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98화
자비에고 주교를 구금하고 2군의 지휘권을 회수한 발타자르는 이후 제도로 전령을 보내어 자비에고 주교의 처벌을 공론화시켰다.
본래는 현장 지휘관의 권한으로 곧장 군사 재판을 열어 처벌할 수도 있었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좀 더 큰 판에서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황제파는 당연히 자비에고 주교의 처벌에 대해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자비에고 주교의 파벌의 경우 대다수가 발타자르의 통제를 받는 상황이었기에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었다.
하여 자비에고 주교의 처벌은 빠르게 의회를 통과하였고 사형이 확정되었다.
집행 시기는 슈텔리앙 후작이 발타자르가 구축한 전선에 도착하는 대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집행 과정은 마탑의 도움을 받아 마탑의 분점이 위치한 영지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통신구를 통해 자비에고 주교의 사형 집행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제도의 슈미트라 교단을 주축으로 잠시 소란이 일기는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대로 기운 상황이었다.
되려 이 행동이 황태자의 진노를 사 슈미트라 교단의 주요 인사들이 투옥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 * *
“장군 아그라베인 경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그라베인이?”
자비에고 주교의 처형식 이후의 행보에 대해 계획 중이던 발타자르는 가웨인의 말에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예. 지시하신 임무가 끝났으니 장군께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습니다만 어찌하시겠습니까?”
아그라베인은 발타자르 휘하의 기사 중에서 무력으로 순서를 매기자면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맹목적인 신봉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이기에 발타자르의 기사들을 이야기할 때 늘상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기사였다.
오죽하면 동료 기사들이 그를 광신도라 칭할 정도였다.
곁에 두면 그 충성심으로 인해 자주 사건 사고를 불러일으키곤 해서 그에 대한 벌로 북부에 자리 잡은 마왕들을 제거하는 임무에 투입된 상태였다.
물론 아그라베인 단독으로 주어진 임무는 아니었고 간다르바를 비롯하여 발타자르 휘하의 내로라 하는 기사들과 무장들이 대거 투입된 대규모 임무였다.
발타자르가 예상하기로 한 달은 더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일이 마무리된 듯했다.
“여전하다던가?”
여러 의미가 담긴 함축적인 질문에 가웨인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뭐…… 사람이 쉽게 달라지겠습니까? 여전하다더군요. 아니, 조금 더 상태가 심각해졌다더군요. 최근에는 장군께서 하사하신 검을 모셔다 놓고 아침마다 기도를 한다더군요.”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정신 좀 차리라고 밖으로 내돌렸더니…….”
아그라베인의 충성심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아그라베인의 충성심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그렇다고 아예 통제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이참에 불러들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과한 충성심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치기는 해도 나름 유능하지 않습니까? 저렇게 밖으로 내돌리기보다는 차라리 곁에 두시고 직접 통제하시는 것이 나을듯합니다만. 장군의 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녀석 아닙니까?”
아그라베인은 무력 자체는 그렇게 특출나다 말하기 어렵지만, 다방면으로 여러 유용한 기술들을 익히고 있어 곁에 두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다만 그 맹목적인 충성심이 문제가 될 뿐이지.
“듣기로는 이번에 고위기사에 올랐다던데 직속 호위로 두시고 곁에서 부리시지요.”
가웨인의 제안에 발타자르는 고민했다.
밖으로 내돌려도 변함이 없으니 가웨인의 말대로 곁에 두고 부리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합류하라 전하게.”
결국, 발타자르는 아그라베인을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아그라베인 경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기뻐하겠군요.”
가웨인의 말에 일순간 발타자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아그라베인에게 무언가를 받은 것은 아니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발타자르의 눈길에 가웨인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발타자르에게 잘 좀 말해 달라며 서신과 함께 보내온 뇌물성의 선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흠흠…….”
멋쩍어진 가웨인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보다 지난번에 린 아가씨께 편지를 보내셨는데 답서는 받으셨습니까?”
그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에 발타자르가 한마디 쏘아주려고 하는 순간.
발타자르의 기감에 마기가 감지되었다.
이에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발타자르가 창가로 향했다.
‘저 방향이면…….’
잠시 창밖을 응시하며 마기가 느껴진 방향을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이내 가웨인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지시를 내렸다.
“난 이 길로 곧장 지하 감옥으로 향할 테니 자네는 가서 레티시아를 불러오게.”
굳은 얼굴로 지시를 내리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가웨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고개 숙여 보인 후 레티시아를 부르기 위해 떠나갔다.
가웨인이 떠나가자 창밖을 한 번 더 바라보던 발타자르 역시 이내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은은하게 방안의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누군가가 흘려내는 미약한 신음성을 제외한다면 한없이 고요하기만 한 이 공간에 돌연 빛이 찾아들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어둠으로 뒤덮인 감옥을 밝히더니 이어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각-또각-
발소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커져만 갔다.
“프락시온 제국에 영광을!”
잠시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더니 간수들이 경례를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으으으…….”
감옥의 차가운 바닥에서 신음성을 토해내던 사내, 자비에고 주교가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눈을 떴다.
이 감옥에 투옥된 이후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간수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고문실로 끌고 가 고문했다.
일반적으로 고문이라 함은 상대방에게서 무언가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 행하는 행위이지만 이들은 묻는 것 하나 없이 고문만을 반복했다.
자비에고 주교가 애원하고, 설득하고, 협박해 보아도 그들은 벙어리라도 된 마냥 말 한마디 없이 고문을 이어갔다.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고문의 이유라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고문을 당한 후에는 정말 죽지 않을 정도의 치료만 받고 감옥에 다시 내팽개쳐졌다.
식사는 평소라면 쓰레기라며 거들떠도 보지 않을 곰팡이 핀 빵 몇 조각이 전부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자비에고 주교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발타자르…… 이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발타자르에 대한 분노만 커져만 갔다.
자비에고 주교는 자신이 이런 꼴이 된 것은 다 발타자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좋지 않은 시기에 약탈이라는 행위를 벌인 것이 큰 문제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자신과 상의를 한 후에 몇몇 귀족의 독단인 것으로 처리해도 될 문제였다.
그런데 자신과 상의는커녕 기습적으로 군을 이끌고 찾아와 폭행하고 감옥에 투옥시켰으며 고문을 일삼으며 지옥과 같은 나날을 보내게 만들었다.
이것은 배신이었다.
전 군부대신 칼리우스 프로이덴의 역모 사건 때 자신이 발타자르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제 놈이 지금의 위치에 올랐을 수나 있었겠는가?
절대 아니었다.
물론 당시 발타자르의 상승세가 무섭다고는 하지만 결국 변방의 지배자일 뿐이었다.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이 없는 켈마르크 백작을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고 대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제국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음에도 그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을 줄은 몰랐다.
“끄윽……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절대 놈을 용서치 않으리라!
그렇게 결심하는 그때.
자비에고 주교의 머리맡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도와줄까?]
음습하고 소름 끼치는 그 목소리에 자비에고 주교가 몸을 흠칫거렸다.
“누, 누구인가…….”
자비에고 주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주교의 눈앞에서 뭉글뭉글한 검은 구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몸은 불화의 조율자 안드라스. 그대의 복수를 이루어줄 유일한 존재이지.]
목소리는 이 검은 구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자비에고 주교가 남은 힘을 쥐어짜 눈을 부릅뜨자 검은 구체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감옥을 뒤덮은 어둠보다도 더 짙은 어둠으로 이루어진 검은 구체의 표면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자비에고 주교를 응시하고 있었다.
“복…… 수?”
[그래, 복수. 원망스럽지 않은가? 그대를 이렇게 만든 존재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은가?]
그것은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내가 이루어주지.]
무척이나 달콤하고 매혹적인.
[내 손을 잡게. 그리하면…….]
그러나 본능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네의 복수를 이루어주겠네.]
마왕 안드라스가 초승달처럼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 * *
“좋다. 발타자르. 그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내 영혼이라도 웃으며 내어 주겠노라!”
복수심에 눈이 먼 자비에고 주교가 안드라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것이 몹시도 즐겁다는 듯이 안드라스가 까악까악-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좋군. 그렇다면 우선 자네의 몸부터 회복시켜 주어야겠지. 몸이 건강해야 무엇이든 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말과 동시에 검은 구체에서 검은 촉수가 솟아났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자비에고 주교의 전신을 꿰뚫었다.
촉수가 쉴새 없이 꿀렁거리며 자비에고 주교의 몸 안에 마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꺽-”
순간.
자비에고 주교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지더니 이내 온몸의 혈관이 육안으로도 선명히 구분될 정도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자비에고 주교가 발작하듯 몸을 뒤틀기 시작하더니 강렬한 마기의 어둠에 휩싸였다.
불룩- 불룩-
자비에고 주교의 몸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반복한 끝에 그의 몸을 휘감았던 어둠이 사라지고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 자비에고 주교가 두 눈을 떴다.
“하아…….”
노인의 외견은 오간 데 없고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된 자비에고 주교가 참아왔던 숨을 길게 토해내었다.
“힘이 넘치는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분이야.”
단순히 젊어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온몸을 뒤덮는 기이한 문신과 붉게 변한 눈동자.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마기.
“이 정도 힘이라면 단박에 놈을 찢어 죽일 수 있겠어.”
가슴이 복받쳐 오르는 충만감에 자비에고 주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즐거워 보이는군.”
그때. 자비에고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놈의 목소리가.
이에 자비에고 주교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어찌. 밀회는 즐거웠는가?”
그러자 보이는 것은 발타자르가 어둠 속에서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