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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96화 (96/183)

공작이 회귀함 96화

촤아아악─

계급에 상관없이 무수히 많은 물의 정령이 수백 개의 뗏목을 이끄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물살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뗏목들은 마치 거대한 뱀이 땅을 기어가는 것만 같이 흐느적거렸다.

“대장. 그런데 오펜바흐 남작령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건가요? 거기는 2군이 점령해서 굳이 갈 필요가 없잖아요.”

뗏목을 이끄는 물의 정령들과 장난을 치던 트리스탄이 물었다.

“그곳에 만날 사람이 있다네.”

발타자르가 답하자 트리스탄이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런 거라면 부리시면 되잖아요? 그 만나야 할 사람이라는 분이 이만한 대군을 이끌고 직접 찾아갈 정도로 귀한 사람인가요?”

“그렇네.”

발타자르는 고민할 것도 없이 즉답했다.

천둥새는 뛰어난 정치가임과 동시에 지략가였다.

그만한 인재는 쉽게 보기 힘들었다.

아직 섬기는 이가 없다는 조건을 단다면 더더욱.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무뚝뚝한 우리 대장이 이리도 지극정성인 걸까? 가웨인 경은 뭐 아는 것 없어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궁금하시다면 장군께 직접 여쭤보시죠.”

가웨인의 말에 트리스탄이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재차 발타자르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렇다는데요?”

잠시 트리스탄과 가웨인을 바라보던 발타자르는 하나같이 궁금하다는 그들의 눈빛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둥새는…….”

“말씀 중에 죄송한데 잠시만요.”

막 발타자르가 이야기를 꺼내려는 시점에 트리스탄이 갑작스레 활을 들어 올리더니 활시위에 화살을 장전하고는 길게 잡아당겼다.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레 연계되는 동작들은 단편적으로나마 그녀가 얼마나 궁술에 숙달되었는지 알려주었다.

피이잉─

이윽고 트리스탄의 손에서 화살이 떠나가고 화살은 쏜살같이 어디론가 날아갔다.

강물을 따라 움직이는 뗏목 위에서 쏘았음에도 화살은 한치의 빗나감도 없이 날아갔고 곧 목표한 표적에 틀어박혔다.

화살이 명중한 광경을 확인한 트리스탄은 돌연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키며 발타자르를 불렀다.

“대장. 잠깐 저기 좀 보셔야겠는데요?”

트리스탄의 부름에 발타자르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미간에 화살이 꽂혀 즉사한 사내가 보였다.

복장으로 미루어보아 중앙군 소속 같았는데 그러한 사내의 옆에는 허름한 복장의 아이가 몸을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자비에고 주교. 이 얼간이가…….”

발타자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영지전 이었다면 크게 책 잡힐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의 약탈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정지.”

그 말만 남기곤 발타자르가 뗏목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는 뻔했다.

발타자르의 뒤를 따라 트리스탄과 가웨인이 뗏목에서 뛰어내렸고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갤러해드 역시 군타낙스 기사단을 이끌고 호위를 나섰다.

* * *

뗏목에서 내려 혼절한 아이를 향해 다가가자 비릿한 피 냄새와 무언가가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뒤섞여 풍겨왔다.

아이에게로 다가와 코와 입에 손을 대어보았지만,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과 손목에서도 맥이 잡히지 않았다. 그새 숨을 거둔 것이었다.

발타자르가 가만히 아이를 내려다보는데 뒤따라온 가웨인이 발타자르에게 말을 걸어왔다.

“장군. 앞쪽을 한번 보시죠.”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앞을 바라보자 사내가 지나온 길로 보이는 곳에 몇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행색으로 보아 평민들 같아 보였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2군의 소행 같습니다만.”

가웨인이 자신의 추측을 꺼내 놓았다.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시체들을 넘어 그 뒤로 시선을 옮겼다.

빽빽이 늘어선 숲 너머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불을 피운다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컸다.

“비비안.”

발타자르의 부름에 그의 머리 위에서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비비안이 답했다.

“네. 알.”

“저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봐 주겠나?”

“잠시만요.”

발타자르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가리키며 말하자 비비안이 대답과 동시에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제가 가서 처리하고 올까요?”

잔뜩 굳어 있는 발타자르의 얼굴에 트리스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발타자르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되었네.”

답하곤 발타자르가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자비에고 주교가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약탈을 허용하였고 그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

“어찌하시겠습니까?”

가웨인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 상황을 어찌 대처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전쟁 시작 전에 누차 책잡힐 일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건만.

결국, 자비에고 주교가 제 버릇을 못 고치고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크게 말이다.

“일단…….”

한동안 말없이 아이들의 시신을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아이의 시신 앞에 도달하자 쪼그려 앉아 손을 뻗었다.

그리고 미처 감지 못한 아이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손끝으로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일단. 비비안이 돌아올 때까지 잠시 대기한다. ”

일단의 지시를 내린 발타자르가 나무기둥에 몸을 기대고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았다.

정말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당장 눈앞의 이득에 눈이 먼 이는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사람을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보았다.

이건 명백히 발타자르의 실책이었다.

동시에 발타자르 홀로 일을 결정짓고 처리하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천둥새. 아니, 최소한 어느 정도 대국을 볼 줄 아는 이를 찾아 영입해야겠군.’

책사의 부재가 이토록 뼈아프게 다가온 적은 처음이었다.

* * *

“이게 무슨…….”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도착한 비비안은 거센 화마에 휩싸인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듯 마을 한구석에 타오르는 시체들의 산이 보였다.

시체가 타는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대체 어떤 이들이 이런 참혹한 짓을…….”

마을에 벌어진 참상에 비비안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마른하늘에서 빗물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툭- 툭-

한 방울, 두 방울.

가는 빗물로 시작된 빗줄기는 이내 거센 폭우로 돌변했다.

쏴아아─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가 마을을 불태우던 화마를 조금씩 잠재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화마가 자취를 감추고 까맣게 변해 버린 잔해들만 남게 되었다.

“…….”

말없이 그 광경을 응시하던 비비안이 발타자르에게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잿더미 사이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비비안은 저도 모르게 그 꿈틀거리는 잿더미를 향해 달려갔다.

탁-

순식간에 잿더미 앞에 도착한 비비안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잿더미가 흩어지며 그 아래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이야.”

비비안이 조심스럽게 아이를 불렀다.

하지만 아이는 몸을 가늘게 떠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이런…….”

난처한 표정을 짓던 비비안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푸른 빛이 아이의 몸을 휘감았다.

재로 뒤덮인 아이의 몸이 깨끗해지고, 몸에 입은 화상들과 상처들이 천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아이를 치유한 비비안은 아이의 떨림이 가라앉자 본 모습을 드러내곤 아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비비안이 아이를 품에 안아 든 순간 아이가 작게 눈을 떴다. 이런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눈동자가 참 맑구나 싶었다.

“괜찮니?”

비비안이 상냥한 목소리로 묻자 그녀와 눈동자를 마주한 아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엄…… 마…….”

‘엄마’ 그 한마디를 내뱉더니 아이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비비안이 황급히 아이의 코에 손을 대어보았다.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의 몸에 잠재되어 있던 재생력을 끌어올려 외상은 모두 치료해 내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던 것이다.

기운이 다한 아이는 그렇게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대체…… 대체…….”

비비안은 목이 메어왔다.

아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대체 어느 잔인무도한 이들이 이런 악행을 벌인 것인지 화가 났다.

“아가야. 좋은 꿈 꾸렴.”

비비안이 슬퍼하는 얼굴로 아이를 안쓰럽게 한번 쳐다보더니 조심스레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곤 이내 아이와 함께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알.”

상황을 보러 떠났던 비비안이 돌아왔다.

한데 혼자 온 것이 아닌 웬 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발타자르가 아이를 바라보자 비비안이 슬픈 얼굴로 말했다.

“죽었어요.”

발타자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동안 말없이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은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리 주게.”

“네?”

“묻어주어야지 않겠나. 그러니 이리 주게.”

발타자르가 비비안에게서 아이의 시신을 받아 들었다.

비비안이 한번 말끔히 씻겨내었지만, 아이의 몸에 밴 탄내는 사라지지 않았다.

“후우…….”

발타자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근처에서 가장 커 보이는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레 아이를 내려놓고 허리춤의 벨트에 고정된 검을 검집 채로 뽑아 들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웨인과 트리스탄 그리고 갤러해드 역시 군타낙스 기사단원들과 함께 말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참을 판 끝에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자 발타자르가 아이의 시신을 판 땅에 조심히 눕혀 준 후 그 위로 흙을 천천히 덮어주었다.

토닥- 토닥-

아이가 편히 잠들 수 있게 아이의 어미가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듯 시신을 덮은 흙을 토닥여 주었다.

“잘 자려무나.”

* * *

아이들의 시신을 묻어준 발타자르와 일행들이 뗏목으로 돌아왔다.

다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웨인과 나란히 서서 아이들이 묻힌 나무를 한없이 바라만 보고 있던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서둘러 움직여야 할 듯하네.”

“자비에고 주교께서 약탈을 실시해서입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분명 제국민을 상대로 한 약탈은 규탄받아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래도 약탈은 현장 지휘관의 재량으로 충분히 실시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것이 장군께서 이토록 심각해하실 만한 문제입니까?”

“일반적인 영지전이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네.”

이번 서부 전쟁은 빌 헬름 공작의 수족들이 이종족들의 땅으로 향한 정황을 명분 삼아 일으킨 전쟁이었다.

정확한 물증도 없이 정황만으로 일으킨 전쟁이기에 전쟁이라고 해도 포로의 처우와 점령지에 대해서 주의에 또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지금 당장은 마왕과 몬스터들의 대이동으로 움직일 수 없는 선제후들이지만 그것이 끝날 경우를 대비해야 했으니까.

동부와 남부 인근에 아크메이지를 파견해 두었다고 해도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마법사는 없지만, 마스터라는 강력한 전력이 있으니 말이다.

“한데, 자비에고 주교가 멍청하게도 그들에게 참전 명분을 줄지도 모를 일을 저질렀더군.”

어떻게든 이번 일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것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말이다.

“그래서 난 자비에고 주교를 제물로 삼을 생각이라네.”

말하는 발타자르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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