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02화
발타자르가 돔보 마을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글루스가 마중을 나왔다.
기억 속의 모습에 비해 앳된 티가 물씬 풍겼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기억 그대로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글루스가 깊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발타자르가 그런 글루스를 바라보다 힐끗 그의 등 너머를 바라보았다. 나름대로 몸을 숨긴다고 숨긴 것 같지만 집안의 창문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사내들이었다.
이 모습을 발견한 트리스탄은 글루스를 비롯해 돔보 마을 사람들이 발타자르에게 무례를 범했다고 생각하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분위기가 흉흉해지기 시작하자 글루스가 재빨리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다들 나오려는 것을 자칫 공작 각하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제가 집 안에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치로 보아 혹시나 발타자르가 나쁜 마음을 먹고 찾아왔을까 싶어 사내들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켜 둔 듯했다.
“그걸 말이라고…….”
옆에서 트리스탄이 나서려는 것을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잘했네. 자넨 몰랐겠지만 난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거든. 한데.”
말하며 발타자르가 말을 몰아 글루스에게로 다가갔다.
다그닥- 다그닥-
느긋한 속도로 걸어간 말이 글루스의 앞에 도착하자 발타자르가 돌연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청아한 검명과 함께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이 순식간에 글루스의 목에 닿았다.
“공작 각하……?”
글루스가 갑자기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무장한 이들을 매복시켜두고선 마중이라니. 그건 아니지 않나?”
발타자르의 말에 글루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들켰다!”
“어서 선생을 지켜!”
건물 사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일단의 무리가 글루스에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안돼! 멈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글루스가 황급히 소리쳤지만, 한발 늦었다.
순식간에 붉은 오러 블레이드를 휘감은 발타자르의 검이 휘둘러졌다.
꽈가가가강─
일격에 달려오던 무리들이 나가떨어졌다.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망정이지 작정하고 휘둘렀다면 즉사를 면치 못할 일격이었다.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한 것은 좋았네만. 그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했어야지.”
나름 수준이 되는 듯 쓰러졌던 이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재차 글루스를 향해 달려왔다.
“방심하지 마!”
“우리가 시간을 끌겠다! 너흰 서둘러 선생을 데리고 도망쳐!”
그들은 발타자르가 글루스를 해치려 한다고 오해한 것인지 결연한 표정으로 글루스를 도피시키려 했다.
“멈…….”
글루스가 그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봐주는 것은 한 번뿐이다.”
발타자르의 음성이 고요히 울려 퍼지더니 이내 강대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강렬한 기운이 글루스를 향해 달려오던 이들을 순식간에 짓눌렀다.
“컥-”
그들은 자신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땅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숨이 막힌다는 듯이 양손으로 제 목을 감싸 쥐더니 이내 혼절했다.
“무, 무슨…….”
떨리는 눈동자로 쓰러진 이들을 바라보는 글루스의 귓가로 발타자르의 냉랭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오, 오해십니다.”
“무엇이 오해인가?”
“저들은 단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시켜 둔 이들일 뿐입니다. 지금도 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나선 것이지 공작 각하를 해하려는 생각은 결코 없었습니다.”
글루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합당한 조치였다.
그동안 그가 보아온 귀족들은 대부분 탐욕스러운 이들뿐이었다.
따라서 그 유명세가 제국 전역에 널리 퍼진 발타자르라고 해도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고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고자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알고 있네. 저들은 그저 자넬 지키려고 한 것이라는 것을 말일세.”
발타자르가 검을 거두며 말했다.
“자네는 다른 명사들처럼 널리 이름을 떨칠 정도로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네의 재능을 알아보고 추천해 줄 만한 지인도 없지. 한데 생전 일면식 한 번 없던 공작이라는 자가 이리 직접 찾아올 정도로 자네를 만나기를 원하고 있으니 의구심이 들었겠지. 혹여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고 말이야. 그래서 노약자들을 대피시키고 저들을 준비해 둔 것일 테지. 최악의 상황에는 대피시켜 둔 이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 생각이었겠지. 이해하네. 나쁘지 않은 조치였네.”
말하며 발타자르가 말 위에서 내려왔다.
“하나. 그런 사정을 짐작하고 있음에도 내가 이렇게 손을 쓴 이유는 자네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서였다네.”
“벌…… 말씀이십니까?”
“남의 귀한 수하를 멋대로 부려먹었으면 그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지 않겠나?”
“그건…….”
글루스가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손님을 계속 이리 세워둘 참인가?”
“……아닙니다. 마침 촌장의 집이 비어 있으니 그리로 안내하겠습니다.”
글루스가 앞장서며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촌장의 집으로 향하는 글루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발타자르와 대면한 이후로 계속 그의 의도대로 끌려다니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 * *
“일부러 그러신 거죠?”
글루스의 뒤를 따라 발타자르와 나란히 걸어가던 트리스탄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얼 말인가?”
“손을 쓰신 거요. 사실 다 알고 계셨잖아요. 저 사람이 주변에 사람을 숨겨둔 것도. 그 이유도요.”
트리스탄의 말에 발타자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만.”
“왜 그러신 거예요? 꼭 영입해야 할 인재라고 하셨으면 어르고 달래서 회유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전사도 아니고 머리 쓰는 사람이면 더 그래야 하는 것 같은데요.”
그녀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앞서 걸어가는 글루스의 등을 바라보며 답했다.
“소위 천재라 불리는 이들을 상대할 땐 말일세. 생각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는 법이라네. 쉴새 없이 흔들어 잔수를 부리지 못하게 사전에 차단해야 하지. 괜히 시간을 주었다간 여러 가지 기묘한 수로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드니까. 그리고…….”
발타자르가 글루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힐끗 트리스탄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자네를 고생시켰으니 조금 혼내주려는 생각도 있었고 말일세.”
발타자르의 말에 트리스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내 그녀가 씨익- 웃으며 힘차게 답했다.
“그건 그렇죠!”
* * *
타닥- 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벽난로와 천장 곳곳에 내걸린 이름 모를 약초들.
벽난로 안에서는 커다란 솥단지에서 끓고 있는 무언가가 구수한 냄새를 풍겨왔다.
따로 방은 없고 허술한 침상 하나와 테이블이 전부인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이지만 그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인근 산에서 채집한 버섯으로 우려낸 차입니다.”
글루스가 마치 제집처럼 능숙한 움직임으로 차를 끓여와 권했다.
발타자르는 글루스가 끓여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독특한 향이 느껴졌지만 나쁘지 않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말하며 발타자르가 품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어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글루스가 눈을 빛냈다.
발타자르가 펼쳐놓은 두루마리는 대륙 전도였다.
“이것을 왜……?”
글루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혹시 현자 오스왈드 간다르바의 예언을 알고 있는가?”
“그 마신이 강림할 것이란 예언 말씀이십니까? 설마 그 미치광이의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오스왈드 간다르바가 미치광이라고?”
발타자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치광이라.
지금쯤 북부에서 한참 열심히 미래를 대비하고 있을 오스왈드가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네. 미치광이지요. 그 허무맹랑한 예언은 둘째치고 순진한 농민들을 현혹하여 민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 때문에 허무하게 스러져 버린 목숨이 얼마였습니까.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그런 일은 하지 못할 겁니다.”
발타자르가 대륙 전도에서 서부지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예언이 사실이라면?”
빌 헬름 공작령을 가리키던 발타자르의 손가락이 천천히 서쪽으로 이동하더니 이내 거대한 나무가 그려진 이종족의 땅에서 멈추어섰다.
“북부와 중앙이 손을 잡았다고는 해도 서부가 이리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빌 헬름 공작가의 주력이 이종족들의 땅으로 향했기 때문일세. 그리고 그 이유는 세계수에 이변이 발생했기 때문이고.”
“세계수의 이변이 오스왈드 간다르바의 예언과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현재 세계수에게 벌어진 이변은 마왕 때문일세.”
글루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마왕…… 말입니까?”
“그렇네, 마왕. 비단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네. 곧 공표될 사실이지만 동부와 남부가 쉬이 서부를 돕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마왕 때문이고 대륙 곳곳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들도 대부분 마왕들의 소행이지.”
“그 말씀은 마왕이 한둘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발타자르가 손뼉을 짝- 하고 쳤다.
“바로 맞추었네. 마왕들의 목적은 하나. 오스왈드 간다르바가 예언한 마신의 강림일세.”
글루스는 대체 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허무맹랑한 소리인데 시종일관 진중한 발타자르의 모습을 보면 저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절 찾아온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뻔한 질문을 하는군. 당연히 자네가 필요해서 찾아온 것이지 않겠나.”
“저를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민망하지만 내 휘하에는 책사가 턱없이 부족하다네. 특히나 큰 대국을 볼 줄 아는 책사는 전무 하다시피 하지. 그래서 자네를 찾아온 걸세. 자네에겐 큰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으니까.”
글루스는 일면식 한 번 없는 발타자르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러한 믿음을 내비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으로 자신을.
자신의 재능을 원하는 이를 만나게 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게.”
발타자르가 흔쾌히 수락하자 글루스가 물었다.
“어찌하여 이번 전쟁을 일으키신 겁니까?”
“그래야만 했으니까.”
“하면 어찌하여 권력자가 되신 것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무엇을 그리 경계하십니까?”
“환란. 그리고 혼돈.”
“공작 각하께서 그리시는 미래에 황실이 함께하는 것입니까?”
시종일관 막힘없이 답을 주던 발타자르가 처음으로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어떻게 격변할지 모르는 미래에 필요하다면 황실마저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만 했다. 따라서 이것은 확답을 내려주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글쎄. 그건 확답을 내리기 어렵네만.”
“새로운 왕조를 꿈꾸십니까?”
이 질문에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난 내 사람들과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것이 꿈인 사람일세.”
이 대답에 글루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비록 썩어빠진 조정의 행태에 실망하여 낙향하였으나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는 제국의 황실을 바로잡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시키고자 하는 꿈이 남아있던 글루스였다.
발타자르가 황실을 위하여 움직이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가 향하는 길은 황실에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결코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따라서 자신이 옆에서 잘만 보좌한다면 제국의 영광을 재현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또한,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주고 필요로 하는 이였다.
적어도 야심 가득한 여타의 군웅들보다는 낫다는 판단이 서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만약 각하께서 새로운 하늘을 꿈꾸신다면 저는 각하의 근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발타자르가 왕이 되고자 욕심을 낸다면 결코 방관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글루스가 면전에서 배신을 거론했음에도 발타자르는 그저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