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97화
오펜바흐 남작령을 점거한 자비에고 주교는 그곳에서 약탈 행위를 벌이는 일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빌 헬름 공작가가 본격적인 행보를 보이며 인근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비에고 주교 측에는 마법사들이 존재하는 만큼 무리한다면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곧장 빌 헬름 공작령까지 진격할 수 있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저 견고한 방어선을 2군만으로 뚫을 경우 마법사들이 있다고 해도 2군 역시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피해를 입은 2군의 전력은 빌 헬름 공작령을 단독으로 점령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전공이 탐나기는 하지만 지금은 힘을 비축하고 있을 때였다. 발타자르가 이끄는 1군과 슈텔리앙 후작의 3군이 도착하면 저 방어선 따위는 금방 무너질 것이고 이후는 누가 더 많은 전력을 보존했느냐에 따라 이번 서부 전쟁의 1등 공신이 가려질 테니까.
“좋군.”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자비에고 주교가 평화로운 오후의 한때를 만끽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벌컥-
갑작스레 방문이 열리며 병사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주교님! 크, 큰일 났습니다!”
방안에 난입하다시피 들어온 병사 하나가 호들갑을 떨어대었다.
이에 자비에고 주교가 미간을 찌푸리며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크루세이더를 노려보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기에.”
크루세이더의 말에 자비에고 주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한심한 놈’ 하고 중얼거리더니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병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호들갑이냐.”
“바, 발타자르 공작 각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병사의 보고에 자비에고 주교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경계를 서던 병사들에게서 아무런 보고도 없었으니 군을 이끌고 온 것은 아닐 테고 소수의 호위 병력과 함께 갑작스레 방문한 것 같은데 고작 이런 일로 병사가 이리 호들갑을 떨었다고 생각하니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물론 이 시기에 아무런 말도 없이 방문한 발타자르 공작의 행동이 의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하아…… 그게 뭐 큰일이라고 이리 호들갑을 떤 것이냐.”
짜증이 물씬 묻어나는 자비에고 주교의 말에 병사의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그, 그것이…….”
“되었다. 내 직접 마중 나갈 테니 앞장서거라.”
하지만 자비에고 주교는 병사의 변명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기에 그의 말을 차단하곤 방을 나섰다.
* * *
“허허…….”
발타자르를 마중하기 위해 오펜바흐 남작 성을 나선 자비에고 주교는 눈앞에 보이는 군세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소수의 호위만 이끌고 온 줄 알았더니…….”
아예 1군 전체를 이끌고 온 듯했다.
이는 사전에 맞춰두었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 것을 뜻했다.
물론 자비에고 주교가 계획대로 잘 짜여 있던 전선을 무너뜨리고 단독으로 치고 나간 순간부터 계획이 어그러진 상태였지만 말이다.
발타자르와 그가 이끄는 군세가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자비에고 주교는 속으로 인근의 경계를 도맡은 책임자를 문책해야겠다 생각하며 옆에 있던 장교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것이냐? 아무리 감시가 소홀했다고 해도 저만한 대군이 이동하는데.”
자비에고 주교의 말대로 아무리 감시가 소홀했다고 한들 이만한 대군이 이동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었다.
주교의 물음에 장교가 답했다.
“뗏목을 이용해 웰링턴 강물을 타고 이동했다고 합니다.”
“뗏목을?”
장교의 대답에 자비에고 주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비에고 주교도 웰링턴 강물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물의 수심이 군선을 띄우기에 적합하지 않고 그렇다고 뗏목으로 이동하자니 수심에 비해 물살이 세서 이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물론 마법을 이용한다면 안전하게 이동이 가능하겠지만 고작 진군 속도를 며칠 앞당기기 위해 마법사들을 쓰는 것은 낭비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동 도중 적의 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도 했고 말이다.
‘무언가 수를 쓴 것이로군. 한데 왜 군을 이끌고 이리로 온 것일까? 함께 연합하여 방어선을 뚫고 빌 헬름 공작령을 점령하려는 의도인가?’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셋보다는 둘이서 전공을 나누는 것이 더 이득이니까.
자비에고 주교가 지켜봐 온 발타자르는 절대 충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속이 음흉한 이였다.
‘황태자는 충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지만. 그것도 다 발타자르 공작의 수작질이겠지.’
주교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속으로 빠르게 손익계산을 따지기 시작했다.
향후 발타자르와 전공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슈텔리앙 후작과 그 일파들의 반발을 어떻게 억누를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 * *
“어서 오게, 공작.”
자비에고 주교가 다가온 발타자르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환영했다. 그러나 자비에고 주교의 격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발타자르는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왜 그러는 것인가? 무언가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자비에고 주교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한없이 자비에고 주교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이내 무언가 결심이 선 얼굴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르릉─
맑고 청명한 검명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장내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이걸…… 내가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겠는가?”
검을 뽑아 든 발타자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자비에고 주교가 물었다.
이에 발타자르가 자비에고 주교의 목에 검을 겨누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주교.”
“말해보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왜 내게 이러는 것인지.”
자비에고 주교는 이 상황이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와 역모 건으로 자신을 치려는 것도 아닐 테고 그동안 발타자르와 마찰 한 번 없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의아하기만 했다.
‘설마 아랫것들이 멋대로 일을 벌인 것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 말고는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으니까.
“살고 싶다면. 꿇어라.”
서릿발처럼 차가운 발타자르의 음성에 자비에고 주교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자비에고 주교가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검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비에고 주교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은 채 발타자르의 눈동자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마지막 질문일세. 내게 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자비에교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점령한 오펜바흐 남작령을 상대로 약탈을 허용했더군.”
그 말에 자비에고 주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 고작 그런 이유로 지금 나에게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인가?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이곳의 총지휘관은 나이고 약탈에 대한 권한도 오직 나에게만 있네! 한데 그대가 뭐라고? 얼마나 잘났기에 고작 그런 것으로 나에게 칼을 들이밀었단 말이냐!”
발타자르는 답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성을 내는 자비에고 주교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더 화가 치밀어 오른 자비에고 주교가 연달아 소리쳤다.
“지금 그대만 혼자 고고한 척, 깨끗한 척하겠다는 것인가? 그대도 똑같아! 그대라고 나와 다를 것 같은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짓밟았나? 그 자리가 그냥 이루어질 자리였던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실로 실망이로다! 자네가 지금 하려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자비에고 주교의 말에 발타자르가 검을 거두곤 자비에고 주교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곧 그의 멱살을 잡아채곤 잡아당겨 얼굴을 맞대었다.
“점령지의 영지민들을 포로로 잡든지 약탈을 허락하든지, 자네 말대로 현장 사령관인 그대의 권한이지. 내가 거기에 대고 왈가왈부할 문제도 아니고 그럴 자격도 없어. 명목상의 총사령관은 황태자 전하이시고 자네와 나는 동등한 입장이니까. 전쟁이 한창인 지금 상황에서 자네와 이렇게 다투는 것이 멍청한 짓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네.”
자비에고 주교는 말하는 발타자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말은 한없이 뜨거운데 눈동자는 시릴 듯이 차가웠다.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발타자르가 이내 기세를 거침없이 내뿜으며 자비에고 주교를 씹어먹을 듯한 기세로 말을 내뱉었다.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 않나.”
그 말에 자비에고 주교의 얼굴이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뭐?”
그러니까.
계획을 망가뜨린 것 때문도 아니고.
아랫것들이 그를 건드린 것도 아닌데.
고작 점령지를 상대로 약탈을 허가했다고 이러는 것이라고? 정말로?
차라리 앞선 이유 때문이라면 이해가 되기라도 하지.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은 자비에고 주교가 황당해하는 가운데 발타자르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명확한 물증이 없이 정황만으로 일으킨 전쟁일세.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집중된 이목들을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네. 각지의 선제후들이 이번 전쟁을 규탄하는 중이니 더더욱 말이야. 한데 자네는 제국민을 상대로 약탈을 실시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네.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 선제후들에게 참전할 명분을 준 것이란 말일세.”
“그, 그건…….”
상황 파악이 되는지 자비에고 주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래서.”
발타자르가 자비에고 주교를 내팽개쳤다.
땅바닥을 나뒹군 자비에고 주교가 황망히 발타자르를 올려다보는데 발타자르가 손에 쥔 검을 땅에 박아넣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네를 제물로 삼기로 했다네.”
“……뭐?”
자비에고 주교가 넋이 나가 저도 모르게 되묻자 그를 향해 발타자르의 주먹이 날아왔다.
퍼억-
발타자르의 주먹이 자비에고 주교의 안면을 강타하고 자비에고 주교가 재차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 * *
“주교님!”
발타자르의 일방적인 폭력이 시작되고 그 광경을 목격한 크루세이더들이 황급히 자비에고 주교를 구하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갤러해드를 위시한 군타낙스 기사단이 그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양측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 들고 서로를 향해 겨누었다.
언제 전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크루세이더 중 하나가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크루세이더의 외침에 갤러해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경고했다.
“주군의 명이시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도 주군의 행사를 방해할 수 없다.”
“이런 짓을 벌이고도 발타자르 공작이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크루세이더가 사나운 기세로 경고하자 갤러해드가 움직였다.
퍼억-
갤러해드의 주먹이 크루세이더의 안면을 강타했다.
“공작이 아닌 공작 각하이시다. 말조심하도록.”
퉷 하고 핏물을 한 움큼 뱉어낸 크루세이더가 갤러해드를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지금 한번 해보자는 것입니까?”
갤러해드가 그런 크루세이더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죽고 싶다면. 휘둘러 보라.”
동시에 갤러해드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제길!”
한동안 갤러해드와 대치하던 크루세이더는 검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발타자르 군은 본대를 모조리 이끌고 온 것에 비해 자비에고 주교의 군대는 오펜바흐 남작령 전역으로 흩어진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발타자르군과 정면대결을 벌였다가는 몰살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실로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발타자르가 자비에고 주교를 죽이거나 혹은 죽음에 달할 정도의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에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 * *
“으으으…….”
자비에고 주교를 한참을 두드려 패던 발타자르는 적당한 선에서 주먹질을 멈추었다. 그러곤 연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자비에고 주교를 내버려 둔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비에고 주교의 파벌과 그 수하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발타자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차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긴 발타자르가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었다.
“내무대신과 그가 이끄는 2군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전의 계획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또한!”
묘한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발타자르가 땅에 박아두었던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제국의 신민들을 상대로 약탈 행위를 벌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발타자르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발끈한 표정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전시에 약탈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이었고 또한 전쟁에 참가한 귀족들의 권리 중 하나였다.
그 권리를 침범하려는 듯한 발타자르의 행동이 무척이나 불만스러웠지만, 감히 나서는 이는 없었다.
나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비에고 주교가 저 꼴이 되었는데 감히 나설 만한 담력을 지닌 이는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가운데 발타자르의 목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내무대신이 2군을 이끌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 총사령관이신 황태자 전하께서 위임한 권한으로 2군의 지휘권을 회수하고 1군과 2군을 합병하도록 하겠다. 내 지시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지금 이야기하라.”
“…….”
다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귀족들 일부는 얼굴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는데 발타자르가 그러한 귀족들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목당한 귀족은 자비에고 주교의 파벌 내에서도 제법 큰 세력을 일군 귀족이었다.
“자네는 내 처사가 부당하다 여기는가?”
갑작스레 발타자르에게 지목당한 귀족이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황급히 고개와 손을 내흔들며 부정했다.
“아, 아니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불만이 있다면 말하게. 들어는 주지.”
“아닙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렇다면 2군의 지휘권을 내가 가지는 것에도 불만이 없겠군?”
“예? 그, 그것이…….”
2군의 지휘권을 발타자르가 가지게 되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했다가는 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굴린 귀족이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파벌원들을 바라보았지만 다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해기에 급급했다.
“예에…… 여부가 있겠습니까.”
결국, 귀족이 체념하며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이에 발타자르가 귀족의 어깨를 둘러보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내 말 알아들었는가?”
발타자르의 말에 2군이 일제히 무릎을 굽히며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명을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