황이 유지되던 전선 일대에 북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절로 가슴을 격동시키는 북소리가 적막을 깨며 무언가가 시작될 것을 경고했다.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저마다의 병장기를 굳게 움켜쥐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동물들이었다.
전선 전역에 감도는 전운에 말들이 투레질을 해대었다.
여기저기서 북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연합군 측의 병사들이 전선 일대에 모습을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진격을 시작할 태세를 갖추자 서부군 측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지휘관들은 서둘러 병사들을 전선 일대에 배치하곤 연합군의 동태를 주시했다.
그러한 가운데 붉은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 하나가 홀연히 연합군 병사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터벅- 터벅-
사방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져 요란한 가운데서도 마법사의 발걸음 소리가 병사들의 귓가로 스며들어왔다.
그 기묘한 현상에 병사들이 마법사를 주시하자 마법사가 로브의 후드를 벗어넘기며 얼굴을 드러내었다.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칼.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마법사.
레티시아 스칼렛은 두 팔을 지면을 향해 내뻗었다.
마나하트Mana Heart가 공명하며 내뻗은 두 팔 위로 마나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붉은 화염이 레티시아의 두 팔을 휘감더니 이내 그녀의 주변으로 불길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후우. 시작해 볼까?”
레티시아가 길게 숨을 내뱉더니 허공 위로 떠 올랐다.
수 미터를 떠오른 그녀는 서부군을 내려다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긴 선을 그리는 그들은 마치 작은 개미들의 우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서부군을 내려다보던 레티시아는 발타자르의 지시를 떠올렸다.
[최대한 화려하게.]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 외에는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
단순하지만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전력을 다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건 또 내 특기지.”
레티시아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안 그래도 근래에 익힌 마법을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구나 싶었다.
키이이잉─
돌연, 레티시아의 주변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변으로 넘실거리던 화염이 주변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하고 그것은 이내 거대한 날개의 형상을 이루었다.
이 심상치 않은 사태에 서부군에서는 황급히 기사들을 독촉하여 레티시아를 향해 화살이나 창 따위를 날려 보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주변은 이미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몸이 녹아내릴 정도의 고열 지대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서부군의 저항을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던 레티시아의 팔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춤을 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인이 맺어지며, 그녀의 입에서 노랫말 같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레티시아가 마법을 발현하며 수인을 맺을 때는 고위 마법을 발현할 때뿐이었고 그마저도 영창을 병행한 적은 없었다.
그 말인즉.
현재 그녀가 발현하는 마법은 어지간한 고위 마법을 상회 하는 강력한 마법이란 뜻이었다.
[이것은 태초의 세상을 집어삼킨 거인의 이야기.]
레티시아의 영창이 시작되자 서부군의 지휘관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퇴, 퇴각! 퇴각하라!”
누가 외쳤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외침이 터져 나오기가 무섭게 서부군은 병사, 지휘관 할 것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이것은 불길에 휩싸인 세상의 절규.]
단 두 소절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그 이상은 레티시아의 능력으로는 무리였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마법이 완성되고 합장하듯 모은 두 손에 화염이 솟구쳤다.
솟구친 화염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 강렬한 열기를 아낌없이 내뿜으며 검의 형상으로 변했다.
레티시아의 서늘한 눈동자에 도망치는 서부군의 모습이 맺혔다.
어리석긴.
그녀가 짧게 조소하곤 손에 쥔 불의 검을 휘둘렀다.
“베어라. 수르트의 검이여.”
일순간.
거대한 화염이 도망치는 서부군을 집어삼켰다.
* * *
“아크 메이지가 왜 전장의 신이라고 불리는지 알겠네요.”
가웨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검은빛으로 변한 대지와 잿가루가 흩날리는 삭막한 풍경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수만에 달하는 대군이 있던 곳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강력하긴 하지만 준비 시간이 긴 탓에 빈틈이 너무 많아.”
가웨인이 감탄한 것과 달리 발타자르가 혹평했다.
마법사가 무서운 것은 마법이 발현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만한 고위 마법을 발휘하는 동안에는 틈이 너무 많았다.
방금 전만 해도 상대 진영에 마스터급의 전력이 있었다면 레티시아는 마법을 발현하기도 전에 그 목이 달아났을 것이었다. 물론 발타자르가 그것을 눈뜨고 지켜보지만은 않았을 테지만.
“어땠어요?”
이제 막 지면으로 착지한 레티시아가 다가오더니 뽐내듯 으스대었다.
그 모습이 마치 평소 경쟁하던 친구에게 자신의 성적이 더 높다며 자랑하는 것만 같았다.
“수고했네.”
깜짝 놀라는 모습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감탄하는 모습 정도는 보여줄 것이란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평온하기 그지없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레티시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고작 그게 전부예요?”
“음. 여러모로 약점이 많으니 다음부터는 다른 마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발타자르가 짧게 충고하자 미간 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와락 일그러뜨린 레티시아가 재차 물었다.
“그게 전부예요?”
“달리 듣고 싶었던 말이라도 있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레티시아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됐어요. 들어봐야 엎드려 절 받기지.”
말하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리해서 마법을 발현한 탓에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발타자르가 그런 레티시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가웨인에게 말했다.
“후방까지 데려다주게.”
“알겠습니다.”
짧게 답하곤 가웨인이 말을 몰아 레티시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곤 손을 내미는데 레티시아가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내밀어진 가웨인의 손을 가볍게 툭- 하고 쳐내곤 발타자르가 들으란 듯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됐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발타자르가 그 모습을 보곤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성격 하고는.”
* * *
연합군과 서부군의 전초전은 레티시아 스칼렛의 압도적인 힘의 폭력 앞에 연합군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연합군은 피해가 전무한 것에 비해 서부군은 3천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서부군의 사기는 바닥을 친 반면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연합군은 전선 전역에서 대대적인 진격을 시작했고 서부군은 연전 연퇴를 거듭하며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전장의 양상은 서부 전쟁 개전 초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연합군과 패퇴를 거듭하는 서부군.
이 상황이 유지된다면 연합군의 승리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이상하군.”
“무엇이 이상하십니까?”
가웨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무 쉽게 이기고 있어.”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것입니까?”
“문제는 아니지만 이상하지 않나. 전쟁 초기야 그들이 예측하지 못한 대대적인 습격전을 통해 전략적 우위를 점쳤기에 압승을 거듭했다지만 지금은 다르지. 저들에게도 충분히 대비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패퇴를 거듭하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충분히 타당한 의심이었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마법사를 위시한 연합군이 전력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는 해도 서부는 서부군의 앞마당이었다.
주변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을 그들은 전쟁 동안 단 한 번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싸우는 법이 없었다.
그저 개활지에서 대규모 회전을 거듭하며 패퇴하기만을 반복하니 이쯤 되면 저들이 의도적으로 패전을 반복하며 연합군을 서부 깊숙이 끌어들이려 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러한 전쟁의 양상은 상식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투입시켜 둔 첩자들에겐 별다른 소식이 없던가?”
“예. 빌 헬름 공작은 여전히 두문불출하고 있고 공작가의 병력들 역시 인근 영지들을 점령한 바이칸들을 의식해서인지 공작령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이상했다.
바이칸들을 저리 내버려 둔다면 전선에 투입된 서부군이 앞뒤로 협공을 당할 가능성이 높음에도 그들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거기다 자신이 통치하는 땅이 침범당하고 있음에도 주인인 빌 헬름 공작가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빌 헬름.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발타자르가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패퇴하는 서부군을 응시했다.
* * *
연패를 거듭하는 서부군의 전황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여 34개의 초소를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지만, 레티시아 스칼렛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방어선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마치 도미노처럼 인근의 초소들이 순차 적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초소들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는데, 32초소 인근에 위치한 16초소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서부의 대표적인 무가 중 하나인 윌슨 백작가의 현 가주 넬리사 윌슨은 해일이 밀려들 듯 몰아치는 3천에 달하는 연합군의 군세를 바라보며 당혹스러워하는 병사들을 추슬러 진영을 갖출 것을 지시했다.
‘비록 지난번 전투에서는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변변한 싸움조차 해보지 못하고 패주하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서부의 귀족들 그 누구도 중앙과 북부가 손을 잡고 서부를 침공하리라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때문에,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밀려드는 연합군의 군세에 밀려 후퇴하며 그들의 영지가 연합군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현재 진격해 오는 연합군의 추정 규모는 5천.
아군의 수가 그와 비등하고 지리적 유리함을 선점하고 있었다. 마법사의 개입만 없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달려오는 연합군은 용맹하기로 유명한 북부군이 아닌 평화에 찌들어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진 중앙군이었다.
비록 그동안의 전투를 통해 실전 경험을 겪었다고 해도 그동안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넬리사의 병사들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다.
넬리사는 선두에 타워 쉴드를 든 방패병들을 내세우며 후열의 궁병들에게는 언제고 사격할 수 있도록 지시를 내렸다.
‘상대는 중앙군 소속의 병사들.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어. 그러나 아군의 숫자만으로는 언제까지고 연합군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빌 헬름 공작 각하의 명대로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후퇴해야겠어.’
비단 그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진군하는 연합군의 군세와 맞서고 있는 서부군의 지휘관들은 모두 공통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자.]
‘그렇게 하면 빌 헬름 공작 각하께서 무슨 수를 내주실 것이다.’라고 말이다.
“비록 적의 수가 많다고 해도 두려워 할 것 없다! 서부의 아들들이여! 검을 들어라!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가져라! 전신 아레스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리라!”
넬리사의 외침에 병사들이 쥐고 있던 병장기들을 들어 올리며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오싹한 기분을 만끽하며 넬리사 윌슨이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서부의 평안은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손으로─!!]
병사들의 함성과 함께 16초소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서부 전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