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이 회귀함-100화 (100/183)

공작이 회귀함 100화

글루스 이덴시아는 몰락 귀족 출신으로 가문을 부흥시키고 제국 황실을 위해 일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제도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하나 비리가 만연한 아카데미의 실정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다지 좋지 못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그나마 그를 좋게 보았던 한 교사의 추천으로 제도의 하급 행정관으로 임관하게 되었지만, 상급자의 노골적인 뇌물 요구에 그를 고발하였다가 눈 밖에 나게 되어 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글루스가 고발했던 상급자는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고 결국 글루스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글루스가 고향으로 내려가자 그를 괴롭히던 상급자가 더 이상 손을 쓰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간 글루스는 그곳에서 마을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일거리를 하며 세월을 보냈다.

“스승님! 스승니이임!”

이른 아침.

집 앞의 마당을 청소하고 있던 글루스는 그의 제자 로딘이 그를 애타게 부르며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을 발견하곤 빗질을 멈추고 달려오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곧 글루스의 앞에 도착한 로딘은 허리를 숙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들갑을 떨었다.

“헉, 헉…… 스승님! 크,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기에 그리 호들갑이더냐?”

글루스의 물음에 로딘은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더니 허리를 펴곤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펜바흐 성이 중앙군에 함락되었대요!”

로딘의 말에 글루스는 일순간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안색을 회복했다.

중앙에서 서부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접했을 때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오가는 상인들에게서 들은 제국의 정황들로 볼 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서부 침공의 명분은 빌 헬름 공작가가 이종족들과 내통했다는 것이었다.

이것만 가지고는 서부를 침공의 명분이 부족했고 그런 만큼 서부를 침공한 중앙과 북부 연합군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써서라도 감히 일반 백성들에게 손을 쓰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도 영지를 점령한 연합군은 영주와 그 휘하의 봉신들에게 손을 쓸지언정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

또한, 서부군의 경우는 빌 헬름 공작의 성정상 쉽사리 백성들을 징집하지는 않을 테니 전투가 마을 인근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굳이 터전을 내팽개치고 산속으로 숨을 필요가 없었다.

물론 전쟁이라는 것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조심은 해야겠지만 말이다.

“녀석. 큰일은 맞다만 어디 중앙군이 이리로 오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게 그리 호들갑 떨 일이더냐?”

글루스의 말에 로딘이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팍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닌데 정말 큰일 났다니까요?”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설령 영주성이 함락된다고 해도 저들은 우리들을 해하지 않을 것이니 몸을 사리기만 하면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이다.”

“영주성이 함락된 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뭐가 문제더냐?”

“오펜바흐 성을 점령한 중앙군이 지금 약탈을 실시하고 있대요.”

로딘의 말에 글루스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약탈을 실시하고 있다고? 확실한 정보더냐? 누구에게 그 소식을 들은 것이냐.”

글루스가 로딘의 양팔을 붙잡곤 빠르게 물었다.

“옆 마을 잭네 밭에 품앗이를 하러 갔는데 오펜바흐 성에서 근무하던 잭네 삼촌이 피투성이가 돼서 왔더라고요. 그분이 그랬어요. 중앙군이 오펜바흐 성에서 대대적인 약탈을 벌이고 있다고요. 주변 마을도 안전하지는 않으니까 서둘러 몸을 피하라고요.”

“하…… 대체 어느 얼간이가 군의 지휘관으로 있는 거지?”

글루스가 중얼거리며 손으로 제 이마를 감쌌다.

“혹시 그 삼촌이라는 사람이 오펜바흐 성을 점령한 군대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아니면 그 군의 깃발에 대해서 얘기한 것이 있더냐?”

글루스의 물음에 로딘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답했다.

“태양. 태양이 그려진 깃발을 조심하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로딘의 말에 글루스가 탄식했다.

“자비에고 주교…….”

어느 얼간이가 약탈을 승인했는지 의아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 탐욕스러운 대신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옆에 그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올바른 충언을 할 이 하나 없을 테니 저리 멋모르고 멍청한 짓을 벌인 것이겠지.

“넌 가서 얼른 마을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서둘러 산속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전하거라. 짐 같은 건 챙길 생각도 말고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말이다. 알겠느냐?”

글루스의 말에 로딘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가서 전할게요!”

그러곤 결연한 표정으로 마을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글루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의 관건은 발타자르 공작이 이 일을 얼마나 빨리 알아차리고 움직이는가 겠군.”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풍문으로 들었던 발타자르 공작이라면 약탈 행위를 벌였을 때의 여파를 모를 리 없을 것이었다.

띠라서 발타자르 공작이 자비에고 주교의 약탈 건을 알아차린다면 분명 군을 보내 자비에고 주교를 처벌할 것이 분명했다.

“시간. 시간이 관건인가…….”

* * *

“촌장님! 도망가셔야 한다니까요?”

“아, 글쎄 이놈아! 안 간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하느냐!”

마을 사람들이 피난길에 올랐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온 글루스는 촌장의 집 앞에서 촌장과 입씨름을 벌이는 로딘을 발견했다.

“언제 중앙군이 여기로 들이닥칠지 모른다니까요? 스승님께서도 그러셨다구요.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요.”

“어허! 이놈이 어디서 언성을 높여! 그리고 추수철에 농사일은 내팽개치고 도망치면 올겨울은? 지금 추수를 하지 않으면 다 굶어 죽어야 하는데 어딜 도망친단 말이냐!”

“아이참…….”

촌장의 고집에 로딘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라도 촌장을 끌고 가려 했지만, 촌장은 어디서 힘이 솟아났는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다투는 사이 글루스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것을 발견한 촌장이 반색하며 글루스에게 물었다.

“마침 잘 왔네. 선생이 저번에 그랬지 않은가. 마을 근처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이상에야 병사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도망칠 필요는 없다고.”

“제가 분명 그리 말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차피 높으신 분들이야 재물이나 탐내시지 우리 같은 천것들의 목숨을 탐내시지는 않지 않는가?”

촌장의 목소리에서 절대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는 고집이 느껴졌다.

글루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온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촌장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저들 대부분이 절대 마을을 떠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촌장을 설득해야만 했다.

“촌장님. 아주 떠나자는 말이 아닙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면 잠시 자리를 피하지 않습니까? 이번 일도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잠시, 아주 잠시만 마을 사람들과 산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돌아오면 될 일입니다. 물론 추수가 급하기는 하지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들은 촌장님 말씀대로 재물을 원하는 것이지 농작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돌아왔을 때 추수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글루스의 설득에 촌장이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이 촌구석에 찾아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마을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준 글루스의 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올해 수확량이…….”

“사실 추수를 조금 늦게 한다고 해도 올겨울을 보낼 식량 정도는 충분히 수확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납부해야 할 세금인데 이건 제가 확언할 수 있습니다. 당분간은 세금 징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절 믿고 일단 피하시지요.”

“선생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결국 촌장이 고집을 꺾고 피난길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그 뒤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주 약간의 식량만을 챙겨 들고는 서둘러 산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스승님! 저기!”

산을 오르던 글루스는 로딘이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그곳을 바라보았다.

마을에 병사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만약 촌장을 설득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일을 치를 뻔했다.

“하아…… 결국 이리 되는가.”

글루스가 손으로 제 두 눈을 덮으며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자신을 주목하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혹시 저들이 쫓아올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야 합니다.”

* * *

“저기예요?”

발타자르의 명을 받고 글루스를 찾기 위해 돔보 마을에 인근에 도착한 트리스탄이 길을 안내해 준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인은 인근 마을에서 자비에고 주교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있었는데 때마침 글루스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트리스탄의 눈에 띄어 구출 받게 되었다.

이후 트리스탄이 구출해 준 이들에게 글루스에 대해 묻자 한 여인이 돔보 마을에 살고 있다고 알려주었고 트리스탄은 여인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였다.

이에 여인은 은혜를 갚기 위해 트리스탄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고 돔보 마을까지 길 안내를 한 시점이었다.

트리스탄의 물음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비에고 주교의 병사들이 술잔치를 벌이고 있는 마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 맞아요. 저기가 돔보 마을이에요.”

“그렇단 말이지?”

트리스탄이 씨익 웃었다.

발타자르가 이름만 달랑 알려주고선 글루스를 찾으라고 했을 때만 해도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그리 힘들이지 않고 찾게 되니 무척 기분이 좋았다.

“수고했어요. 야, 마을까지 모셔다드려.”

트리스탄이 제 수하를 불러 여인을 마을까지 데려다줄 것을 지시하곤 등에 멘 활을 손에 쥐었다. 그러곤 활시위를 길게 잡아당겼다.

트리스탄은 저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글루스를 찾기 위해 여러 마을을 지나쳐온 그녀였다.

그리고 그 마을들은 하나같이 자비에고 주교들의 병사들에 의해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여인들은 강간당하고, 사내들은 결박되어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노약자들은 목이 베여 보란 듯이 마을 어귀에 창끝에 목이 내걸렸다.

저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이지.

“죽여.”

트리스탄의 사형 선고가 떨어지고,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동시에 그녀의 수하들이 거친 함성과 함께 일제히 땅을 박차고 돔보 마을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 *

다그닥- 다그닥-

트리스탄은 말을 몰아 천천히 돔보 마을에 진입했다.

술에 잔뜩 취한 자비에고 주교의 병사들은 그녀의 수하들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정리되었다.

마을에 진입한 트리스탄은 곧장 마을의 중심으로 향했다.

지나가며 둘러본 마을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약탈의 흔적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마을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도망쳤나 본데?’

확실하진 않지만, 다행히 마을 사람들은 자비에고 주교의 병사들의 마수를 피해 도망친 듯했다.

이윽고 마을의 중심에 도착한 트리스탄은 사로잡힌 병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디 있어?”

그녀의 물음에 병사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모,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미리 알고 도망쳤는지 저희가 이 마을에 왔을 때는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야?”

“정말이고말고요!”

트리스탄이 의심스럽단 목소리로 묻자 병사가 자신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에 트리스탄이 제 수하를 바라보자 수하가 말했다.

“사로잡힌 사람도 없고, 시체도 없는 것으로 보아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수하의 말에 트리스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병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병사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전 살면서 거짓말은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병사의 말에 트리스탄이 피식 웃었다.

“누가 뭐래?”

“그, 그러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병사가 희망이 담긴 목소리로 묻자 트리스탄이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동시에 그녀의 수하들이 일제히 사로잡은 병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